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판] 르포
가족 호칭 개혁 ‘실패기’
가족 호칭 개혁 ‘실패기’
추석에 한복을 입고 둘러앉은 여성들이 송편을 빚고 있다. 이들 역시 누군가의 시어머니, 외할머니, 새아기, 에미, 동서, 처제, 아가씨로 불린다. 연합뉴스.
▶추석 직전 <한겨레> 토요판 커버스토리 ‘며느라기를 위한 호칭은 없다’에서는 성차별적인 가족 호칭 때문에 불편함을 느껴온 며느리들이 이번 추석, 자신부터 호칭 개혁에 나서보겠다고 결의를 다진 ‘격정방담’ 내용을 중계했습니다. 일단 자신의 가족 안에서부터 변화를 도모해보겠다던 이들은 성공했을까요? 추석연휴가 끝난 뒤 다시 물었습니다.
가족 호칭 개혁 다짐했던 여성들
추석 때 만난 가족에 제안했지만
‘도련님’, ‘아가씨’ 바꾸기 실패 시어른 눈치보는 형님, 새언니
“어떻게 도련님 이름을 부르냐”
호칭 둘러싼 견고한 권위의 성벽
나홀로 ‘투사’ 돼선 쉽게 못바꿔 결혼하자마자 ‘아가야’, 아이 낳자마자 ‘에미야’라고 자신을 부르는 시부모님 앞에서 이름을 찾고 싶다던 '내이름은김삼순'(38살, 결혼 8년차)은 편찮아서 입원하신 시어머니 앞에서 이번 추석, 어떤 말도 꺼내지 못한 채 ‘에미’의 본분을 다했다고 전했다. 사회 구성원이 대부분 따르는 지배적인 가족 호칭이 있는 상황에서 개인적으로 호칭 개혁을 도모해보는 일은 마치 권위에 도전하는 것처럼 보이기에, 편찮으신 시어른들 앞에서 꺼낼 이야기가 아닌 것이 되어버린다. 추석 연휴에 시아버지 생신이 겹친 ‘나도명절엔서방이고싶다’(34살, 결혼 9년차)는 가족 여행 제안을 거절한 시아버지 덕분에 시가에서 먹고 먹고 또 먹는 긴 명절을 보냈다. 밤새 귀향길을 달리고 도착한 시가에서 새벽 5시에 일어나 비몽사몽 일한 '내가종부라니'(37살, 결혼 11년차)는 “시가에 사촌 시동생들이 많은데 죄다 20대”라며 “도련님 호칭이 난제”라고 한숨지었다. 내년에는 대체 호칭 나올 듯 도련님, 아가씨, 외할머니, 에미야 등 가족 호칭을 바꾸려는 시도는 얼핏 크게 어려워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한번이라도 도전해본 이들은 이 관습이 얼마나 견고하고 높은 성벽인지 알게 된다. 김하수 전 연세대 교수(국문학과)는 바로 이 ‘견고함’의 뿌리를 뒤흔들지 않고는 작은 변화도 일구기 어려울 것이라고 지적한다. “보통 호칭이란 것은 한번 바뀌면 정신없이 바뀌기도 한다. 여성들이 남편을 ‘오빠’라고 부르는 흐름도 얼마 안 됐다. 하지만 현재 논란이 되는 성차별적 호칭의 경우 가부장적인 이데올로기가 덧씌워져 있어 여간해서는 바뀌지를 않는다. 가족 호칭의 문제는 남성 중심 성씨 제도, 조상숭배, 가부장제 등이 칡넝쿨처럼 엉켜 있는 문제다. 단순한 호칭 문제로만 접근하면 나이 많은 어른들은 미풍양속을 해친다고 화내고, 개혁에 나선 여성들만 괜히 ‘투사’를 만들고 만다. 성차별적 호칭을 정말 바꿀 생각이라면 그 뒤에 있는 한국 가족 제도의 문제를 보고 뿌리를 흔들어야지 시시하게 건드려서는 안된다.” ‘투사’가 되어 개인적으로 호칭 개혁에 나섰다가 처참한 실패를 맛본 이들은 정부가 발표했던 ‘성차별 호칭 개선 작업’이 어디까지 와있는지 궁금해 했다. 지난 8월31일 여성가족부는 ‘제3차 건강가정기본계획’에 성차별적인 가족 호칭 문제를 개선하겠다는 내용을 추가하겠다고 발표했다. 여가부는 이후 국립국어원과 함께 회의를 열어 올해 안으로 호칭어에 관한 연구 결과를 내놓고 이후 전문가와 국민 의견을 수렴해 내년에 대책을 발표한다는 대강의 일정을 짜놓은 단계다. 국립국어원은 지난해 실태조사를 통해 도련님, 아가씨 등 성차별적 호칭으로 인해 국민들의 불편이 크다는 결과를 얻은 뒤 현실에 맞게 <표준언어예절>을 손질하는 방안에 대해 연구 작업을 해오고 있다. 특히 호칭어, 지칭어에 집중한 연구다. 여가부 청소년가족정책실 관계자는 “기존에 사용하던 용어를 국가에서 쓰지 말라고 할 수는 없는 문제라 그 부분을 고려하면서, 성별 비대칭 문제가 발생한 호칭에 대해 대체할 수 있는 적절한 용어를 만드는 작업을 진행해 내년에는 이 용어들을 발표하려고 한다”고 설명했다. 실제 호칭 개선 연구 작업의 주무를 맡게 된 셈인 국립국어원도 고민이 깊다. 국립국어원 관계자는 “국립국어원이 1992년 <표준화법>과 2011년 <표준언어예절>을 통해 정리한 호칭어는 국민들이 이렇게 사용하고 있다 정도의 의미인데 이게 교과서와 언론매체에 실리고 시험 문제에 나오고 하다 보니 ‘정답’이 되어버린 상태”라며 “이미 도련님, 아가씨가 정답이라고 믿는 어르신 세대가 있으니 전통과 현실을 아울러야 한다는 점이 고민”이라고 말했다. 여가부는 앞으로 국립국어원 뿐만 아니라 차별 용어 개선 작업에 적극적이었던 서울시 등 이 분야에 관심이 있는 부처, 기관, 지방자치단체 등과 논의를 함께 해나갈 계획이라고 밝혔다. 천천히 바꾸라고? 익숙해지면 어쩌지? 올해 초에 연재를 마쳤던 인기 웹툰 <며느라기>가 이번 추석에 추석특별판으로 돌아왔다. 평범한 직장인 민사린이 결혼한 뒤 겪게된 불평등한 ’며느리의 삶’에 대한 고찰로 인기를 끌었던 이 웹툰의 이번 주제는 ‘명절에 시가, 처가 방문 순서 바꿔보기’였다. 말하자면 개인적인 개혁에 나선 것이다. 이번 추석에는 처가 먼저 갔다가 차례를 지낸 뒤 시가에 가기로 한 민사린 부부는 어찌어찌하여 방문 순서를 바꿔보는데는 성공했으나 여성들은 부엌, 남성들은 소파에 있는 풍경은 반복된다. 그 모습을 보며 민사린은 친정엄마의 말을 떠올렸다 “느린 것 같아도 세상은 조금씩 변하고 있어. 바뀌더라도 천천히 바뀌어야 탈이 없는거야." 민사린은 혼잣말을 한다. "정말 그럴까? 탈이 나지 않도록. 그렇게 천천히 조금씩 익숙해지면 어쩌지? 기운 빠지는 결말을 알렸지만 그래도 작은 희망은 남겨두어야겠다. 채팅 참여자들은 이번 추석의 호칭 개혁 시도가 부질 없었다고만은 생각하지 않는다. 형수님의 반응을 보고 나니 ‘도련님’이라는 말이 더 싫어졌다는 도리의 남편은 이번 실패를 발판삼아 다음 명절에는 꼭 어른들이 모두 모인 상태에서 “형수님, 이제 제게 도련님이라 하지 마세요”란 말을 다시 꺼내겠다고 다짐했다. 삼순도 시어머니 건강이 조금 나아지면 자신을 ‘에미’라 부르지 말아달라고 다시 한번 부탁해볼 생각이다. 또 이들은 아이를 키우는 부모들이 관련 정책에 대해 직접 목소리를 내는 단체인 ‘정치하는엄마들’에서 ‘바른이름’이란 소모임 활동을 통해 성차별적 용어 개선 작업을 계속 해나갈 계획이다. 임지선 기자 sun21@hani.co.kr
추석을 앞두고 서울역에서 기차에 오르는 이들의 모습. 백소아 기자 thanks@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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