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망 시점 허위로 발표한 총독부
“식혜 먹고 경련 일으켰다” 소문
팔다리 엄청 붓고 검은 줄 목에
시신 본 이들 목격담도 회자돼
네덜란드 화가 휴버트 보스가 그린 고종황제의 초상화. 도판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편집자주> 올해는 3·1운동과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입니다. 역사적인 해를 맞아 <한겨레>는 독자 여러분을 100년 전인 기미년(1919)의 오늘로 초대하려 합니다. 살아숨쉬는 독립운동가, 우리를 닮은 장삼이사들을 함께 만나고 오늘의 역사를 닮은 어제의 역사를 함께 써나가려 합니다. <한겨레>와 함께 기미년 1919년으로 시간여행을 떠날 준비, 되셨습니까?
광무황제(고종)의 갑작스러운 서거 소식이 알려지면서 조선인들이 큰 충격과 비탄에 빠진 가운데 조선총독부가 광무황제의 서거 소식을 하루 동안 숨긴 것도 모자라 사망시점을 22일이라고 허위 발표한 것으로 드러났다. 광무황제의 갑작스러운 서거와 총독부 은폐 의혹 등이 맞물리면서 일각에서는 독살설이 급속도로 퍼지고 있다.
조선총독부는 “이태왕(고종) 전하가 22일 오전 6시20분에 뇌일혈로 승하하였고 장례는 일본 신도 의식을 따라 거행될 것”이라고 이날 발표하였다. 하지만 실제 황제가 사망한 시점은 21일이었던 것으로 확인되었다.
사망 사실을 숨기고 사망 시점을 일부러 늦춰 발표한 사실이 알려지면서 ‘황제가 나인이 올린 식혜를 먹고 숨졌다’는 소문이 급속도로 퍼지고 있다. 20일 밤에는 10시께에 저녁을 먹었는데 이때 나인이 올린 식혜를 마신 뒤 새벽 1시30분께부터 마비 증상과 함께 경련을 일으켰다는 것이다. 공교롭게도 식혜를 올린 것으로 알려진 나인 김춘형(79·수하동 26거주)이 23일 사망하면서 누군가 독살을 은폐하기 위해 나인을 살해한 것이 아니냐는 해석까지 나온다.
시신을 목격한 이들의 전언도 독살설에 무게를 더한다. ‘황제의 팔다리가 엄청나게 부어올랐다, 입안의 이가 모두 빠져 있었으며 혀가 닳아 없어졌다, 30㎝가량 되는 검은 줄이 목 부위에서 복부까지 길게 나 있었다’ 등의 소문이 회자되고 있기 때문이다.
시중에는 독살설에 대해 사실이 아니라고 반박하는 이야기도 떠돈다. 먼저 주검에 나타난 특이사항은 사망 뒤 3일이나 지난 시신이 부패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발생하는 현상이지 독살과는 무관하다는 것이다. 나인 김춘형도 23일에 죽은 것은 맞지만 안동별궁에서 종사한 자로 황제가 머무른 덕수궁에는 출입한 적이 없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발표가 늦은 점에 대해서는 이왕직 사무관인 곤도 시로스케가 해명에 나섰다. 그는 “당시 하세가와 총독과 이왕직 고관들이 모두 부재 중인 상황에서 야마가타 정무총감과 대응방략을 놓고 고심하느라 그리된 것”이라며 “이태왕의 장례를 조선과 일본 두 왕실의 가례 뒤로 미룰 것인지 그냥 발표할지를 두고 결정을 하느라 늦어졌다”고 했다. 물론 고종의 승하 당시 경성에는 25일로 예정된 이은 왕세자의 혼례 참석을 위해 하세가와 총독과 이왕직 고관들이 모두 도일한 상황이라 야마가타와 곤도 시로스케 정도가 남아 있었다. 하지만 통상 국장에 해당하는 임금의 장례를 자식의 혼례 뒤로 연기하는 일이 예법에 맞지 않을뿐더러 사망 시점까지 허위로 공표한 점 등은 의혹이 확산되는 배경으로 작용한다.
오승훈 기자 vino@hani.co.kr
△참고문헌
윤소영, ‘한·일 언론 자료를 통한 고종독살설 검토’(한국민족운동사연구·2011)
이태진, ‘고종황제의 독살과 일본정부 수뇌부’(역사학보·20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