“‘시간 지나면 잊혀진다, 없었던 일로 생각해라’ 남들은 쉽게 이야기해요.”
지난 9일 <한겨레>와 만난 이아무개씨(27)는 “그날 일을 평생 잊을 수 없다”고 말했다. 첫 월급날을 기념한 회식은 3차까지 이어졌다. 어느덧 팀장 ㄱ씨와 다른 남자 동료 ㄴ씨와 함께 자기 집 앞에 와 있었다. 집에서 ㄴ씨와 소주를 더 마셨다. ㄱ씨는 보이지 않았다.
“제가 방으로 들어갔다는데 소파에 누운 건 기억나요. 취해서 어떻게 방에 들어갔는지 모르겠어요.” 누군가 이씨 자신을 만진 느낌은 있는데 인사불성에 그저 전 남자친구겠거니 했다. 반응할 힘도 없이 아침이 밝았다. 이씨를 만진 사람은 팀장이었다. 한달여가 지나 고민끝에 ‘1366’(한국여성인권진흥원에서 운영하는 상담소)에 전화를 걸었다. 상담소는 이씨 대신 팀장을 준강간 혐의로 경찰에 고발했다.
검찰은 애인으로 착각하고 반항하지 않은 경우를 준강간으로 인정하지 않았던 판례를 인용해 ㄱ팀장을 무혐의 처분했다. 이씨의 변호를 맡았던 고가영 변호사는 “피해자가 기억을 짜내서 겨우 진술한 게 되레 ‘뭔가 기억하고 있으니 심신상실이 아니다’라고 판단하는 근거가 돼 버렸다”고 말했다.
피해를 입증하지 못하는 것과 동시에 가해자가 됐다. 팀장은 이씨를 무고와 명예훼손 등으로 고소했다. 다행히 이씨는 무고 혐의 등에 불기소 처분 받았다. 검찰은 “이씨가 심신상실 상태에서 원치 않는 성관계를 가졌다고 볼 증거는 불충분하더라도 팀장을 처벌받게 할 목적으로 허위신고했다고 단정하기는 어렵다”고 밝혔다.
한국성폭력상담소 부설연구소 울림과 한국여성의전화가 지난해 발간한 ‘성폭력 역고소 피해자 지원을 위한 안내서’(안내서)를 보면 ‘성폭력 역고소’에 대해 ‘성폭력 가해자가 피소 이후 피해자를 무고로 고소하거나, 성폭력 피해자의 고소 여부와 상관없이 피해자를 명예훼손 등으로 고소하거나 민사상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제기하는 것’으로 정의한다.
성폭력 가해자가 피해자를 위협하는 수단은 무고죄 말고도 다양하다. 명예훼손죄, 위증죄, 협박죄 등이 있다. 배복주 전국성폭력상담소협의회 상임대표는 “성범죄는 뚜렷한 증거대신 정황증거만 있는 경우가 많다. 이런 경우 역고소를 당하면 피해자의 성폭력이란 실체적 진실은 가려지고, 가해자는 꽃뱀한테 당한 피해자라는 프레임이 씌워진다”고 말했다.
반면 남성들 사이에선 근거없는 비방으로 판명됐을 경우 제재도 필요한 것 아니냐는 주장이 나오는 등 역고소 문제는 ‘미투’ 국면에서 뜨거운 감자로 떠오른 상태다. 성범죄에 대한 무죄 및 무혐의 비율은 일반 사건에 비해 높은 편이라는 점이 이런 주장의 근거로 제시된다. 지난해 대법원의 ‘2017년 범죄발생검거 및 처리’ 통계를 보면, 성폭력으로 기소된 2만7248건 가운데 25% 남짓이 무죄 판결을 받았다. 전체 형사 사건의 무혐의 비율(17.8%)에 비해 높은 편이다. 그러나 이를 두고는 강력 범죄의 무죄·무혐의 비율 23.4%와 큰 차이가 없는 만큼, 너무 큰 의미를 둘 필요가 없다는 반론도 있다.
피해자라는 주장과 가해자가 아니라는 항변, 10개월여를 그렇게 보낸 이씨는 “무엇보다 돈 때문이다. 꽃뱀이다”라는 주변 사람들의 눈초리가 괴로웠다고 말했다. 이씨의 무고 사건을 변호한 김상균 변호사는 “무고로 역고소를 당할 경우 ‘꽃뱀론’ 등 2차 피해를 입게 된다”며 “2차 가해자에게 징벌적 손해배상을 적용하는 등 대책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장수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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