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일 문화예술계 성희롱 성폭력 특별조사단이 서울 중구 국가인권위원회에서 조사 결과를 발표하고 있다.
영화 배급사에서 일하는 ㄱ씨는 사무실에서 일을 하는 도중에 회사의 최대주주이자 이사한테 성추행을 당했다. 가해자는 ㄱ씨 앞으로 다가와 밀착시키더니 몸을 만졌다. 예술대학에 다니는 ㄴ씨는 화장실에 다녀오면서 교수한테 ‘기습 키스’ 피해를 입었다. 지난 3월12일부터 100일 동안 활동한 ‘문화예술계 성희롱 성폭력 특별조사단’(특조단)은 “문화예술계에 종사하는 여성의 57%가 성폭력을 겪은 것으로 확인됐다”고 밝혔다. ㄱ·ㄴ씨 등의 경험은 결코 일부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미투 운동’ 등을 통해 폭로된 문화예술계 성희롱·성폭력 사건 조사를 위해 국가인권위원회(인권위)와 문화체육관광부가 공동으로 꾸린 특조단은 19일 서울 중구 인권위 인권교육센터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그간 활동 결과를 발표했다. 특조단 단장을 맡은 조영선 인권위 사무총장은 “특조단 활동 종료는 우리 사회의 성희롱·성폭력이 근절되기 위한 시작점”이라며 “특조단이 꾸려졌음에도 성폭력 피해 사실을 말하지 못하는 피해자들이 여전히 많다는 사실을 잊어선 안 된다”고 말했다.
이날 특조단이 발표한 성폭력 피해 경험 설문조사 결과를 보면, 여성 응답자 2478명 가운데 성희롱 성폭력을 경험한 적이 있다고 답한 사람은 57.7%(1429명)에 달했다. 여성과 남성을 통틀어 성폭력 피해 경험이 있다고 응답한 1513명은 가해자로 선배 예술가(982명)를 가장 많이 꼽았다. 이어 기획자 및 감독(794명), 대학교수·강사(537명) 순이었다. 권력관계에 기반을 둔 성폭력이 널리 퍼져있다는 방증이다.
특히 성폭력 피해자 가운데 85% 이상은 “문제제기를 못하고 그냥 참고 넘어갔다”고 답했다. 특조단 쪽은 “도제식으로 일을 배우는 문화예술계에는 강한 위계 관계가 형성되고, 한번 문화예술계에 진입하면 평생 그 영역에서 공존해야 한다는 폐쇄성에서 나온 결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특조단은 지난 3월12일부터 6월15일까지 특별신고 상담센터를 통해 175건의 성폭력 피해 사례도 접수했다. 특조단은 이 가운데 피해자가 특조단으로 인계를 요청한 30건과 특조단으로 직접 접수된 6건 등 총 36건의 성폭력 사건을 직접 조사했다. 이 가운데 5건은 국가인권위원회법에 따라 인권위 진정 조사를 진행했고 나머지 31건은 시효만료 등의 이유로 기초조사 뒤 종결했다. 특조단은 “미투 운동이 활발했음에도 불구하고 시효가 남아있는 사건은 아직도 피해자들이 고발을 주저했다는 뜻”이라며 “여전히 우리 사회에서 성폭력 문제를 공론화하는 데는 견고한 벽이 존재한다”고 밝혔다.
특조단은 제도적 개선 방안도 함께 제안했다. 문화·예술계의 성희롱·성폭력 전담기구를 설치하고, ‘예술가의 지위 및 권리보호에 관한 법률’을 제정하는 내용 등이다. 문체부는 이날 특조단이 발표한 정책과제 및 개선사항을 검토해 향후 마련할 성희롱·성폭력 예방대책에 반영할 계획이다.
최민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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