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시 은평구 진관동 282-1 일대(1만6639㎡)의 ‘진관동 습지’. 북한산에서 생태·경관보전지역으로 지정된 유일한 습지다. 그림 박은경
▶서울 은평구 진관동 습지는 북한산 유일의 생태·경관보전지역이다. 거대도시 서울에선 존재 자체가 드문 습지다. 2005년부터 13년 동안 매주 습지를 찾아 관찰하고 기록한 책 <습지 그림일기>가 최근 나왔다. 서울에 71.5㎜의 비가 쏟아진 다음날 작가와 습지를 찾았다. 도로 옆 샛길로 들어서자 논도, 밭도, 들도, 산도 아닌 세계가 펼쳐졌다. 폭우를 견뎌낸 생명들과 분투하는 생명들이 그곳에 있었다. 변화하는 습지 환경에도 포기하지 않고 각자의 세계와 치열하게 맞서고 있었다.
사력을 다해 살아남은 존재들이 그곳에도 있었다.
“여기쯤 있었는데….”
수풀 사이를 눈과 손들이 조심스레 살폈다.
“어제(6월26일) 비가 많이 와서 떨어졌나봐.”
일주일 전 확인한 위치를 되짚었지만 ‘여기쯤 있던 것’은 눈에 띄지 않았다. 전날 서울엔 71.5㎜의 비가 쏟아졌다.
“찾았다~.”
“어디 어디?”
일행들이 모여들었다. 고마리(습지식물) 줄기에 애벌레가 매달려 있었다.
“장하게도 살아남았네.”
뱀허물쌍살벌들이 고마리 줄기에 집을 짓고 있다. 집이 뱀 허물을 벗어 놓은 모양이라고 해서 벌의 이름도 그렇게 지어졌다. 이문영 기자
논도, 밭도, 들도, 산도 아닌 세계
자세히 보면 애벌레가 아니라 애벌레처럼 생긴 벌집이었다. 작은 벌 몇 마리가 열심히 집을 짓고 있었다. 완성되면 애벌레와는 종(種)도 식성도 다른 포식자가 집 이름에 똬리를 틀게 될 것이었다. 집이 뱀 허물을 벗어 놓은 모양이라고 해서 벌의 이름도 ‘뱀허물쌍살벌’이었다.
노박덩쿨 틈에선 ‘호리병벌집’이 대롱거리고 있었다. 멧밭쥐는 풀을 돌돌 말아 작고 옴팍한 집을 지어 놓았다. 구멍에서 나온 오색딱따구리가 부리로 나무를 쪼다 날아갔다. 고라니가 와서 나무의 연한 순을 뜯어 먹었고, 멧돼지들이 다녀간 자리마다 풀들이 엉덩이 자국처럼 눌렸다. 어느 하나 사소하지 않은 생명들이 치열한 세계를 이루며 제 삶을 살아내고 있었다. 진관동 습지(서울시 은평구 진관동 282-1 일대 1만6639㎡)에서였다.
한연숙씨가 주방용 뜰채로 웅덩이 물을 떴다.
새끼 도롱뇽, 개구리 올챙이, 실잠자리 수체….
뜰채에 건져진 생명체들이 투명한 플라스틱 반찬통에서 헤엄쳤다. 일행들은 사진을 찍고 상태를 관찰했다. 습지 곳곳에 크고 작은 물웅덩이들이 숨어 있었다. 옆 웅덩이에선 박은경씨의 목소리가 커졌다.
“조개다, 조개.”
<습지 그림일기> 작가 박은경씨가 틀채로 진관동 습지 물웅덩이의 수중 생물들을 관찰하고 있다. 이문영 기자
“온도계로 물의 온도를 재고, 줄자로 물 높이도 재고, 알 무더기를 세고 하였다.”(2010년 4월5일) 그림 박은경
진관동 습지 물웅덩이에서 뜰채로 건져 올린 새끼 도롱뇽, 개구리 올챙이, 실잠자리 수체 등이 플라스틱 통에서 헤엄치고 있다. 이문영 기자
“샘에서 만난 도롱뇽.”(2010년 4월5일) 그림 박은경
콩알보다 작은 조개가 뜰채에 딸려 나왔다.
“왜 여기서 조개가 발견될까.” 지성희씨가 궁금해 했다. “새가 먹으려고 물고 왔다가 떨어뜨린 것 아닐까.” 한연숙씨가 웃으며 받았다. “소설 쓰지 마세요.” 김유성씨가 말렸다.
6월27일 오전 그들(국립공원을지키는시민의모임 회원 동아리 ‘물자리’)이 나무와 풀과 물 사이를 오갔다. 그들은 2005년부터 진관동 습지를 모니터링해왔다. 북한산 국립공원 안에 있으면서 서울에서 존재 자체가 드문 습지를 그들은 13년 간 매주 찾아왔다. 식생 변화를 알아차릴 만큼의 시간 동안 습지 식구들과 만나고 습지의 현재와 미래를 고민해온 이야기들이 최근 한 권의 책(<습지 그림일기>, 산지니)으로 묶였다. 박은경씨가 쓰고 그렸다.
본래 논이었던 습지였다.
1990년대 홍수로 경작이 중단된 논에 물을 좋아하는 고마리와 버드나무가 찾아와 우거졌다. 곤충, 양서류, 파충류, 보호야생조류 등이 번식하고 둥지를 지었다. 2002년 12월부터 북한산에서 생태·경관보전지역(전국 33개 지역)으로 지정된 유일한 습지가 됐다. 대도시에서 찾아보기 힘든 습지 생태계로 평가받았다. 은평한옥마을을 지나 흥국사(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진입로 맞은편 샛길로 들어서면 논도, 밭도, 들도, 산도 아닌 세계가 펼쳐진다. 논이 사람의 손길로부터 놓여나는 순간 사람에게 밀려났던 생명들이 돌아와 습지를 이뤄 살았다.
2005년부터 13년 동안 매주 진관동 습지를 찾아 모니터링해온 ‘물자리’(국립공원을지키는시민의모임 회원 동아리) 회원들. 오른쪽부터 박은경(<습지 그림일기> 지은이), 지성희(국시모 집행위원), 한연숙, 김유성씨. 이문영 기자
6월27일 오전 ‘물자리’ 회원들이 모니터링을 위해 진관동 습지 안으로 들어가고 있다. 이문영 기자
“이게 대륙뱀잠자리에요.”
박은경씨가 파드득(미나리과 식용 나물) 앞에 쪼그려 앉았다. 나물 줄기에 붙은 잠자리 한 마리를 노트에 옮겨 그렸다. 진관습지에서 잠자리만 32종이 확인됐다. 그림(대학 때 동양화 전공)은 ‘보는 방법’이기도 했다. 그리려면 자세히 볼 수밖에 없었다.
“관심이 많은 것을 보게 되지만 보이는 것만큼 보는 게 습지니. 없는 것이 아니라 내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니.”(153쪽)
습지를 찾는 시간이 쌓일수록 구별하기도 기억하기도 쉽지 않은 이름들이 ‘그림일기’ 안으로 들어왔다. 배암차즈기, 지칭개, 좁쌀풀, 긴알락꽃하늘소, 넓적배허리노린재, 썩덩나무노린재, 큰각시들명나방, 여덟무늬알락나방, 쥐머리거품벌레, 얼룩장다리파리….
처음 보는 식물이나 곤충은 사진으로 찍은 뒤 도감을 찾아보거나 전문가의 도움을 받아 이름을 확인했다. 때로 가깝게 다가가고 때론 멀찍이 떨어져 습지와 인간은 서로를 바라봤다.
생명의 의지
맹~꽁 맹~꽁 맹~꽁.
장마가 시작되면서 맹꽁이의 울음소리가 커졌다. 녹음기에 선명한 음성 지문을 남길 만큼 목소리가 우렁찼다. 지성희씨가 “오늘은 인사 좀 하자”며 소리 나는 곳으로 다가갔다. 발소리가 가까워지면 울음을 뚝 그친 맹꽁이들이 발소리가 멀어지면 다시 맹~꽁 맹~꽁 했다. “알도 보고 올챙이도 봤지만 다 자란 맹꽁이는 13년 동안 한 번도 제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다”(박은경)고 했다.
‘물자리’ 회원들은 주로 물웅덩이를 찾아다녔다. 웅덩이에 사는 양서류들을 생태변화를 가늠하는 지표종으로 삼아 살폈다.
“아직 꼬리가 남아 있는 개구리들까지 눈앞에서 뛰어다닐 때가 있었는데 지금은 발견하면 ‘심봤다’를 외칠 만큼 줄었어요.”(박은경)
“오늘 비가 온다고 했는데… 많이 와서 우리 개구리들이 알을 낳을 수 있는 좋은 보금자리가 만들어졌으면 좋겠다.”(2015년 3월15일) 그림 박은경
양서류의 개체 수 감소를 그들은 습지의 변화와 연관 지어 생각했다. 진관동 습지의 대표종인 버드나무는 휘어지고 처지고 꺾이면서도 눈에 띄게 늘어났다. 무성해지는 버드나무의 생육이 시기별로 스케치돼 책에 담겼다.
“습지에 물을 좋아하는 버드나무가 많이 들어와 자라고 있다.”(2007년)
“어느새 버드나무가 빼곡하게 살고 있고 갈대와 달뿌리풀도 이곳저곳에 자리를 차지하고 무리를 이루고 있다.”(2010년)
“이젠 버드나무 키가 훌쩍 커버려 북한산 능선이 안 보일 정도다.”(2016년)
생태·경관보전지역 지정 당시 습지엔 논의 흔적이 강했다. 그때 사람 키 높이였던 버드나무가 이젠 논의 자취를 지우고 울창해졌다. 버드나무의 증가는 습지의 안착을 뜻했다.
“버드나무가 빽빽해질 만큼 습지화됐지만 습지 보전의 측면에서 버드나무의 확산이 꼭 좋은 건 아니에요. 버드나무들이 물을 빨아들여 거꾸로 육지화를 앞당기기도 해요.”(지성희·국립공원을지키는시민의모임 집행위원)
박은경씨가 버드나무 아래 작은 나무를 가리켰다.
“층층나무예요.”
3년 전부터 보이기 시작했다고 했다. 층층나무, 키버들, 뽕나무, 찔레, 조팝나무, 싸리, 붉나무 등이 버드나무 사이에서 자리를 잡아갔다. 깊은 물을 좋아하는 부들이 줄었고 그 자리를 갈대와 달뿌리풀이 대체했다. 수량 감소에 따른 육지화 현상이었다. 습지는 내버려두면 육지가 됐다.
“키버들, 뽕나무, 노박덩굴, 찔레, 갯버들, 조팝나무, 싸리, 붉나무…. 습지 안에 어느덧 자란 어린 나무들. 이 습지는 어떻게 변화할까?”(2016년 3월23일) 그림 박은경
“물이 줄어든 이유는 습지 위쪽이 주말농장으로 바뀌면서 큰 영향을 준 것 같다. 물이 흐르던 곳의 수량이 줄어들었고, 말라버린 곳도 있고, 물의 흐름이 바뀐 곳도 있다.”(162쪽)
보전은 ‘개입’을 필요로 했다. 지난해까지 습지 입구에 분포했던 단풍잎돼지풀이 올해엔 습지 안쪽까지 진출했다. 단풍잎돼지풀은 환경교란종이었다. 토종 식물들을 밀어내고 그들의 자리를 빼앗았다. ‘제거’가 보전의 매뉴얼이었다.
“점점 말라가고 있는 위태롭고 불안한 물가… 언젠가는 도롱뇽 알이 물이 없어 말라 죽을 것 같아서 물이 더 많고 풀로 살짝 가려진 곳으로 옮겨주기도 했었다.”(32쪽)
개입과 관찰 사이에서 그들은 고민했다. 그들은 거리두기를 택했다. “묵논에서 스스로 습지가 됐듯 이곳이 어떻게 변해가는지 지켜보는 것도 의미 있을 것”(지성희)이라고 판단했다.
진관동 습지는 사유지였다. 보전과 개발 사이에서 갈등이 불가피했다. 훼손이 금지된 지역인데도 올무가 설치됐고, 버드나무가 베여 넘어지기도 했다. 도롱뇽 서식지는 시멘트 우물로 변했다. 폐자동차가 버려져 방치되거나 빈 농약통들이 무리지어 뒹굴었다. 발에 줄이 묶인 어린 황조롱이(천연기념물 제323호)가 나뭇가지에 줄을 감고 죽은 채 발견되기도 했다. 습지를 마음대로 할 수 없는 땅주인들의 불만도 분출했다. 그 시간 속에서 습지는 용케도 자신을 지켜왔다.
“버드나무에 어린 황조롱이 한 마리가 대롱대롱 매달려 죽어 있다. 새의 발은 줄로 묶여 있고, 그 줄이 나뭇가지에 감겨 있다. 어찌된 일일까?”(2014년 5월7일) 그림 박은경
존재할 수 없는 곳에서도 존재하기 위해 사력을 다하는 것이 생명이었다. 습지 안 그늘에서도, 습지 밖 땡볕에서도, 분투하는 생명들에겐 죽음과 소멸조차 살아남고 재생하려는 사투였다. 그 의지로 생명들은 졸아드는 각자의 세계를 버티고 있었다.
잘려나간 버드나무가 죽지 않고 새싹을 밀어 올렸다.
“마치 시금치가 붙어 있듯 새싹 다발이 자라고 있다. 닥쳐온 고난에 희망을 내뿜은 듯하다. 여린 잎은 붉은 기운으로 무장했고 잎은 예전 것보단 넓고 커다랗다. 우리도 살면서 당장 오늘 무슨 일이 일어날 줄 모른다. 하지만 그때 내 안에 숨어 있던 희망이 가동하지 않을까. 이 버드나무처럼….”(2017년 4월28일)
이문영 기자
moon0@hani.co.kr
“습지 안 풀밭에서 꿩 한 마리가 푸드득 날아가길래 설마 하며 황급히 가보았다. 어머, 꿩 알이 일곱 개나 있다. 오래 보고 싶었지만 혹시라도 꿩이 다시 오지 않을까 걱정되어 사진 몇 장 후두둑 찍고 다시 황급히 떠났다.”(2016년 6월8일) 그림 박은경
멧밭쥐가 풀을 돌돌 말아 작고 옴팍한 집을 지어 놓았다. 이문영 기자
“올무가 또 발견되었다. 인근 북한산성 분소에서 직원 네 명이 왔는데 이번 올무는 작고 허술해서 멧돼지를 잡으려 한 것 같지는 않고, 전문 밀렵꾼도 아닌 것 같다고 한다. 뭘 잡으려 했을까? 왜 잡으려 했을까?”(2016년 10월31일) 그림 박은경
“올챙이 있는 물웅덩이 부근에 농약통이 나뒹굴고 있다. 사람도 죽는데… 저 작은 올챙이는….”(2008년 5월7일) 그림 박은경
‘물자리’ 회원들이 습지 모니터링 결과를 그림과 기록으로 남기고 있다. 그림 박은경
<습지 그림일기> 작가 박은경씨가 파드득 나물 줄기에 붙은 대륙뱀잠자리를 그리고 있다. 이문영 기자
“잘려진 버드나무에 마치 시금치가 붙어 있듯 새싹 다발이 자라고 있다.”(2017년 4월28일) 그림 박은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