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판] 르포
시내 면세점 점령한 중국 보따리상
시내 면세점 점령한 중국 보따리상
지난 31일 이른 오전 서울 중구 소공동 롯데 면세점 앞에 중국 보따리상(다이궁)으로 추정되는 사람들이 면세점 개장을 기다리며 길게 줄을 서있다.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 면세점 쇼핑은 여행 전 즐거움 중의 하나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시내 면세점에서 물건을 산다는 것은 중국 보따리상(다이궁)과의 전쟁을 각오해야 하는 일이 됐다. 시내 면제점 앞에는 이른 아침 한없이 늘어서 있는 이들의 모습을 볼 수 있다. 국내 면세점업계를 쥐락펴락하는 다이궁들의 세계를 엿봤다.
보따리상이 면세점 큰손으로
개점 전부터 1000명씩 줄서
화장품 중심 싹쓸이 쇼핑 면세에 VIP 혜택까지 받아
현지 업자나 SNS 통해 되팔아
외국인 현장 인도 제도 악용해
물건만 받고 항공권 취소 경우도 시간이 지나면서 매장 곳곳에는 화장품이 박스 채로 담긴 쇼핑백들이 쌓여 갔다. 특히 엘리베이터 앞 통로엔 물류창고로 헷갈릴 만큼 화장품들이 가득 쌓여 지나다니기도 힘들 정도였다. 기초 화장품은 상품 자체가 크게 무거운데다 한 사람이 구매 한도 갯수를 꽉 채울 정도로 많이 사다보니 카트를 이용해 옮기는 사람들도 있었다. 부피를 줄이기 위해 포장을 다 뜯어 자신의 캐리어에 옮겨 담는 사람들도 있었다. 일반적으로 여성들이 화장품 매장에서 물건을 살 땐, 제품에 대한 설명을 듣거나 직접 얼굴에 발라본다. 하지만 다이궁들은 신속하고 정확하게 자신이 원하는 제품 이름만을 말했고 면세점 직원 역시 기계적으로 제품을 계산하고 포장했다. 화장품 브랜드인 ‘맥’ 매장의 립스틱 코너엔 젊은 여성들이 많았는데 이들 역시 립스틱을 테스트해 보지 않고 수첩이나 스마트폰에 적어 둔 제품 이름만 직원에게 보여줬다. 상대적으로 사람이 적었던 한 화장품 매장에 들어서니, 매장 직원이 중국어로 인사를 해왔다. 중국인이 아닌 것을 눈치챈 뒤 한국어로 인삿말을 바꿨다. “이 사람들이 전부 다이궁인가요? 개별 관광객(싼커)은 없나요?”(기자) “오전엔 대부분 보따리들이죠. 목에는 명찰을, 등에는 백팩을 매고 캐리어를 끌고 다니는 사람들은 대부분 다이궁이에요.”(매장 직원) 백화점 내 안내방송도 중국어, 직원들도 중국인이거나 중국어를 할 줄 아는 한국인이었다. 직원들은 대량 구매를 하지 않는 손님에게는 별로 관심이 없었다. 개인 여행객으로 보이는 한 중국인이 ‘후’ 화장품 매장 앞 줄에 서서 초조한 표정으로 순서를 기다리고 있었다. 4박5일간 한국 여행을 하고 중국으로 돌아갈 예정이라는 그는 “부모님 선물로 ‘후’에서 화장품 세트를 사려고 했는데 언제 내 차례가 될지도 모르겠고, 내 앞에서 다 팔려서 못 살까봐 걱정된다”고 말했다. 오후 1시 면세점은 오전보다는 한산해진 풍경이었지만 몇몇 인기 브랜드 매장 앞엔 여전히 줄이 이어져 있었다. 롯데 면세점뿐 아니라 대부분의 시내 면제점에서 볼 수 있는 풍경이었다. 매장을 벗어나니 한바탕 전쟁을 치른 기분이었다. 잠시나마 ‘한국 속 중국’에 다녀온 기분도 들었다. ‘다시는 시내 면세점에서 물건을 살 생각은 하지말아야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이렇게 면세점 상품을 다이궁들이 싹쓸이한다면, ‘관광 산업 활성화’라는 면세의 애초 취지도 무색해진 것이 아닐까. 면세품 ‘현장 인도 제도’ 악용 중국 정부가 주한미군의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THAAD·사드) 배치에 대한 보복 조처로 단체관광객의 한국 방문을 제한하면서 한국을 찾는 중국 관광객은 크게 줄어든 상태다. 하지만 올해 면세점 매출은 사상 최대를 기록했다. 한국 면세점협회 자료를 보면 올해 1∼9월 면세점 매출은 129억1736만달러(약 14조5643억원)로 집계됐다. 9월인데 이미 지난 한해 면세점 매출(128억348만달러)을 넘어섰다. 면세점 매출은 올해 들어 지난 1월 월간 기준 사상 최대(13억8006만달러)를 기록한 뒤 3월 15억6009만달러로 다시 한번 최고 기록을 경신했다. 4월 매출은 15억2423만 달러로 역대 2위, 9월은 15억1935만 달러로 역대 3위를 각각 기록했다. 유통업계에서는 면세점 매출 증가를 다이궁의 구매액이 늘어난 결과로 보고 있다. 과거 면세점의 주요 고객은 중국인 단체 관광객이었지만, 사드 보복 이후 다이궁과 개별관광객으로 이동했다는 것이다. 다이궁의 구매액 증가는 중국인들의 한국 방문이 제한되면서 다이궁을 통한 대리구매가 증가한 결과로 분석된다. 여기에 최근 중국에서 ‘웨이상’ 시장이 폭발적으로 확대한 것도 다이궁 구매액 증가에 한몫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웨이상’은 온라인에서 에스엔에스로 상품을 판매하는 사업으로, 다이궁은 웨이상업체에 상품을 공급하는 역할을 한다. 다이궁들은 한국에 보통 한두달, 길게는 석달까지 장기 체류를 하면서 물건을 사서 밀반입 등 여러 경로를 통해 중국으로 보낸다. 면세혜택에 더해 면세점에서 대량 구매자에게 주는 추가 할인이나 브이아이피(VIP) 혜택까지 받아 국내 소비자 가격의 60% 수준으로 물건을 구매한 뒤, 중국 현지에서 국내 소비자 가격보다 10% 가량 비싸게 파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면세점에서 구매한 물건을 중국 현지에 파는 것이 아니라 국내에서 유통시키는 다이궁도 있다. 일부 다이궁들은 면세품 현장인도 제도를 악용하기도 한다. 시내면세점에서 산 면세품은 공항에 있는 출국장에서 넘겨받는 것이 원칙이지만, 외국인은 현장에서 즉시 받을 수 있도록 허용하고 있다. 이런 제도를 악용해 일부 다이궁은 예약한 탑승권으로 면세품만 산 뒤 탑승권을 취소하는 방식으로 장사를 하고 있다. 박영선 의원(더불어민주당)이 관세청에서 제출받은 자료를 보면 지난해 시내면세점 국산품 매출액은 3조6천억원으로 이 중 외국인이 현장에서 인도받은 매출액은 2조5천억원(70%)에 이른다. 박 의원은 “지난해 7월부터 올해 6월까지 총 217명이 탑승권을 빈번하게 취소하고 1인당 최소 1억원의 면세품을 대량 구매 후 시장에 되팔았던 것으로 확인됐다”고 밝혔다. 이중 한 명은 무려 192번 탑승권을 취소했다. 한 사람이 면세품을 구입한 최대 금액은 10억7500만원이나 됐다. 지난 8월엔 한 면세점 직원이 국내 화장품 판매업자와 짜고 중국인 명의로 샴푸 17억원어치를 시내 면세점에서 빼돌린 뒤 국내에 불법 유통시킨 것이 관세당국에 적발되기도 했다. 관세청은 지난 9월부터 항공권 예약을 자주 취소하거나 장기간 출국하지 않으면서 시내 면세점에서 빈번히 고액의 면세품을 사는 외국인에 한해 현장 인도를 제한하고 있다. 관세청이 제한 대상자를 선정해 면세점에 전달하면, 면세점은 이들에게 공항 면세품 인도장에서 물건을 찾아가라고 안내하는 방식이다. 관세청 관계자는 “내부 기준에 따라 600여명을 현장인도 제한 대상자로 선정했지만 시행 초기라 계도 위주로 하고 있다. 40여명만 먼저 면세점에 통보했다”고 말했다. 그는 “악용 우려가 있어 기준은 밝힐 수 없다”고 덧붙였다.
지난 30일 서울 소공동 롯데면세점 12층 매장에 한 중국인이 서있고, 옆에 쇼핑백들이 쌓여있다. 신지민 기자 godjimi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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