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 주> 올해는 3·1운동과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입니다. 역사적인 해를 맞아 <한겨레>는 독자 여러분을 100년 전인 기미년(1919)의 오늘로 초대하려 합니다. 살아 숨 쉬는 독립운동가, 우리를 닮은 장삼이사들을 함께 만나고 오늘의 역사를 닮은 어제의 역사를 함께 써나가려 합니다. <한겨레>와 함께 기미년 1919년으로 시간여행을 떠날 준비, 되셨습니까?
각지 독립운동 대표자들이 로서아(러시아) 원동 연해주로 모여든 것은 이유가 있다. 이 지역은 국외에서 우리 민족이 가장 많이 거주하는 곳이자, 일찍이 일본과 맞선 조선의 의병과 지사들이 망명한 뒤 후사를 도모해온 곳이다. 1914년 세계대전이 시작되고 로서아와 일본이 동맹함에, 한동안 조선 민족의 독립운동이 활개를 칠 수 없었다. 그러나 작년에 세계대전이 종전하였고 그 전에는 1917년 2월 로서아의 혁명으로 차르 황제의 제정 로서아가 붕괴되면서 형편이 바뀌었다.
두만강 넘어 로서아로 한인이 처음 이주한 시기는 1863년이라고 한다. 양강도 혜산시 경흥의 13가구가 연해주 얀치헤(추카노보) 지신허에 정착했는데, 이들을 따라서 함경도와 평안도의 빈궁한 농민들이 농사지을 땅을 찾아 이주를 시작하였다. 기미년(1919)에 와서는 해삼위(블라디보스토크), 연추(크라스키노), 묵허우(포시예트), 수청(파르티잔스크), 추풍(수이푼), 허발포(하바롭스크), 니항(니콜라옙스크), 소왕령(우수리스크) 등 여러 도시와 농촌에서 한인들이 상부상조하고 있다.
연해주 독립운동은 일본이 대한제국을 겁박해 1905년 을사늑약을 체결한 뒤부터 활개하였다. 국내와 간도에서 활약하던 의병 지도자들이 연해주에 당도해 국내 진공작전을 결행한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간도 관리사 이범윤(63)씨가 함경도 일대의 포수를 모아 조직한 충의대를 이끌고 중국 훈춘을 거쳐 1906년 연추에 당도하였다. 어려서 연해주로 이주해 로서아 군대에 무기와 소고기를 팔아 흥한 재력가 최재형(59)씨가 이씨의 의병 조직을 지원하였는데 한때 그 규모가 3천∼4천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국내에서 이름을 떨친 의병장 유인석(77)씨도 연해주로 왔고, 함경남도에서 활약한 의병장 홍범도(51)씨는 간도를 거쳐 1908년 연해주로 건너왔다. 이들은 연해주의 의병들을 통합해 1910년 6월21일 유인석씨를 도총재로 하는 ‘십삼도의군’을 결성하였다.
1910년 8월23일 연해주의 한인들이 해삼위 한민학교에서 대회를 열어 ‘대한의 국민 된 사람은 대한의 광복을 죽기로 맹세하고 성취한다’고 외치고 성명회를 조직한 것은 진정으로 역사적인 일이었다. 외국 신문을 통하여 일본이 곧 한국을 병합할 것을 알게 된 한인 지도자들이 분개해 ‘적의 죄상을 성토하고, 우리의 억울함을 밝힌다’는 뜻의 조직을 만들고 세계 만국에 ‘병합 무효’ 선언서를 발한 것이다. 선언서에는 각지 한인 사회 지도자 8624명이 서명해, 불란서(프랑스)어로 적힌 것은 서명자 명단만 112장에 이른다고 한다. 그러나 일본의 항의를 받은 로서아 정부는 강제로 성명회를 해산시키고 이범윤씨 등 7명을 체포해 멀리 떨어진 이르쿠츠크에 유배하였다.
권업회와 대한광복군 정부도 망각해서는 안 될 터이다. 일본의 눈치를 본 로서아 정부가 건건이 탄압하자, 연해주 한인들은 1911년 12월 ‘권업회’라는 경제 조합인 것 같은 조직을 구성하였다. 최재형씨가 회장을 하고 홍범도씨가 부회장을 했는데, 명칭과 달리 기실 조선의 독립을 목표로 한 자치 조직이었다. 나날이 세가 불어 1914년에는 회원이 6405명에 이르렀고, 기관지 <권업신문>과 해삼위 신한촌의 한민학교 등을 만들었으며 1914년 비밀리에 망명정부로서의 대한광복군정부를 만들었지만 탄압당해 해체되었다.
△참고문헌
박찬승, <한국독립운동사>(역사비평·2014)
윤병석, ‘연해주 한인사회와 한국독립운동’(국외한인사회와 민족운동·1990)
최하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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