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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사회일반

“여성에게 국가는 없다”…‘안희정 무죄’ 분노 2만명 참가

등록 2018-08-18 18:56수정 2018-08-19 10:25

김지은씨 변호사 통해 입장문 보내
“왜 내게만 묻고 안희정에겐 안 묻나”
제5차 성차별 성폭력 끝장집회에 참가한 이들이 18일 오후 안희정 전 충남도지사와 안 전 지사에게 무죄를 선고한 사법부를 규탄하며 서울 종로구 신문로 서울역사박물관 앞에서 스마트폰 불빛을 밝히는 퍼포먼스를 하고 있다. 이정아 기자 leej@hani.co.kr
제5차 성차별 성폭력 끝장집회에 참가한 이들이 18일 오후 안희정 전 충남도지사와 안 전 지사에게 무죄를 선고한 사법부를 규탄하며 서울 종로구 신문로 서울역사박물관 앞에서 스마트폰 불빛을 밝히는 퍼포먼스를 하고 있다. 이정아 기자 leej@hani.co.kr
폭염이 한풀 꺾였지만 기온이 30도를 웃돌던 18일 오후 5시 서울역사박물관 앞에서 “안희정은 유죄다, 사법부도 유죄다” “우리는 끝까지 싸운다” “성범죄자 비호하는 사법부도 공범이다” “피해자 옆에 우리가 있다” 구호가 퍼졌다. 모자와 선글라스로 더위에 맞선 여성들은 집회 시작 전인 오후 4시30분께부터 모이기 시작해 서울역사박물관 앞 도로를 채웠다. 애초 1차선에 앉았던 참가자들은 여성학자 권김현영씨가 무대에 올라 “재판정에 여성의 자리는 없었다. 우리의 자리는 여기밖에 없다”며 “우리는 조각나서 구석에서 말하고 싶지 않다”고 말하자 참가자들은 경찰의 폴리스 라인을 3차로로 스스로 밀고 열었다. 오후 5시반께는 서울역사박물관에서 서대문역으로 향하는 4차선 도로중 3차선을 가득 메웠다. 집회 참가자들은 점점 늘어 주최쪽 추산 약 2만명 가량 모였다. 앞서 강남역 여성살해사건 2주기였던 지난 5월 4차 끝장집회에선 2000명이 모였다. 지난 14일 법원이 정무비서 김지은(33)씨에게 성폭력을 가한 혐의로 기소된 안희정 전 충남지사에게 무죄를 선고한 이후 여성들의 분노가 갈수록 커지는 모양새다.

성폭력 피해자들의 피해 말하기인 ‘#미투’ 이후 네차례 ‘성차별성폭력 끝장집회’를 열었던 ‘미투운동과 함께하는 시민행동’은 18일 오후 5시 서울역사박물관 앞에서 ‘여성에게 국가는 없다’는 주제로 집회를 열었다. 이날 집회는 원래 한주 뒤인 25일에 열릴 예정이었으나 안 전 지사의 무죄 선고 이후 앞당겨졌다.

김씨는 이날 집회에서 자신의 입장을 편지로 보냈다. 김씨는 “살아 내겠다고 했지만 건강이 온전치 못하다. 8월14일(선고일) 이후에는 여러차례 슬픔과 분노에 휩쓸렸다”며 “‘죽어야 제대로 된 미투로 인정받을 수 있다면 지금 당장 죽어야 할까’ 라는 생각도 수없이 했다”고 말했다. 이어 김씨는 안 전 지사의 사건을 담당한 재판부를 향해 “저는 경찰과 법원의 집요한 질문에도 성실히 대답했다. 그런데 안희정에게는 왜 페이스북에 합의에 의한 관계가 아니었다고 썼는지 묻지 않았나, 왜 가해자에게는 묻지 않으면서 제 이야기는 듣지 않았나”라고 물었다. 이어 김씨는 계속 투쟁할 뜻을 보이며 지지를 호소했다. 김씨는 “여러분이 권력자와 상사에게 받는 그 위력과 폭력은 제가 당한 것과 같다”며 “제발 함께 해 달라”고 강조했다. 김씨의 입장문은 김씨를 변호하고 있는 정혜선 변호사가 대독했다.

제5차 성차별 성폭력 끝장집회에 참가한 이들이 18일 오후안희정 전 충남도지사와 안 전 지사에게 무죄를 선고한 사법부를 규탄하며 서울 종로구 신문로 서울역사박물관을 출발해 행진하고 있다. 이정아 기자 leej@hani.co.kr
제5차 성차별 성폭력 끝장집회에 참가한 이들이 18일 오후안희정 전 충남도지사와 안 전 지사에게 무죄를 선고한 사법부를 규탄하며 서울 종로구 신문로 서울역사박물관을 출발해 행진하고 있다. 이정아 기자 leej@hani.co.kr
안 전지사의 무죄 판결은 여러모로 여성들의 공분을 일으켰다. 7살짜리 딸과 함께 집회장소를 찾은 김민지(39)씨는 “딸도 우리가 성인으로서 겪었던 성차별과 성폭력에 노출될까봐 걱정돼서 집회에 참석했다”며 “사법부가 안 전지사가 위력이 행사하지 않았다고 판단한 부분에서 많은 불만을 느낀다. 여성인권은 무시되는 것 같아 딸과 함께 나왔다”고 말했다.

50대인 엄마가 함께 집회에 가자고 권유해서 엄마와 친구와 함께 온 엄아무개(22)씨는 “합의한 관계는 잘못이라고 밝힌 안 전지사가 무죄가 난 것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말했다. 엄씨와 함께 집회 장소를 찾은 이아무개(22)씨는 “양예원씨가 공포 때문에 사진 촬영에 응했다는 건 여성들은 이해할 것”이라며 “김지은씨가 안 전지사의 위력에 눌렸다는 걸 왜 사법부는 이해하지 못하는지 모르겠다” 고 말했다.

제5차 성차별 성폭력 끝장집회에 참가한 이들이 18일 오후 안희정 전 충남도지사와 안 전 지사에게 무죄를 선고한 사법부를 규탄하며 서울 종로구 신문로 서울역사박물관을 출발해 행진하고 있다. 이정아 기자 leej@hani.co.kr
제5차 성차별 성폭력 끝장집회에 참가한 이들이 18일 오후 안희정 전 충남도지사와 안 전 지사에게 무죄를 선고한 사법부를 규탄하며 서울 종로구 신문로 서울역사박물관을 출발해 행진하고 있다. 이정아 기자 leej@hani.co.kr
‘안 전지사의 무죄’ 선고는 그동안 페미니즘 집회에 소극적이었던 여성들도 목소리를 내게 만들었다. #미투 집회에 처음 참석한 장아무개(22)씨는 “소극적인 성격인데다 남들이 어떻게 볼까 걱정돼 그동안 여성 관련 집회에 참가하지 못했다”며 “안 전 지사의 무죄선고를 계기로 더이상 남 눈치 안보고 참지 않고 목소리를 내기로 했다”고 말했다. 장씨는 “학교에서도 선배, 또는 남자인 친구들이 완곡한 어조로 말하는 강요 때문에 성폭력을 강요당한 경험이 있다. 김지은씨를 이해한다”며 “강요때문에 어쩔 수 없었던 김지은씨의 대처를 사법부가 동의로 해석했다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말했다. 장씨는 혜화역 시위 등 여성 인권 집회에 계속 참여할 뜻을 밝혔다.

친구들과 함께 온 성아무개(28)씨도 “여성집회에 참여한 적이 없었지만 무죄 선고에 분노를 느껴 참여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며 “이번 판결을 성폭력 피해자들에게 침묵을 강요한 것이다. 피해자들에게 지지하고 있다고, 연대하고 있다고, 혼자가 아니라고 말해주고 싶어서 집회에 참여하게 됐다”고 말했다.

이날 집회에선 고은 시인의 성폭력을 이야기 했다가 되레 10억원대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당한 최영미 시인도 무대에 올랐다. 최 시인은 “이 판결을 지지할 수 없다”며 “김지은씨는 진술을 번복하지 않았다. 하지만 안희정은 비서실을 통해 합의에 의한 관계였다고 했다 이후 합의에 의한 관계는 아니었다고 했다. 또 소송이 시작되니까 합의에 의한 관계라고 말했다. 두번이나 진술을 번복한 사람의 말을 어떻게 믿어야 하냐”고 되물었다. 최 시인은 8살에 어머니의 남자친구로부터 성폭행 피해를 당했던 미국 시인 마야 안젤루의 시 ‘그래도 일어서리라’를 읽었다.

집회참가자들은 오후 6시 광화문을 거쳐 경복궁앞에서 청와대를 향해 정부를 규탄하는 목소리를 낸 뒤 다시 서울역사박물관으로 돌아와 2부 집회를 열었다. 집회 참가자들은 약 1시간 30분 가량 행진 뒤 자신들의 분노를 담은 ‘마음 속 횃불’을 들었다. 주최쪽은 무대앞에서 햇불 10개를 들었고 참가자들은 휴대전화의 플래시를 켜 안 전 지사에 무죄를 선고한 사법부에 분노를 드러냈다. 또 ‘편파수사’ ‘편파판결’ ‘피해자다움’ ‘남성연대’ ‘강간문화’ ‘성폭력 폭력’ ‘폭력을 확산하는 언론’ ‘역고소’ ‘꽃뱀’ ‘2차 피해’ ‘명예훼손’이 적힌 30미터짜리 검은 현수막을 찢는 퍼포먼스를 벌였다.

제5차 성차별 성폭력 끝장집회에 참가한 이들이 18일 오후 서울 종로구 신문로 서울역사박물관 앞에서 성차별과 성폭력 관련 단어들을 쓴 대형 펼침막을 찢는 상징의식을 하고 있다. 이정아 기자 leej@hani.co.kr
제5차 성차별 성폭력 끝장집회에 참가한 이들이 18일 오후 서울 종로구 신문로 서울역사박물관 앞에서 성차별과 성폭력 관련 단어들을 쓴 대형 펼침막을 찢는 상징의식을 하고 있다. 이정아 기자 leej@hani.co.kr
성폭력 피해여성들의 발언도 이어졌다. 자신을 성폭력 피해 생존자라고 밝힌 한 여성은 “2015년 일하던 카페의 매니저가 성폭행해 고소했다. 저는 법원에 갈 때 화장도 못 하고 옷도 칙칙하게 입는 등 법원이 기대하는 응당한 피해자의 모습을 해야 했다. 가해자는 저를 협박죄로 고소하려 했지만, 결국 징역 4년이 선고됐다"고 말해 참가자들의 환호받았다. 이어 “가해쪽의 변호사는 저의 SNS 내용이 밝아 보인다고 피해자 답지 않다고 했다. 100명의 가해자가 있다면 100명의 피해자들이 존재한다. 피해자 다운 것은 무엇인가. 그 기준은 누가 만드는 것이냐”며 “”피해자 말을 들어달라. 더이상 피해자들이 숨지 않아도 되는 세상을 만들어달라”고 말했다. 문단 내 성폭력 피해자라고 밝힌 여성도 “내 존재가 문단 내 성폭력의 증거다. 그러나 우울증, 병원기록이 없으면 내 피해는 지워진다”며 “내 피해는 가해자의 협박으로 지워졌고 곧 명예훼손으로 고소를 당했다. 우리는 ‘김지은이 아니어야’ 사회생활을 할 수 있었다”고 사법부를 비판했다. 시민행동은 9월, 10월에도 집회를 개최할 것을 예고했다.

안 전 지사는 지난해 7월부터 올해 2월까지 김씨를 성폭행·강제추행한 혐의 등으로 재판에 넘겨졌다. 안 전 지사의 사건을 맡은 서울서부지검(부장판사 조병구)는 지난 14일 위력은 있었지만 위력을 행사하지는 않았다며 안 전 지사의 모든 혐의에 대해 무죄를 선고했다.

<김지은씨 입장문 전문>

안녕하세요. 김지은입니다.

이 자리에 함께해주셔서 정말 감사드립니다.

여러분과 함께여서 오늘도 힘을 냅니다.

살아 내겠다고 했지만 건강이 온전치 못합니다. 지난 3월 이후 지금까지 제대로 잠들지 못했습니다. 8월14일 이후에는 여러차례 슬픔과 분노에 휩쓸렸습니다. 살아 내겠다고 했지만 살아내기가 너무나 힘겹습니다.

죽어야 제대로 된 미투로 인정 받을 수 있다면 지금 당장 죽어야 할까? 라는 생각도 수도 없이 했습니다.

큰 모자, 뿔테 안경, 마스크 뒤에 숨어 얼마나 더 사람들을 피해다녀야할까.. 이 악몽이 언제쯤 끝날까.. 일상은 언제 찾아올까.. 늘 생각합니다.

저는 그날 안희정에게 물리적 폭력과 성적 폭력을 당한 것입니다.

저는 그날 제가 할 수 있는 최대의 거절을 분명히 표시했습니다.

저는 그날 직장에서 잘릴것 같아 도망치지 못했습니다.

저는 그날 일을 망치지 않으려고 티내지 않고 업무를 했습니다.

저는 그날 안희정의 미안하다, 다시는 그러지 않겠다는 말을 믿었습니다.

저는 그날 안희정의 범죄들을 잊기 위해 일에만 매진했습니다.

검찰의 집요한 수사와 법원의 이상한 질문에도 성실히 대답했습니다. 일관되게 답했고, 많은 증거들을 제출했습니다.

세분의 판사님.

제 목소리 들으셨습니까?

당신들이 물은 질문에 답한 제 답변 들으셨습니까?

검찰이 재차, 3차 검증하고 확인한 증거들 읽어보셨습니까?

듣지 않고, 확인하지 않으실거면서 제게 왜 물으셨습니까?

세분의 판사님.

안희정에게 물으셨습니까?

왜 김지은에게 미안하다 말하며 그렇게 여러차례 농락하였느냐 물으셨습니까?

왜 페이스북에 합의에 의한 관계가 아니었다고 썼느냐 물으셨습니까?

왜 검찰 출두 직후 자신의 휴대폰을 파기했느냐 물으셨습니까?

왜 가해자에게는 묻지 않으셨나요?

가해자의 증인들이 하는 말과 그들이 낸 증거는 왜 다 들으면서, 왜 저의 이야기나 어렵게 진실을 말한 사람들의 목소리는 듣지 않으셨나요?

왜 제게는 물으시고, 가해자에게는 묻지 않으십니까?

왜 제 답변은 듣지 않으시고, 답하지 않은 가해자의 말은 귀담아 들으십니까?

그동안 정말 성실히, 악착 같이 마음을 다잡고, 수사 받고 재판 받았습니다. 무수히 많은 그 질문 앞에 다 답했습니다.

이제 제게 또 무슨 질문을 하실 건가요? 이제 제가 또 무슨 답변을 해야할까요?

지금 제가 할 수 있는 거라곤, 합리적이고 상식적인 판결을 해줄 수 있는 판사님들을 만나게 해달라고 간절히 바라는 것 밖에 없습니다.

이제 더 이상 대한민국에서 제가 기댈 곳은 아무 곳도 없습니다. 그저 가만히 있는 것 밖에 없습니다.

이게 지금 제가 겪고 있는 현실입니다.

오늘 함께 해주신 분들 정말 감사드립니다.

있는 그대로의 진실을 밝히기 위해 증언해주신 분들 정말 감사드립니다.

정치적인 압박을 받으면서도 의견 표명해주신 분들께도 정말 감사드립니다.

저는 아는 전관 법조인도 없고,

저는 아는 유력 정치인도 없습니다.

저는 아는 높은 언론인도 없고,

저는 아는 고위 경찰도 없습니다.

저는 하루하루 열심히 살았던 노동자이자, 평범한 시민일 뿐입니다.

지금 듣고 계신 수많은 평범한 시민분들께 부탁드립니다.

여러분들이 권력자와 상사에게 받는 그 위력과 폭력, 제가 당한 것과 같습니다.

판사님들은 ‘성폭력만은 다르다.’고 하십니다.

무엇이 다릅니까?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접하는 무수히 많은 그 폭력과 무엇이 다릅니까?

제발 함께해주십시오.

관심 가져주십시오.

자극적인 제목과 거짓 이야기들만 보지 마시고, 한번만 더 진실에 관심 가져 주십시오.

여전히 만연한 2차 피해에도 수사는 더디기만 합니다. 저들은 지난 5개월간 그랬듯, 앞으로도 저열하게 온갖 거짓들을 유포할 것입니다. 그 유포에 앞장서는 사람들 중에는 정치인의 보좌진도 있고, 여론전문가도 있습니다.

강한 저들의 힘 앞에 대적할 수 있는 건 여러분들의 관심 밖에 없습니다. 제발 관심 갖고 진실을 지켜주십시오.

위력은 있지만 위력은 아니다.

거절은 했지만 유죄는 아니다.

합의하지 않은 관계이나 강간은 아니다.

원치 않는 성관계는 있었으나 성폭력은 아니다.

그때는 미안했지만 지금은 아니다.

뭐가 아니라는 것인가요?

바로 잡을 때까지 이 악물고,

살아 내겠습니다.

여러분 도와주세요.

감사합니다.

김지은 올림

장수경 기자 flying710@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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