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언어의 줄다리기>를 펴낸 신지영 고려대 국문학과 교수가 지난 12일 자신의 연구실에서 <한겨레>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이 기사를 어떤 문장으로 시작할까.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에 대한 인간의 끊임없는 고민을 신지영(52) 고려대 교수(국문학)는 ‘줄다리기 경기’에 비유한다. 개인 뿐이랴. 한 사회 안에서도 언어 표현을 둘러싼 줄다리기가 치열하다. 민주주의 국가에서 ‘대통령’이란 단어가 옳은가? 모든 사람은 ‘미혼’ 아니면 ‘기혼’인가? 신 교수는 최근 <언어의 줄다리기>(21세기북스)를 통해 한국 사회에서 지키려는 자와 바꾸려는 자가 대격돌하는 10곳의 경기장을 지목했다.
개인적으로 <언어의 줄다리기> 출간 소식에 귀가 번쩍 뜨였던 이유가 있다. 지난 추석,
‘아가씨’나 ‘도련님’같은 성차별적 가족 호칭을 바꿔보자는 내용의 기사(<한겨레> 9월22일치 1면)를 준비하던 중 여러 국어학계 원로들로부터 ‘언어라는 게 자연스럽게 쓰이는 것인데 괜한 시비를 걸어 인위적으로 바꾸려 한다’는 식의 항의를 받았다. 이후 ‘언어란 무엇인가’란 고민에 빠져 있던 중 이 책을 만난 것이다.
“언어 표현들 사이의 줄다리기 경기는 괜히 시비를 걸거나 딴죽을 거는 일이 아니다. 기존의 이데올로기를 옹호하는 입장에서는 새로운 표현들이 줄다리기를 걸어오는 것을 불쾌해 하며 ‘별것도 아닌 것에 민감하게 반응한다’고 폄하한다. 하지만 도전장을 내미는 쪽은 기존의 이데올로기에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니 자못 심각하다.” 책 속 문장에 밑줄을 그으며 지난 12일 신 교수를 고려대학교(서울 성북구 안암동) 그의 연구실에서 만났다.
호칭 개혁 실패했어도 변화는 시작
―‘언어의 줄다리기’란 무엇이고 우리 사회에서 어떤 의미가 있나.
“모든 사람은 배움을 통해 언어를 습득한다. 때문에 언어는 현재에 쓰이지만 ‘과거의 것’일 수밖에 없다. 언어의 변화 속도는 사회 변화 속도를 따라가기 힘든 한계가 있다. 하물며 우리 사회는 압축 성장을 통해 사회가 급진적으로 변해왔다. 기존 언어가 익숙한 사람들과 그 언어가 불편한 사람들이 공존한다. 어제의 생각과 오늘의 생각이 충돌하는 순간, 언어의 줄다리기는 시작된다. 이 줄다리기를 하는 과정에서 언어 표현에 대한 우리의 민감도가 높아진다. 거슬리는 말이 많아질수록 언어 표현에 대해 점검하는 태도가 생기고 사회가 성숙한다.”
신지영 고려대 국문학과 교수가 최근 펴낸 책 <언어의 줄다리기> 21세기북스 제공
신 교수가 책에서 주목한 10개의 줄다리기 경기장은 이렇다. ‘대통령 각하-대통령님’, ‘미혼-비혼’, ‘미망인-유가족’, ‘여교사-여성 교사’, ‘청년-젊은이’, ‘자장면-짜장면’, ‘요즘 애들-요즘 어른들’, ‘비정상-정상’, ‘용천-룡천’. 그는 이 10개의 줄다리기 경기를 ‘단순한 언어 표현을 두고 벌이는 사소한 말싸움이 아닌 언어 표현들 뒤에 숨어있는 이데올로기 사이의 거대하고 치열한 대결’이라고 정의했다.
―성차별 가족 호칭 문제를 취재해보니 호칭 개혁에 대한 저항이 생각보다 강하더라.
“말을 통한 신분질서의 유지는 어떻게 보면 가장 효율적이고 무서운 것이다. 매일 사용하다보면 상대와 나의 신분 관계가 각인되고 그 호칭이 자연스러운 것이 되면서 문제의식이 마비된다. 그래서 문제의식을 갖는 것 자체가 어렵고, 문제의식을 표현했을 때 거부감이 크다. 익숙하게 써오던 언어 표현에 문제를 제기하는 것을 불편해 하고 아무 것도 아닌 일로 치부해버리는 것은 어떻게 보면 아주 자연스러운 반응이다.”
―그런 저항에도 성차별 가족 호칭에 대한 줄다리기 경기를 계속 해나가야 할까.
“‘눈뜬 장님’이나 ‘절름발이 행정’같은 표현을 생각해보자. 이런 (장애인에 대한) 차별적 표현이 쓰이던 시대, 장애인의 인권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던 시대가 있었다. 그런 시대를 좋아하고 따라가고 싶은 게 아니라면, 그 시대로부터 벗어나고 싶고 다른 사람의 인권을 존중하는 시대로 가고 싶다면 새로운 표현을 만들어야 한다. 새로운 표현을 만들 때 세상이 바뀌는 것이다.”
―과연 이 줄다리기가 우리 세대 안에 끝나긴 할까 의문이다.
“지금 이 문제를 자각한 여성들이 훗날 며느리를 맞이하게 됐을 때 어떤 태도를 갖게 되겠나 생각해보자.”
―그때나 돼야 바뀔 문제인가.
“빨리 달성하겠다고 조바심 내기보다는 과정을 중시해야 한다. 서로를 존중하며 귀 기울여주고 민주적인 의사소통을 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여보, 나는 당신 동생에게 아가씨라 부르며 존대하는데 당신은 제 동생에게 이름을 부르며 반말을 하잖아요. 서로 다 높이면 좀 더 품위있는 사람이 되지 않을까요’라고 남편을 설득해보는 건 어떨까. 한번 이런 소릴 들으면 거절하더라도 뒤꼭지에 그 말이 남아 있게 된다. 그러다 보면 변화가 생기는 것이다. 물론 가족 안에서 민주적이기가 가장 어렵긴 하다.”
―국어학계 원로들이 성차별 호칭 문제에 조금 보수적인 태도를 보인다는 인상도 받았다.
“많이 공부한 사람들의 장점은 유연성이다. 유연성이란 문제제기가 합리적이면 귀 기울여 듣는다는 것이다. 학위가 많고 연령이 높고 어느 유명한 대학의 교수라고 하면 기대치가 높아지는데 그게 함정일 수 있다. 국어학자는 관찰하는 사람이다. 깊이 있는 학자라면 언어 표현을 둘러싼 갈등을 관찰해서 왜 그런지 설명해 줘야 한다.”
‘프레지던트’를 일본이 ‘대통령’으로
―책에서 ‘각하’에 이어 ‘대통령’도 사라져야 할 표현으로 꼽았다. 우선 ‘각하’의 문제를 정리해달라.
“봉건시대 한자 문화권에서 신분이 높은 순서대로 경칭을 나열하면 ‘폐하-전하-저하-합하-각하’ 순이다. 신분 서열 최고 정점인 황제는 감히 직접 부르지도 못해 ‘섬돌 폐’자를 써서 자신이 ‘돌계단 아래 있는 사람임’을 뜻하는 호칭을 통해 황제를 불렀던 것이다. ‘각하’는 일제강점기 조선 총독에게 사용됐고 그 영향으로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대통령 등에게 사용했다. 박근혜 정부 때 이완구 총리는 거의 사라진 듯했던 ‘각하’라는 호칭을 다시 사용하기도 했다. 대한민국이 민주공화국임을 포기하지 않는 한 각하는 절대로 부활되어서는 안 되는 단어다.”
―‘대통령’이라는 단어에 대해 줄다리기 경기를 시작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대통령이라는 말은 순화대상 1호다. 일본을 통해서 들어왔고 일본의 봉건적 세계관이 들어있는 말이다. ‘대통령’이라는 단어가 우리나라에 들어온 것은 일본 신문에서 미국의 ‘프레지던트(president)’를 ‘대통령’이라고 옮긴 것을 소개한 <일사집략>(1881년)을 통해서다. ‘앞에 앉는 사람, 즉 회의의 주재자’ 정도의 뜻인 미국의 ‘프레지던트’가 어느새 ‘크게 거느리고 다스리는 사람’이 된 셈이다. 대통령이 대통령으로 불리니 그간 대통령들이 국민을 주권자가 아닌 관리와 통제의 대상으로 여기고, 국민들은 대통령을 윗사람으로 생각하게 되지 않았나 싶다. 헌법이 개정된다면 반드시 민주공화국인 대한민국에 더 잘 맞는 단어가 만들어져 새 헌법에 실리길 바란다.”
―‘결혼한 경험이 있으면 모두 기혼인가’라는 질문도 던졌다.
“미혼인지 기혼인지를 답해야 하는 서류들이 여전히 있다. 세상에는 이미 결혼을 한 사람과 아직 결혼을 하지 않은 사람, 두 부류만 존재한다고 믿는 세계관에서 나온 단어다. 미혼은 결혼을 해야 하고, 기혼은 계속 그 상태를 유지해야 한다는 강력한 결혼 이데올로기가 깃들어 있다. 이혼이란 그 세계에 없는 것이고 결혼하기 싫은 사람도 뺀 세계관이다. 이제는 ‘비혼’이나 ‘돌싱’이라는 단어가 쓰이고 있고 결혼 여부를 밝히는 일이 그렇게 중요한가에 대한 고민으로까지 나아가고 있다.”
지난 12일 신지영 고려대 교수가 <한겨레>와 만나 '언어의 줄다리기'라는 개념을 설명하고 있다.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명품’이나 ‘고객’처럼 언론이 무심코 쓰는 표현들도 지적했다.
“1989년 한양유통이 압구정동에 고가의 수입 사치품들을 판매하는 백화점을 개장하면서 일본에서 수입한 표현이 바로 명품, 그리고 명품관이었다. 당시의 기사들을 보면 백화점이 제공한 보도자료를 옮겨놓은 경우를 흔히 볼 수 있다.
‘고객’이나 ‘사은품’도 기업의 입장을 반영한 단어다. 이런 표현을 그대로 기사에 쓰는 기자들은 누구의 목소리를 대변하고 있는 걸까.”
―‘돈가스’와 ‘짜장면’을 통해 성문화된 어문 규정의 문제도 지적했다.
“오랫동안 자장면만 표준어로 인정돼왔다. 짜장면을 ‘자장면’이라 쓰면서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짜장면’이라 발음해왔다. 결국 2011년 ‘짜장면’의 저항이 승리해 표준어로 인정을 받게 됐다. 이런 현상은 표준어를 ‘돈가스’로 규정한 것에서도 여전히 나타난다. 무엇이 이런 줄다리기 경기를 만들까? 전 세계 국가 중 표준어규정, 외래어표기법 등 문서로 된 어문 규정을 갖고 있는 나라는 남한과 북한 뿐이다. 권위 있는 사전이 만들어지면 그를 중심으로 언어 생활을 하면 된다. 영어 공부를 할 때도 우리가 사전을 보지 철자법 규정을 보지 않는다. 그런데 우리는 사전이 아닌 외래어표기법과 표준어규정 제2부 표준발음법 등을 기준으로 하니 ‘돈까쓰’를 복수표준어로 삼기 어렵다. 실재 언어 사용에 기반한 사전 중심 규범을 만들어 ‘관’ 주도 언어 정책에서 ‘민’ 주도 언어 정책으로 전환해야 한다.”
불편하다는 말에 귀 기울이자
―‘여교사’ ‘여검사’라 부르는 문제도 여전하다. 어떤 이들은 이 인터뷰 역시 ‘여기자’가 ‘여교수’를 만났다고 표현할 것이다.
“우리 사회는 1970년대부터 지속적으로 여교사 급증을 걱정해왔다. 그런데 고등학교는 200
0년까지도 남성 교사의 비율이 70%를 넘었다. 4년제 대학의 여성 교수 비율이 20%를 넘은 것도 2012년의 일이다. 교육계의 남성화가 문제 되지 않는 이유는 바로 교육자는 남자여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다. 여교사, 여검사, 여교수, 여기자는 모두 그 집단에서 여성을 구분해서 보여주고 싶은 욕망의 결과다.”
―고려대 국문학과 최초의 여성 교수다.
“2003년에 처음으로 고려대 국문학과의 여성 교수가 됐다. 2000년대 이후 국문학과 박사 과정에는 여성이 압도적으로 많지만 지금도 15명의 교수 중 나를 포함해 3명만 여성이다. 학과 내 첫 여성 교수가 된 이후 여성이기 때문에 뭘 못한다는 소리를 듣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왔다. 내 에너지와 모든 것을 연구와 일에 썼고 가족들도 많이 응원해줬다. 이제 내가 다음 세대에게 그런 지지와 응원을 줘야할 때다. 사회에 있는 사람들이 더 소통을 잘 하도록 돕고 싶다는 생각을 많이 한다.”
―소통이란 무엇인가.
“세상에서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은 ‘말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이 아닐까? 그 거리를 좁히는 일이 소통이다. 말하는 사람은 자기 입장에서 말하는데 듣는 사람에게는 자기만의 절실하고 민감한 부분이 있게 마련이다. 만약 어떤 표현이 불편하다면 그에 대해 이야기하는 용기를 가졌으면 좋겠다. 또 누가 그런 이야기를 할 때 귀 기울여 들어줬으면 좋겠다. 성찰적 말하기와 배려의 듣기, 그를 통해 ‘언어 감수성’이라는 근육을 키워야 소통을 잘 할 수 있다.”
임지선 기자 sun21@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