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법원의 판사 블랙리스트 문건으로 논란이 증폭되고 있는 지난 7일 낮 서울 서초동 대법원 법원 전시관 안에 법관의 양심과 독립 등을 명시한 헌법 제103조가 적혀 있다. 김태형 기자 xogud555@hani.co.kr
‘BH의 최대 관심 현안→선고 전 항소기각 기대하며 법무비서관실 통해 법원행정처에 전망 문의. 행정처는 우회적·간접적인 방법으로 재판부의 의중을 파악하려고 노력하고 있음.’
박근혜 정부 청와대와 양승태 사법부의 ‘뒷거래’ 연결 통로에는 ‘판사 출신 청와대 법무비서관’이 있었다. 사법행정권 남용 의혹 관련 특별조사단이 지난 25일 조사보고서를 통해 공개한 ‘원세훈 전 국정원장 판결 선고 관련 각계 동향’(2015년 2월10일 작성) 문건은, 청와대(BH)와 대법원 사이 ‘금기의 벽’이 전화 한통으로 무너졌음을 보여준다.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당시 기획조정실장)은 판사 출신인 곽병훈 법무비서관(2015년 2월~2016년 5월)과 박근혜 정부 정통성이 걸린 국정원 댓글사건 항소심 선고 과정에서 긴밀하게 내부 정보를 공유했다. 두 사람은 2005년 법원행정처 기획조정실에서 심의관(임종헌), 담당관(곽병훈)으로 한솥밥을 먹었다. 선고 방향에 대해 “항소기각 기대”라는 ‘불순한 희망’까지 거침없이 주고받은 것은 이런 관계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하지만 항소심 판결은 청와대 기대와 달리 1심에서 무죄로 판단한 원세훈 전 국정원장의 정치 개입 혐의까지 유죄로 인정했다. 항소심 선고 이후 법원행정처와 곽 비서관의 의견 교환은 더욱 노골적으로 변했다. 문건은 ‘우병우 민정수석이 사법부에 큰 불만 표시. 향후 결론에 재고의 여지가 있는 경우 상고심 절차를 조속히 진행, 전원합의체 회부 희망’ ‘법원행정처→법무비서관 통해 사법부 진의가 곡해되지 않도록 상세히 입장 설명. 법무비서관→행정처 입장을 BH 내부에 잘 전달하기로 함. 향후 내부 동향 신속히 알려주기로 함’ 등 청와대가 법무비서관실을 통해 대법원 재판까지 개입하려 한 정황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대법원 3부에 배당됐던 이 사건은 나중에 대법원 전원합의체에 회부됐는데, 핵심 증거를 인정할 수 없다며 대법관 13명 전원 일치 의견으로 파기환송됐다.
하지만 특조단은 “항소심 전망을 문의한 것은 맞지만 항소기각을 기대한다는 말은 없었다는 두 사람의 진술이 일치한다. ‘항소기각을 기대한다’는 표현도 법무비서관실 분위기에 관한 것으로 보인다”고 결론 내렸다. 거짓 진술 가능성은 배제한 채 오히려 구체적 물증(문건)까지 진술에 맞춰 해석한 것이다.
청와대와 법원행정처가 법무비서관을 소통 창구로 삼아 재판 관련 정보를 공유한 것은 이때가 처음이 아니다. 2013년 12월18일 대법원 전원합의체의 통상임금 판결 직후 임 전 차장은 당시 법무비서관을 통해 “민정 라인을 통해 판결 취지가 (청와대에) 잘 보고·전달됐음. 대법원이 정부와 재계 고민을 잘 헤아리고 이를 십분 고려해 준 것으로 받아들임” 등 청와대 ‘심기’를 살폈다. 특조단이 비공개한 내용 중에는 ‘법무비서관실과의 회식 관련’(2014년 8월31일) 문건도 있다.
서울 지역의 한 판사는 29일 “최근 청와대가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항소심 판결을 한 정형식 서울고법 부장판사를 파면해달라는 국민청원 결과를 법원행정처에 전달해 논란이 됐다. 그런데 박근혜 정부 청와대는 주요 재판 진행과 선고 결과까지 행정처에 물어본 것”이라고 했다.
현소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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