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더불어민주당의 금태섭 의원은 지난 14일 안희정 전 충남지사의 비서 성폭력 혐의에 대해 무죄 선고가 나온 뒤 17일 페이스북에 올린 글에서 “법이 여성들에게 한 모든 일, 그리고 법이 여성들에게 해주지 못한 모든 일이 떠오르면서, 솔직히 침을 뱉고 싶어진다”고 재판부를 비판했다. 금 의원은 여당에서 안희정 사건 1심 선고를 공개적으로 비판한 몇 안 되는 의원 중 한명이다. 검사·변호사를 거친 금 의원이 안희정 전 지사 사건 1심 판결의 문제점을 분석한 글을 싣는다.
지난 14일 성폭력 혐의로 기소된 안희정 전 충남지사가 서울 마포구 서울서부지법에서 열리는 1심 선고에 출석하자, 여성단체 회원들이 안 전 지사를 비난하는 구호를 외치고 있다. 김성광 기자 flysg2@hani.co.kr
이런 말들에 가장 기가 차고 화가 난다.
“안희정 1심 판결에 분노하는 이들을 존중하고 그 마음에 공감한다. 그러나 증거도 없는데 처벌할 수는 없다.”
“피해자중심주의는 중요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가해자의 말은 무조건 배척하고 피해자의 말을 무조건 믿어서는 안 된다.”
“형사법의 기본도 모르는 소리다. 죄형법정주의, 증거재판주의라는 원칙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
누가 증거도 없는데 가해자를 처벌하자고 했나. 누가 피해자의 말을 무조건 믿어달라고 했나. 언제, 누가 죄형법정주의와 증거재판주의의 원칙을 포기하자고 했나. 우리는 그런 터무니없는 주장을 한 적이 없다. 그러니 남의 말을 함부로 왜곡해서 비난하고 동정하고 공감하는 척 참견하지 말아 달라. 우리의 주장은, 가장 객관적인 기준에 따라, 부정할 수 없는 증거를 기초로, 너무나 분명한 현실의 상황에 비추어 볼 때 안희정 전 충남지사의 위력에 의한 성폭력이 인정된다는 것이다. 피해자의 일방적인 주장이 아닌, 아직도 남아 있는 텔레그램 문자 등 객관적인 증거에 의해서 ‘성적 자기결정권의 침해’가 여실히 드러난다는 것이다.
‘피해자중심주의’는 가해자로 지목된 사람은 무조건 처벌받아야 하고 피해를 봤다고 주장하는 사람의 말은 무조건 믿어야 한다는 황당무계한 원칙이 아니다. 다만 똑같은 객관적 상황에 대하여 가해자가 인식하는 사정(예를 들어 새벽 2시에 부하 직원에게 호텔 방으로 맥주를 가지고 오라고 시켰는데 가지고 왔고, 맥주를 들고 있는 상태에서 껴안았는데 뿌리치지 않았으니 성관계에도 동의했다는 인식)과 피해자가 인식하는 사정(비서로 일한 지 한달 만에 처음으로 간 해외출장에서 새벽 2시에 방으로 맥주를 가져다 달라는 지시를 받고 그대로 따랐는데, 전혀 상상도 못한 상태에서 상사가 끌어안았고 당황한 나머지 제대로 반항을 할 수 없었던 것이지 성관계에 동의한 것은 아니라는 인식)이 다를 때 일방적으로 가해자의 주장을 따라서는 안 된다는 원칙이다. 어느 쪽 말이 맞는지 객관적으로, 증거에 따라 검토를 해보자.
피고인 위력 ‘행사’ 안 했다는 법원
대한민국 수많은 직장 현실 외면
방문 앞에 담배 두고 가지 그랬느냐고?
평판사는 부장판사한테 그럴 수 있나
피해자 행적 하나하나 묻는 법원
가해자에겐 이상할 정도로 관대
‘애정관계’였다면 왜 한차례도
개인적인 식사·사진·문자 없었나
당신은 거절할 수 있나
현행 형법은 업무, 고용 기타 관계로 인하여 자기의 보호 또는 감독을 받는 사람에 대하여 위계 또는 위력으로써 간음한 자는 5년 이하의 징역 또는 1500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고 규정하고 있다.(형법 제303조 제1항) 피해자는 피고인의 수행비서로서 감독을 받는 사람이다. 따라서 문제는 피고인이 ‘위력으로써’ 성폭행을 한 것인지 여부에 달려 있다. ‘위력’에는 폭행·협박뿐 아니라 사회적·경제적·정치적인 지위나 권세도 포함된다. 이로 인하여 현실적으로 피해자의 자유의사가 제압될 것을 요하는 것도 아니다.
법원은, 피고인이 도지사이며 사회적 영향력이 막강한 유력 정치인이었다는 점, 그에 비하여 피해자는 피고인이 언제든지 임의로 면직시킬 수 있는 비서로 근무하고 있었다는 점을 근거로 피고인에게는 업무상 수직적, 권력적 관계로 인하여 피해자의 자유의사를 제압하기에 충분할 정도의 위력이 있었다고 인정한다.
그러나 법원은 여기서 위력의 ‘존재’와 ‘행사’를 구분한 다음 피고인이 평소 위력을 행사하지는 않았다고 판단을 내린다. 즉 위력을 가지고 있기는 하지만 평소에는 그것을 사용하지 않고 있었기 때문에 실제로 성관계가 있었을 때 위력을 행사했는지 다시 살펴봐야 한다는 것이다. 이 지점부터 동의하기가 어렵다.
법원이, 피고인이 평소에 위력을 행사하지 않았다고 하는 근거는 대체로 이런 것들이다.
① 피해자에게 특별히 부당한 대우를 하였거나 고용·승진·급여 등을 이유로 심리적 부담을 준 사정이 드러나지 않는다.
② 피해자가 전임 수행비서들에 비해서 특별히 과중한 업무를 담당하지 않았다.
③ 피고인은 피해자에게 ‘담배’ ‘맥주’ ‘모기향’과 같이 단어로만 짧게 적은 문자를 보내기도 했지만, 그때그때 기분에 따라 ‘고생했어요’ ‘감사합니다’ ‘~가요’ ‘~줘요’와 같이 피해자를 존중하는 표현도 종종 사용했다.
④ 피고인은 직책이 낮거나 나이 어린 부하 직원들과 어울려 담배를 피우기도 했고, 직원들이 비실명으로 불만 또는 건의사항을 올릴 수 있는 게시판을 운영했다.
법원의 판단에 의하면 피고인은 “권위적이거나 관료적이었던 것으로 보이지 아니하고, 기본적으로 참모진과 소통하는 정치인으로서의 태도를 취”했다고 한다.
만약 법원의 이런 판단이 틀렸다면, 즉 피고인이 평소 권위적으로 지위를 남용하여 비서인 피해자가 그런 위력의 영향 아래 있었다면, 판결의 결론은 정반대로 달라졌을 것이다. 위력이 존재했을 뿐 행사하지는 않았다는 법원 판단의 전제가 바뀌기 때문이다. 이런 사정들에는 왜 주목하지 않았느냐고 묻고 싶다.
㉠ 피고인은 밤 9시, 새벽 2시에도 비서인 피해자에게 ‘담배’ ‘맥주’ ‘모기향’ 등 문자를 보내서 사적인 심부름을 시켰다. 몇 분 내에 답이 없으면, “어허 문자 안 보네”라는 불호령이 날아온다. 피해자의 답은 “네, 잠시 후에 바로 설치해드리겠습니다”였다.
㉡ 피해자의 전임 수행비서(모두 남성이었다)들도 이와 똑같은 지시를 받고, 똑같이 이행했다. 아무도 부당한 지시라고 거절하지 못했다. 세상에 21세기에 부하 직원에게 담배 심부름이라니!
㉢ 피해자는 반복적으로 “수행비서는 모든 사람이 노(No)라고 할 때 마지막까지 예스(Yes)라고 하는 사람”이라는 교육을 받았다.
㉣ 성폭행에 대한 피해자의 호소를 들은 동료들은 “(안 전 지사의 방에) 들어가지 마라, 거절해라”라고 소극적으로 피해자에게 떠넘겼을 뿐 아무도 적극적으로 나서서 신고하거나 피고인을 제지하지 않았다.
수많은 여성들이 분노하는 것이 바로 이 지점이다. 이런 풍경이 낯설어 보이는가. 그렇지 않다. 대한민국의 많은 직장에는 아직도 사적인 심부름을 시키는 상사들이 넘쳐난다. 항의를 하려면 직장에서 잘릴 각오를 해야 한다. 물론 성차별도 여전하다. 여성이 이의를 제기하는 것은 두배로 어렵다. 피해자 김지은씨가 호텔 방으로 맥주를 가져다 달라는 지시를 거절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최악의 경우는 실직했을 것이고, 최상의 경우라도 이런 얘기를 들었을 것이다. “아, 여성이라서 곤란한 모양이구나. 자네는 앞으로 다른 업무를 하게.” 그렇게 자리를 옮기게 되면 동료들로부터 유난을 떤다는 뒷말을 들을 수 있다. 여성의 앞길을 자기가 막았다는 자책을 갖게 될 수도 있다.
이런 상황에 놓인 피해자에게 우리 법원은 “담배를 피고인의 방문 앞에 두고 텔레그램으로 방문 앞에 두었다는 문자메시지를 보내기만 했어도 담배를 가져다주는 업무는 지시대로 수행하되, 간음에는 이르지 않을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는 질책을 하고 있다. 짧지 않은 법조 경력으로 확신하건대, 출장 중에 부장판사가 호텔 방으로 담배를 가져다 달라고 했을 때 문 앞에 두고 갈 수 있는 강심장의 평판사도 찾아보기 쉽지 않을 것이다. 거절을 할 수 있는 관계라면 아예 그런 심부름을 시키지도 않는다. 거절 못할 것을 알기 때문에 시키는 것이다. 부장판사가 평소 젊은 판사들과 담배를 나누어 피운다고 해서 다르게 볼 일이 아니다.
지난 14일 오후 서울 마포구 서울서부지법 앞에서 불꽃페미액션 회원들이 비서 성폭행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안희정 전 충남지사에 대한 1심 무죄 선고를 규탄하는 집회를 열고 있다. 김경호 선임기자 jijae@hani.co.kr
너무도 이상한 ‘애정관계’
법원은 또한 사건 이후 피해자의 행적도 문제 삼는다. 성폭행을 당한 다음날 아침 상사인 피고인이 좋아하는 순두부집을 찾아보려고 하고(피해자는 이 사실을 부인하고 있다), 출장 일정을 정상적으로 수행했다는 점, 동료와의 사적인 대화에서 피해를 감지할 수 있는 단서를 남기지 않았다는 점을 들면서 피해자의 말을 믿기 어렵다고 한다. 이게 과연 피해자를 탓할 수 있는 일인가. 실제로 직장 내에서 성폭행을 당한 경험이 있는 분들은 이런 말을 듣고 눈물을 흘린다. 자기들도 똑같이 행동했기 때문이다. 범행 직후 신고를 하지 못하면 업무를 계속 할 수밖에 없다. 주위에 단서를 남겨야 한다고? 판사들은 성폭행을 당한 사실이 직장 내에 알려지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한번이라도 생각을 해봤을까.
이렇듯 피해자의 행적을 하나하나 따져 묻는 법원은, 이상할 정도로 가해자의 진술에 관대하다. 가해자의 주장은 피해자가 성관계에 동의했고 애정관계에 따라 이루어진 일이라는 것이다. 나는 적어도 법원이 가해자에게도 피해자에게 던진 것과 똑같은 질문을 던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애정에 의한 성관계였다면, 왜 피고인은 그 이후에도 자기 부인에게 피해자가 인사를 제대로 하지 않았다고 야단치는 문자를 보냈을까? 왜 피고인과 피해자는 단 한차례도 식사를 하거나 사진을 찍거나 혹은 정이 담긴 문자를 주고받은 일이 없을까? 어떻게 피고인은 동료와의 사적인 대화에서 피해자와의 애정관계를 감지할 수 있는 단서를 하나도 남기지 않았을까? 애정관계라면 7개월 동안 단 4차례의 성관계를 갖고, 그나마 모두 피고인의 요구에 따라 이루어졌을 뿐 피해자가 제안한 경우는 한번도 없었을까? 왜 법원은 너무나 이상해 보이는 이런 ‘애정관계’에 대해 아무런 의문도 제기하지 않고 자연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였을까.
법률가로서, 그리고 무엇보다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대한민국 법원의 판결을 존중한다. 무죄추정의 원칙과 증거재판주의는 반드시 지켜져야 한다. 무조건 유죄 판결을 하라는 것이 아니다. 법원이 성폭력 피해자들 사이에 흔히 나타나는 일견 비합리적인 반응을 참작했다면, 피고인이 주장하는 상황이 너무나 이례적이라는 점을 추궁했다면, 무엇보다 우리 직장 내에서 벌어지는 수직적 권력관계의 현실을 고려했다면, 그러고도 피고인이 위력으로 성폭행을 한 것이 아니라는 판단을 내렸다면 얼마든지 수긍할 수 있다. 그러나 법원은 그런 것들을 하나도 제대로 살펴보지 않았다.
2018년 대한민국에서 유력한 대선주자로 꼽히는 현직 도지사의 여성 수행비서가, 새벽 2시에도 담배, 맥주 심부름을 해야 하는 비정규직 직원이, 호텔 객실 앞 바닥에 담배를 놓아두고 “지사님, 담배는 밖에 두었으니 가져다 피우세요”라고 문자를 보낼 수는 없다. 우리가 사는 세상이 그런 행동을 부담 없이 할 수 있는 아름다운 세계라면, 여성이 “자기 책임 아래 성적 자기결정권을 행사할 수 있음이 당연”하다는 법원의 단언에 동의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불가능하다면, 이것이 위력이 아니고 과연 무엇인가. 명백한 현실에 눈을 감은 법원이 절망스럽다.
금태섭 더불어민주당 의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