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단체 회원들이 지난해 12월 서울 중구 서울지방고용노동청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직장 내 성폭력 철폐를 촉구하고 있다. 백소아 기자 thanks@hani.co.kr
“(다른 회사에서 성희롱 피해자인) 어린 여직원 두 명을 조사했었는데 (회사 쪽에서) 충분한 여행경비를 (지원하는 것으로) 해서 그렇게 (합의를) 진행한 적이 있어요.”
2015년 4월 일본계 ㅁ은행에서 상사에게 강제추행을 당한 뒤 고용노동부에 진정을 한 강민희(가명·32)씨가 사건을 조사하러 병원을 찾은 근로감독관에게 들은 말이다. 다른 직장 내 성희롱 근로감독 사례 가운데 해외여행을 보내주는 선에서 사건을 무마한 경험을 언급하며 합의를 종용한 셈이다. 당시 근로감독관은 “단순히 다른 사례를 말해준 것일 뿐”이라고 해명했지만, 강씨는 “근로감독관이 사건을 조사하는 게 아니라 합의하라고 말 하는 것이 도무지 이해되지 않았다”고 말했다.
직장 내 성폭력 사건이 반복되는 배경으로는 뒷짐 지고 있는 고용부가 첫손에 꼽힌다. 경찰 등 수사기관은 성폭력 사건을 수사할 수 있지만 다양한 층위로 성폭력이 용인되는 직장 내부의 성차별 구조를 바꿀 순 없다. 여성가족부는 사업주와 작업장에 실효성 있는 강제조처를 할 방도가 없다. 하지만 노동부는 직접 사건을 조사할 수도 있고, 과태료 처분이나 형사 고발 등 강제조처도 할 수 있다. 직장 내 성폭력 문제에 소극적인 노동부의 태도에 아쉬움의 목소리가 큰 이유다.
<한겨레>가 국회 환경노동위원회 소속 이용득 더불어민주당 의원에게 제출받은 자료를 보면, 2013년부터 지난 4월까지 노동부에 접수된 성희롱 사건은 총 2734건이다. 하지만 이 가운데 80%에 달하는 2174건은 별다른 조처 없이 ‘행정종결’ 됐다. 과태료를 부과한 경우는 13%인 359건 뿐이다. 수사의뢰 등 검찰로 사건을 넘긴 경우는 총 148건에 그쳤다. 정부는 지난해 하반기 이후 ‘공공부문 성희롱 방지 대책’을 잇따라 발표하고 있지만, 이런 추이는 좀처럼 개선되지 않고 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여전히 직장 내 성폭력 사건 발생된 뒤에 2차 가해가 잇따른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의견이다. 실제 한국여성노동자회 등이 운용하는 양성평등상담실 등에는 강씨가 겪은 사례처럼 노동부 진정 접수 뒤 근로감독관이 시간만 끌다가 진정 취하를 종용하거나, 회사 쪽이 제출한 증거 만으로 사업장에 문제가 없는 것처럼 사건을 종결했다는 상담이 잇따른다고 한다.
고용부 쪽은 “성희롱 사건의 경우 진정 이후 피해자들이 조사에 응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고 행정종결이 많은 이유를 설명했다. 하지만 노동부의 의지 부족이 더 큰 문제라는 지적이 나온다. 이영희 여성노동법률지원센터 사무국장은 <한겨레>와의 통화에서 “직장 내 성희롱 등 문제에 대한 전문성을 가진 근로감독관 자체가 부족하다”며 “근로감독관이 진정인에게 ‘이런 것도 성희롱이냐’고 말하거나, 사업주가 보낸 문서만 보고 직장 내 성폭력 문제가 시정됐다고 종결 처리하는 사례가 많다”고 말했다. 그는 특히 “의지가 있다면 직장 내 성차별 문제를 전담하는 조직을 크게 늘려야 한다”며 “이명박 정부 때 각 지방청별로 있었던 고용평등과를 없앤 뒤로 노동부는 사실상 이 문제에서 손을 뗀 상태”라고 지적했다.
이용득 의원은 “직장 내 성폭력 문제를 해결해야 할 주무부처는 노동부다. 노동부가 적극적으로 사건을 수사하고 감독해야 한다”고 말했다.
정환봉 기자
bonge@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