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서를 성폭행한 혐의 등으로 기소된 안희정 전 충남지사가 14일 오전 서울 마포구 서울서부지법에서 열린 1심 선고에서 무죄 판결을 받은 뒤 법원을 나서며 취재진 앞에 고개를 숙이고 있다. 김성광 기자 flysg2@hani.co.kr
‘그루밍’ ‘학습된 무기력 상태’ ‘노 민스 노’(No Means No).
14일 안희정 전 충남지사 1심 판결문에는 기존에는 잘 등장하지 않았던 용어들이 여러 차례 등장했다. 주로 여성계에서 젠더 문제나 성범죄와 관련해 논의할 때 사용하는 용어들을 재판부가 선고문(판결문 요약본)에 대거 차용한 것이다. 이번 사건을 판단할 때 피해자 김지은씨를 지원한 여성계의 주장을 충분히 고려하고 검토했다는 점을 강조하려는 의도로 풀이된다.
재판부가 이번 판단의 전제로 수차례 강조해 사용한 단어는 ‘성인지 감수성’이었다. ‘성인지 감수성’은 ‘성별에 대한 편견에 갇히지 않는 태도나 감수성’을 말한다. 재판부는 “성폭력 피해자는 충격, 수치심, 분노 등으로 복잡한 심리상태를 겪는 경우가 많아 성범죄 전후에 통상적으로는 모순적이거나 비합리적으로 보이는 언행을 할 수도 있다”면서, 이런 점을 고려해 증거판단에서도 ‘성인지 감수성’을 중시했다고 스스로 밝혔다.
‘성적 그루밍(grooming)’도 언급됐다. 그루밍은 주로 취약한 점이 있는 피해자와 친분을 쌓은 뒤 신뢰나 권위를 기반으로 의존적인 피해자를 성적으로 학대하거나 착취하는 행위를 뜻하는 용어다. 재판부는 “피고인이 그루밍 상태에 있었던 게 아닌지, 혹은 (피해자 김씨가) 혐오적인 사건에 직면해 무기력해지고 현실순응적이 되는 ‘학습적 무기력 상태’와 같은 심리상태에 빠진 것은 아닌지 살펴보았지만 그렇게 단정하기 어렵다는 결론에 이르렀다”고 밝혔다.
‘노 민스 노’ ‘예스 민스 예스’(Yes Means Yes)라는 개념도 나왔다. 재판부는 “위력 행사가 없더라도 상대방이 부동의 의사를 표명했는데 성관계로 나아간 경우 처벌하는 ‘노 민스 노’, 혹은 상대방의 명시적이고 적극적인 동의 의사가 있어야 하고, 그렇지 않은 경우 성관계로 나아가면 처벌하는 ‘예스 민스 예스’를 도입하는 것은 입법 정책의 문제”라며 우리 법체계에서는 안 전 지사 처벌이 어렵다고 밝혔다.
하지만 재판부는 이런 용어 검토에도 불구하고 여성계로부터 스스로 언급한 ‘성인지 감수성’이 부족하다는 비판을 받는 처지가 됐다.
장수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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