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학자 좌담-
‘3·1운동 100년’의 현재적 의미
‘3·1운동 100년’의 현재적 의미
<한겨레> 좌담. https://youtu.be/5dEVIKF0rcc
편집자주 올해는 3·1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는 뜻깊은 해다. <한겨레>는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100년 전 오늘의 역사를 기사의 문법으로 다시 쓰는 ‘1919 한겨레’ 기획을 진행중이다. 특히 22일은 망국의 왕이었던 고종의 서거가 공식 발표된 지 100년을 맞는 날이기도 하다. 고종은 1919년 1월21일 뇌일혈로 숨졌지만 조선총독부는 사망 시점을 하루 늦춰 발표해 ‘고종독살설’ 등 억측을 초래했다. 그의 죽음은 때마침 독립선언의 ‘거사’를 모의하던 나라 안팎 독립운동가들에게 절호의 기회가 됐다. <한겨레>는 일제강점기 역사를 오랫동안 연구해온 대표적인 역사학자 3명을 초대해 3·1운동의 의미와 아직도 정립되지 않은 비운의 왕 고종에 대한 평가 등을 물었다. 좌담은 21일 낮 서울 마포구 한겨레신문사 스튜디오에서 진행됐다.
▶진행자 3·1운동을 모르는 이는 없지만 ‘잘 아는’ 이는 드문 것 같다. 먼저 3·1운동 100주년의 의미, 우리에게 무엇일까.
▶임경석 한국 근현대사 전체를 장기적으로 보면, 서세동점의 조건 아래 서구 주도의 세계 재편 과정에서 실패한 역사였다. 그 이전에 전통적으로 존재하던 집단적 자아가 해체되고 범서구 중심의 근대체계에 식민지적으로, 노예적으로 재편되는 역사경로를 밟으면서 한국은 지도상에서 소멸됐고 죽었다. 그런데 기가 막힌 일이 생겨났다. 조선, 한국이라는 의식이 해체되고 더 이상 조선이란 이름으로 생존할 수 없는 조건에서, 놀랍게도 식민지화된 지 9년 만에 조선 사람들은 ‘내가 죽지 않았다’고 선언했다. 우리가 조선 사람이란 것을 선언한 거고 조선인으로 살겠다고 세계에 선포한 것이다. 비유하자면 부활한 거다. 3·1운동은 16세기 이후 서구 주도의 세계체제 전개 과정에서 노예적으로 포섭됐던 인류 구성원 90%의 죽어간 자아를 되살린, 인류 보편의 해방과 자유를 위한 역사 노정이고 어디 내놔도 부끄럽지 않은 거대한 역사다. 16세기 이래 서구 주도 세계체제에 반성적, 성찰적 계기를 주는 아주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다고 생각한다.
▶박찬승 당시는 세계사적 대전환기였고 1차 세계대전이 끝나면서, 특히 유럽의 약소민족들이 독립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유럽 외 다른 아시아, 아프리카(식민국가)는 (독립 대상에) 해당될 지 알 수 없는 애매한 상황이었다. 물론 제국주의 국가들은 당연히 반대했다. 객관적으로 볼 땐 식민지를 많이 가진 영국, 프랑스 등이 승전국이 됐으니 그런 나라들이 식민지를 내놓을 리 만무한 상황이어서 윌슨 미국 대통령의 이야기(민족자결주의)는 받아들여질 턱이 없는 거였다. 그러나 당시 한국의 민족운동가들은 ‘이것(민족자결주의)이 실오라기같은 것일지라도 기회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해서 운동을 전개했다. 어떻게 보면 당시 한국인들의 능동성을 보여줬다고 생각한다. 그 이전의 역사에 견줘보면 20세기 한국사에선 한국인의 능동성이 두드러지게 드러나는데 그 출발점이 3.1운동이 아닌가 한다. 오늘날 예를 들면 남북문제 경우에도 북핵문제 등으로 곧 전쟁이 일어날 것처럼 생각했고 이 문제를 어떻게 풀 건가 비관적으로 생각했지만 정부를 비롯해 온국민이 능동적으로 생각했고 그래서 위기를 해소하고 북핵문제를 풀어갈 수 있는 과정으로 들어갔다. 저는 3·1운동이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가장 중요한 교훈은 아무리 어려운 상황에서도 능동적으로 대처해야 한다는 것이라고 본다. 100년이 지난 시점에서도 3·1운동은 여전히 그런 메시지를 우리에게 발신해주고 있다는 점에서 대단히 중요한 역사적 사건이다.
▶김정인 중국의 5·4운동을 주도한 (베이징대 학생) 푸쓰녠은 3·1운동에 대해 “불가능하다는 걸 알면서도 한 혁명이었다. 그래서 정의의 결정체다”라고 평가했다. 가장 짠하면서도 정확한 판단이라는 생각이 든다. 불가능을 넘어서, 한국인이 능동성을 보이며 부활할 수 있던 힘이 어디 있었느냐 한다면 전 민주주의를 꼽고 싶다. 왕의 시대는 갔고 국민, 민족, 민중이라고 부르는 민의 시대가 열렸다. 저는 1919년을 현대사의 출발점으로 보는데, 3·1운동 당시 민주주의적인 논리로 우리의 정당성을 확보하려 한 점이 인상적이다. 최근에 (사료들을 다시) 보니 그 당시에 평화 이야기를 무척 많이 했었다. 모든 독립선언서에 평화 이야기가 들어가 있다. 민주주의와 평화 의식이 저희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높았다. 그것도 당시 사람들을 움직인 큰 논리적 힘이 아니었을까. 민주주의와 평화 시대를 열었다고 할 만큼, 평화의식도 눈여겨볼 필요가 있지 않나 한다.
3·1운동 100년의 의미
임 “해방·자유 위한 역사노정 식민지 9년만에 ‘부활’ 선언”
박 “어려운 상황 능동적 대처 3·1운동 가장 중요한 교훈”
김 “민주주의 논리로 정당성 확보 ‘왕의 시대’ 가고 ‘민의 시대’ 열려”
▶진행자 1919년의 3·1만세운동은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는 규모의 독립운동이었다. 경술국치 뒤 9년여간 숨죽이고 있던 한국인들이 만세운동에 나서기까지 가장 큰 동력은 무엇이었을까.
▶임경석 굉장히 어려운 질문이다. 혁명적 현상이 특정한 시기에 왜 발발하느냐에 대한 질문인데, 우리나라 뿐 아니라 역사상 많은 혁명적 현상에 대해 연구가 있었지만 지금까지 과문해서 그런지 쌈박한 논리를 들은 적이 없다. (웃음) 일반적으론 억압이 심하면 반발이 심하다고 이야기한다. 그런데 억압이 도대체 얼마나 심하면 혁명이 일어나는 것인가. 박정희 군사독재 체험으로 보면, 억압이 정말 심하면 공포스러워서 행동하기가 어렵다. 그저 심각한 억압과 그로부터의 군중적 불만, 반발의식 이런 구도만 갖고는 혁명 발발의 원인을 설명하기 어려운 점이 있다. 3·1운동의 경우에 뭔가 다른 요인 추가로 설명돼야 할 것 같다. 제 생각엔 집단적 심리상태 연구가 필요하다. 왜 어느날 갑자기 수백만명의 군중이 일신의 희생을 무릅쓰고 자기도 바쁜데 공동체의 일에 뛰어들었을까. 불이익, 핍박, 생명의 위협이 있을 것을 예견하는데도 뛰어든다. 한두 사람이 아니라, 수백만 명의 집단적 심리상태 조성이 어느 날 갑자기 된 것인데 왜 그럴까, 이것은 그래서 한국사회를 구성했던 그 시기 구성원들의 심리상태에 내재한 어떤 특성을 포착해야 하는 일이다. 제가 생각하기론 ‘희망’ 때문에 그런 것 같다. ‘장에 나가서 만세 부르는 데 동참하면 지금 세상 돌아가는 이치로 볼 때 내가 핍박받는 이 바람직하지 않은 사회가 바뀔지 모른다’는 희망이 집단적으로 형성된 것 같다. 직접적인 계기는 1차 세계대전의 종결이다. ‘서구 주도의 질서가 재편되어 가는데 그 와중에 제국주의 열강들 사이의 상호 이해관계 다툼 속에서 하나의 틈이 보인다.’ 사람들이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한 거 같다. 그래서 지금 행동하면 승산이 있다는 희망 때문에 수백만명이 움직인 게 아닌가 한다.
▶박찬승 3·1운동 뒤 일제 경찰이 평양시민들의 여론을 조사한 걸 보면 ‘이번 기회에 우리가 잘하면 독립될 수 있다’고 생각한 사람이 30%, ‘반신반의’가 50%, ‘절대 안 된다’가 20%라고 한다. 30%면 굉장히 높고 반신반의 50%도 굉장히 큰 것이다. 지방에서 일어난 시위에서 검거된 사람들을 신문해보면 “내가 만세 부르면 독립이 될 수도 있다고 해서 불렀다”는 이야기를 많이 한다. 그런 걸 보면 독립의 희망이 조금은 보인다고 생각한 것 같다. 신한청년당의 선우혁이 서북지방에 파견돼 기독교 지도자들을 만나 설득하는데 그때도 하는 이야기가 “파리강화회의에서 (독립될) 가능성이 있다. 전혀 가능성이 없는 게 아니다”라고 이야기한다. 당시 사람들로선 연합국 내부에서도 틈이 보이고, 미국이 센 나라니까 혹시 뭔가 될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을 생각했다고 본다. 덧붙여, 현상윤 선생이 해방 뒤에 쓴 회고록을 보면, “우리는 가능성이 그렇게 높다고 보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독립운동의 교두보를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1910년 한국이 병합된 뒤 눌려 있었고 국내외를 막론하고 독립운동도 제대로 하지 못했기 때문에 뭔가 이번 기회에 교두보를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무리하지만 3.1운동을 해야 한다 생각했다는 거다. 실제로 3.1운동을 통해 임시정부와 무장투쟁 등 교두보가 마련되지 않았나. 설사 (당장에) 독립되지 못했더라도 길게 본다면 3.1운동이 굉장히 중요한 역할 했다고 본다.
이에 더해 민중들을 움직인 건 총독부의 실정이다. 군인들이기 때문에 정치, 행정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고 한국 사람들에 대해 제대로 모르고 있었다. 나중에 일본학자가 쓴 걸 보면, 조선시대 성균관학생들이 권당이라고 해서 동맹휴학을 하는데 그런 자료를 보고 깜짝 놀랐다고 한다. 어떻게 학생들이 임금의 조치에 저항해서 동맹휴학을 할 수 있느냐, 일본에선 상상할 수 없다는 건데, 한국인들은 조선시대 때 늘상 하던 거잖나. 권당 뿐 아니라 민란도 많았고. 그런데 일본인들은 그걸 몰랐다. ‘누르면 눌릴 것이다, 억압하면 참고 복종할 것이다’라고 생각한 것. 그런데 한국 사람들은 평소에 그렇게 해오지 않았기 때문에 일단 좀 참아보다가 ‘도저히 안되겠다’, 이런 폭발점에 가까워졌을 때 민족자결주의 흐름이 불을 질렀다고 본다.
▶김정인 그런 희망의 여지가 있다는 걸 보면 무단통치가 정말 무단통치였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3·1운동 뒤 하세가와 총독이 물러나면서 후임자 사이토 총독에게 준 의견서에 보면 (3·1운동의 배경으로) 네가지를 이야기하는데 △파리강화회의 △민족자결주의 △해외독립운동, 마지막이 △무단통치다. 특히 무단통치에서 문제가 된 건 차별적 대우다. 제가 본 자료에는 차별에 대한 분노가 가장 높았던 걸로 나온다. 차별을 받으면 뭘해도 희망이 없다.
우리가 운동을 통해 희망을 찾는 건 현재 정치에 희망이 없어서다. 촛불시위도 똑같지 않았나. 요시노 사쿠조(일본의 지식인) 같은 경우도 “한국인들은 순사도 못한다. (순사보밖에 못한다) 이렇게 하면 폭동이 분명히 예상되는데 예상 못했느냐”고 반문한다. 일본인들도 굉장히 (차별에 대한 불만을) 몰랐다. 3·1운동(이 일어날 것)을 왜 몰랐을까 싶잖나. 조선총독부와 일본기자가 기록하기론 ‘약간 요상한 기운(요운)은 있다’고 표현했다. 이상한 기운은 있는데, 그 정도까지만 안 것이다. 한일의 문화가 다르다보니 우리에 대한 이해도가 낮았다.
▶진행자 1919년 1월21일 고종이 승하했다. 고종독살설이 민중의 분노를 자극하는 데 영향을 줬다는 시선도 있다. 고종 죽음의 원인이 3.1운동에도 어떤 영향을 끼쳤을까.
▶임경석 고종의 죽음은 3.1운동 발발과 관계가 매우 깊다. 고종을 저들이 독살했다고 당시 사람들이 의심하는 이유는 파리강화회의와 관계가 있다. 1907년의 헤이그밀사 사건과 연계돼있다. 헤이그에서 식민지 재편을 둘러싼 열강회의가 열리자 특사를 보냈잖나. 1919년에 다시 국제질서 재편을 놓고 파리강화회의가 열리니 고종이 다시 밀사를 보내서 일본 식민통치의 부당함을 알리고 대한민국 독립시켜줄 것을 호소할 것이란 소문이 돌았고 그래서 그것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고종을 독살했을 거라고 본 거다. 그것이 저지된 데 대한 분노가 집단적으로 형성된 거라고 할 수 있다.
▶김정인 학생들도 그랬을까. 3월5일 고종 장례식을 이용해 대규모시위를 벌인 학생들은 고종의 죽음에 대해 어떻게 생각을 했을까 싶기도 하다. 1월18일엔 일본이 전승국으로 참가하는 파리강화회의가 예정돼있고 25일에는 이은의 결혼식이 예정돼 있어서 두 사건은 고종독살설의 반대논리가 된다. 일본 입장에서 보면 중요한 행사들을 놓고 고종을 죽일 이유가 별로 없었는데 고종독살설이 나온 것은 당시 유림인 김황의 일기에 따르면 이미 죽고 난 다음에 왕실의 사람들, 민씨 일가들이 나와서 “친일파가 죽였다”고 한 것을 듣는다. 이왕직 내부의 갈등 속에 이왕직 스스로도 그런 말을 퍼뜨리고 다닌 걸 보면 굉장히 복잡한 문제였겠다는 생각이 들더라. 정세상으론 고종이 독살됐다고 볼 수 없으나, 고종독살설은 상당히 (3·1운동에) 영향이 컸을 거라고 본다. 학생들이 (고종 장례식인) 3월5일에 시위를 하는 걸 보면 고종의 죽음을 보는 관점이 다르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학생들은 어땠을까.
▶박찬승 학생들은 3월1일 시위를 할 때 탑골공원에서 나와서 종각에서 사람을 모아 대한문 앞으로 간다. 대한문 앞을 지킨 이왕직의 경비들을 밀치고 들어가서 자기들이 참배를 하겠다고 하는데 거기서 왕세자 이은 만나겠다 했으나 이은이 거절해서 돌아 나와 시가지 시위를 이어간다. 당시 세브란스의전의 어떤 학생이 쓴 걸 보면 덕수궁에 들어가보니 너무 호화로워서 실망했다고 한다. 서민들의 삶과 너무 달랐던 것이다. 특별히 (고종을 향한) 동정심은 느껴지지 않는다. 3일에 장례를 치르고 5일에 장례 일행이 돌아오게 되는데 학생들은 5일 아침에 시위를 한다. 장례식이 아직 끝나지 않았는데 개의치 않은 것이다. 오히려 장례식 끝나고 남대문역에서 기차 탈 사람들이 많을 거라고 보고 그 앞에서 시위를 한다. 나중의 회고록을 보면 3.1운동을 준비한 기독교, 천도교 사람들은 3월3일이 장례식이니 1일쯤부턴 사람이 많이 모일테니 그걸 우리가 이용하자고는 하지만, 거기에 우리가 분기해서 뭔갈 해야 한다는 이야기는 하고 있지 않다. 고종이 21일에 죽었지만 천도교에선 20일 전후부터 논의가 시작이 된 거다. (독립운동을) 논의하는데 고종이 죽었다고 하니 장례식 날짜를 이용해보자, 이렇게 논의가 진행된 거니까 고종의 죽음이 3.1운동의 계기가 됐다고 보긴 어렵고 날짜를 잡는 데 참고가 됐다고는 볼 수 있다.
▶진행자 고종 승하 100주기이기도 한데 고종에 대한 평가, 어떻게 봐야 할까.
▶김정인 일본은 1889년에 제국의회가 들어서면서 입헌군주제로 돌아섰고 중국도 1906년쯤엔 청왕조가 입헌군주제를 하겠다고 했다가 배신을 하니 신해혁명으로 가게 됐다. 1910년 시점에 동아시아 3국중에 입헌군주제로 가거나 약속한 나라가 일본과 중국이라면 끝까지 그리하지 못한 게 한국이다. (강제병합 조약문서의) 도장이 진짜냐 가짜냐의 논란으로 가면 굉장히 부끄러워진다. 전제군주제 국가에선 왕이 주권자니 왕이 도장찍으면 망하는 거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1898년에 독립협회가 의회개설운동을 할 때 고종이 거의 동의했다가 독립협회가 공화정을 꿈꾼다는 야밤의 벽보 때문에 독립협회 사람들을 체포하고 의회 개설운동을 무위로 돌린 다음에 1899년에 대한국국제를 통해서 전제군주제의 굳건함을 반포했던 자체가 반동적이라고 본다. 국제적으로 입헌군주제가 대세가 되어가는 상황에서 어떻게 평가해도 그런 고종에게 좋은 점수를 주기 어렵다.
▶임경석 황실은 식민지화에 가장 앞장서서 협력했다. ‘반민족행위자’다. 대한민국 황실이 일본 천황의 하위 위계를 갖는 이왕가 집단으로 전환됐고, 그 과정에서 이왕가로서의 합당한 예우를 일본제국에 의해 보장받았다. 그래서 왕족으로서 가졌던 특권과 재산, 사회적 지위, 명성을 식민지하에서도 향유했음을 인정해야 한다. 상해에서 임시정부가 처음 만들어졌을 때 구 황실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할지가 내부의 중요한 의제가 됐었다. 그 당시엔 구 황실을 우대하는 걸로 결론났다. 망국의 왕이었기 때문에 그들의 책임이 있기는 하나 사람들에게 정체성을 통합하는 이미지로는 여전히 존재한 점을 고려해야 한다. 그러나 역사학자로서 보자면 식민지화 과정에서 황실은 용서하기 어렵다.
▶박찬승 고종시대의 개혁이 광무개혁인데, 시기가 길진 않지만 고종이 중심이 돼 많은 근대적 개혁조처를 했고 높이 평가할 부분이 있다고들 한다. 도시계획을 새로 하거나 전기를 궁궐에 끌어들이고 무기도 사오려 하고 그런 부분들이 보인다. 그런데 1890년대 말 전국적으로 민란이 많이 일어난다. 황실이 중심이 돼 정부재정으로 들어갈 세원을 황실로 많이 돌려놓기 때문이다. 정부재정은 빈약해지고 황실재정은 늘어난다. 고종이 중심이 돼 개혁을 하려다보니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다고도 할 수 있지만 정부재정은 어쨌든 허약해진다. 또 고종은 주요 대신들을 몇 달 안돼 계속 바꾼다. 그래서 업무파악도 못한 상태에서 쫓겨나고 다른 자리로 가게 돼 정부가 취약해진다. 굉장히 큰 문제였다.
고종이 대한국 국제를 반포해 권력을 손아귀에 쥐고 정부는 허약하게 만든 상황에서 을사조약이 들어온 거다. 자신이 모든 권력을 쥐었다면 그걸 자기가 막고 책임져야 하는데 무책임하게 대응했다. 국왕이 혼자 힘으로 뭘 하겠나. 관료와 군대, 국민의 지지가 있어야 하는데 그 사람들을 다 적으로 돌리고 혼자 뭘하겠다고 하는 건 불가능한 것이다.
그 전에도 흥선대원군과 민씨 일가가 맡으면서 문제가 많았지만 대한제국 시기는 고종이 자기 마음대로 해본 것이므로, (망국에 이르는 데) 고종의 책임이 크다고 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고종을 대한제국 시기 비운의 국왕으로 볼 순 있겠지만, 영명한 군주로서 개혁을 해보려고 했는데 일본에 의해 좌절됐다고 이야기하는 건 문제가 있다. 당시 민영환 같은 사람은 왕실에서 개혁을 해보려 했는데 신임하고 권력을 주기보단 멀리했다. 권력을 나눠주는 데 너무 인색했다.
▶김정인 민족대표 33인으로서 3·1운동을 주도한 최린은 대한제국에 대해 “악정”이라고까지 평가했다.
고종에 대한 평가는
김 “의회 개설 운동 무위로 돌리고 전제군주제 반포 반동적”
임 “식민지화에 앞장서서 협력 황실은 ‘반민족행위자’다”
박 “황실재정만 배불려 정부 재정 빈약, 큰 문제”
▶?진행자 100주년을 맞아서 의미가 새롭게 부여되는 상황에서 3·1운동을 ‘3·1혁명’으로 부르자는 정명운동이 있는데 어떻게 보시나.
▶김정인 ‘정명’이란 건 존재하지 않는다. 동학농민전쟁은 학계에서 부르는 이름이고 교과서에선 동학농민운동, 계승사업하는 분들은 동학농민혁명이라고 한다. 다양하게 부를 수 있고 학계에선 논의할 수 있는데 갑자기 정부가 나서서 정명이란 단어를 말하는 순간 국정교과서가 떠올랐다. 왜 국가 주도로 그런 논의를 하는지 모르겠다. 개인적으론 3·1운동이라 부르지만 그 성격은 민주주의 혁명이라고 평가한다.
▶임경석 개념적 정의에 비추면 3·1운동이 반드시 (혁명의) 요건을 충족하는 건 아니다. 그러나 저는 수백만명이 사적인 손해에도 불구하고 공동체의 자유와 해방을 위해 집단적으로 희생을 행한 건 혁명적 현상이라고 본다. 1921년 세계질서 재편이 종료될 때까지 한국의 국제적 지위가 변모될 가능성을 둘러싸고 수백만명의 군중이 공공선을 위해 자기를 헌신한 사회적 현상은 비록 정치권력의 교체를 얻어내지 못했어도 혁명이라고 부를 수 있다고 생각한다.
▶박찬승 ‘과거 독립운동한 사람들이 혁명이라고 했으니 우리도 혁명이라고 불러줘야 한다’는 의견이 나오는데 이건 이상한 논리다. 과거 동학란이라고 썼으면 우리가 동학란이라고 써야 하는가. 과거의 명명이 참고사항은 되지만 사건의 성격을 규정하는 바로미터는 될 수 없다. 임시정부가 민주공화정이기에 하나의 혁명이라고 할 순 있다. 그런 임시정부는 갑자기 상하이에서 만들어진 게 아니라 국내와의 연관 속에 3·1운동을 주도한 조직이 연결돼 있는 것이다. 그래서 전 사람들이 혁명이라고 부르고 싶어하면 3월과 4월 상황 모두를 합쳐서 ‘기미혁명’이라고 부르면 어떨까 한다.
▶진행자 3.1운동 100주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우리가 어떻게 기념하고 어떻게 기억해야 한다고 보시나.
▶박찬승 역사는 역사학자가 쓰는 것이지만 결국엔 기억하는 사람들의 것이다. 보다 많은 사람이 제대로 기억하는 게 중요할 것 같다. 언론에서 여러 특집을 하고 정부가 사업에 나서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다만 관 주도의 사업이 되어선 곤란하고, 지역 주민이 참여하는 형태여야 한다. 학생들의 경우 자기 학교 선배들이 만세운동에 적극 참여했다면 학생들 스스로 행사를 기획해 참여하는 등의 방식이 필요하다.
▶임경석 국가나 공공기관이 전면에 나서면 안된다. 국가는 돈을 만들어 제공하고 기념사업 등은 시민사회가 담당해야 한다. 시장과 국가로부터 독립적인 공동체 구성원들이 3.1운동의 보편적 가치가 무엇인지 배우는 방식으로 진행됐으면 한다.
▶김정인 3.1운동 100주년위원회에 있으면서도 국가가 반일의식을 깔고 하거나 ‘우리가 먼저했고 중국의 5.4운동은 우리를 따라했다’ 이런 방식으로 선도성을 강조하는 것은 지양해야 할 것 같다. 시민사회에서 스스로 기억하고 공감해야 하는데 올해 놀란 것중 하나가 민족주의보단 민주주의 관점에서 3.1운동을 보려는 인식이 광범위하게 퍼져있는 걸 보고 ‘이건 촛불시민혁명과 관련이 있구나’하는 생각을 많이 하게 됐다. 개인적으론 촛불시민혁명이 없었다면 3.1운동 100주년을 맞는 의미가 달라지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촛불시민혁명 때문에 민주주의적으로 기억하고 기념하려는 문화가 많이 확산된 것 같다. 그런 의미가 100년 전과 지금을 이어주면서도 지금의 특색이 되지 않을까.
▶박찬승 당시의 독립선언문들을 읽어보면 배타적 민족주의는 거의 보이지 않는다. 개방적 민족주의인데, 거기서 항상 나오는 게 ‘조선의 독립은 동아시아의 평화를 위한 것이고 인류의 평화를 위한 것이다’라는 논리다. 민족과 독립보다 앞에 나오는 게 정의와 인도주의다. 당시 사람들의 이상과 뜻은 대단히 높았다. 그걸 우리가 잘 계승하지 못하고 반일 민족주의식으로 행사를 열거나 학생들을 교육한다면 3.1운동의 취지와 거리가 멀다.
▶김정인 3.1운동이 갖는 선도성보다는 세계성이 강조됐으면 한다. ‘같이, 함께’ 여러 나라들이 독립운동을 했고 그걸 강조하는 보편적 시각으로 봐야 한다. 100주년 맞아 마음이 무거운 건 한일관계가 너무 안 좋다는 점이다. 우리의 100주년을 축하해줄 수도 있을 텐데 전혀 한일관계가 그럴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100주년을 맞아 잘 풀어갔으면 한다.
진행 오승훈 기자, 정리 엄지원 기자 umkija@hani.co.kr
3·1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아 21일 서울 마포구 공덕동 한겨레신문사 5층 스튜디오에서 일제강점기 역사를 오랫동안 연구해온 대표적인 역사학자 3명을 초대해 3·1운동의 의미를 묻는 좌담을 진행했다. 왼쪽부터 임경석 성균관대 사학과 교수, 박찬승 한양대 사학과 교수, 김정인 춘천교대 사회과교육과 교수.
△참석자(가나다순 )
김정인 춘천교대 사회과교육과 교수
박찬승 한양대 사학과 교수
임경석 성균관대 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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