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성시민들이 덕수궁 부근에서 독립만세를 외치며 시가행진을 벌이는 모습. 한겨레 자료 사진.
<편집자 주> 올해는 3·1운동과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입니다. 역사적인 해를 맞아 <한겨레>는 독자 여러분을 100년 전인 기미년(1919)의 오늘로 초대하려 합니다. 살아 숨 쉬는 독립운동가, 우리를 닮은 장삼이사들을 함께 만나고 오늘의 역사를 닮은 어제의 역사를 함께 써나가려 합니다. <한겨레>와 함께 기미년 1919년으로 시간여행을 떠날 준비, 되셨습니까?
【1919년 3월3일 경성/엄지원 기자】
“선언서는 아직이요?” 유여대(41) 목사가 염려하는 표정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1일 오후 2시께 평북 의주 양실학교 운동장, 이제 막 독립선언식을 거행하려던 참이었다. 운동장에는 의주 일대 50여개 교회로부터 소식을 듣고 운집한 칠팔백여명의 군중이 독립선언을 기다리고 있었다. 경성의 민족대표들이 보낸 선언서는 2월28일까지 도착하는 것으로 예정돼 있었다. 선언서가 제때 도착하지 못할 것에 대비하여 동경 유학생들의 선언서(2·8독립선언서)를 등사해 두었으나, 가능하면 민족대표들의 선언서를 발표하는 것이 바람직할 터였다. 경성 태화관의 민족대표들이 선언서를 낭독하는 시각에 맞추어 의주에서도 선언식을 열고자 하였으나 무리한 계획이었는지도 모른다.
일각일각 시간은 흘러가고, 일본 관헌이 몰려오기 전에 식을 거행하는 것이 마땅하였다. 아쉬움을 품고 유 목사가 군중 가운데서 동경 유학생 선언서를 낭독하기 시작했다. 그때였다. “잠시만 기다리시오! 나는 선천에서 왔소. 경성에서 선언서를 가져왔소!” 군중 속에서 누군가가 소리쳤다. 그는 200여부의 선언서를 유 목사에게 건넸다. 급박한 순간, 그가 누구인지조차 확인할 수 없었다. 하늘이 도운 것인가. 선언서를 받아든 유 목사는 우렁차게 독립선언서를 읽어내려갔다. 이어 운동장에 모인 일동은 뜨거운 목소리로 독립창가를 합창하였다. “만국평화회의에서 민족자결주의는 하늘의 명령이다. 자유와 평등은 현재의 주의인데 누가 우리 권리를 방해할쏘냐.”
지난 1일 경성에서 독립선언식과 함께 수만 군중의 만세소리가 진천동지하였음은 조선 사람이라면 모를 수가 없을 터. 3일 고종황제의 인산 절차가 거행되었으므로 국장의 예를 다하기 위하여 경성은 잠시 소강상태에 들어갔다. 이날 각 지방에서 모여든 경성 시내 군중은 수십만명에 달했으나 만세를 부르지는 않았다. 허나 1일 경성 이북 지방 평양, 진남포, 안주, 의주, 선천, 원산 등지에서도 만세운동이 벌어졌고 이웃 동네로 시위가 퍼지고 있다. 모두 철도역이 있어 경성에서 선언서를 재빨리 배부받을 수 있는데다 천도교·예수교(기독교)가 득세한 지역들이다. 비록 33인의 민족대표들은 관헌에 붙잡혀 갔지만, 그들이 작성한 전국적 선언서 배부 계획은 성공한 것이다. 선언서는 산간벽지까지 무사히 도착하였다. 첩첩산중이라 ‘울고 가는 곡산’이라 불린 황해도 곡산에도 3일 선언서가 배부되었다고 한다.
만세운동을 벌이다 피검된 시위군중을 석방하라는 뜻에서 경성 상인들은 철시에 나섰다. 한겨레 자료사진.
유여대·이승훈(55)·양전백(55)·정춘수(44) 목사 등 예수교 민족대표들의 본진인 북부지방의 운동 열기는 경성보다 한층 가열찬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평북 선천에서는 신성학교 학생 150여명과 보성여학교 학생 60여명이 만세시위에 나섰는데, 이승훈 목사의 지시를 받은 신성학교 교사 홍성익(36)씨는 1일 정오 손가락을 단지하여 종이에 ‘조선독립’이라고 혈서를 써 학생들을 독려하였다. 시민들에게 나눠줄 태극기와 선언서를 손에 든 학생들은 질주하듯 행진하여 경찰서와 군청 등이 몰려 있는 시내 중심가에서 만세를 외쳤다.
경성에서 그러하였듯 시위에서 난폭적 행동을 벌인 이는 없었다. 민족대표들이 선언서에서 이미 비폭력적인 방침을 선언하였거니와, 시위 중심부가 <조선독립신문>을 발행하여 재차 시위 군중들에게 “최후의 일인이 잔여하더라도 결단코 난폭적 행동이라든지 파괴적 행동을 삼갈 것”을 당부하였음이다. 그러나 1일 선천 시가지에서 일본군은 해산 명령에 저항하는 학생과 시민들을 향해 즉시 발포를 시작하였다. 깃발을 들었던 이가 총탄에 맞아 그 자리에서 절명하였고 50~60여명의 군중이 체포되었다. 군중 해산 직후에는 신성학교 기숙사와 교회 등을 수색하여 추가 인원을 검거하였다. 진남포에서도 2일 ‘조선독립’ 깃발을 들고 평화롭게 행진하던 군중에게 발포하여서 한 부부가 한날한시에 사망하는 등 무고한 생명이 희생되었다.
경성 시위 주모자들이 체포되면서 조선반도는 사실상 계엄상태에 들어갔지만 시위는 그칠 줄을 모르는 상태다. 일본 경찰은 시위 군중을 해산시킬 수 있는 모든 방법을 강구하였다. 함남 원산에서는 경찰서 앞에서 독립만세를 부르는 시위대를 해산시키기 위하여 공포를 쏘거나 소방 호스로 펌프 물을 뿌려대었다. 시위 가담자들을 놓치지 않도록 물감 물을 뿌려 옷에 묻은 물감으로 추후 관련자를 색출하기까지 하였다. 당황한 군중은 잠시 흩어졌다가도 이내 다시 모여 만세를 불렀다고 한다.
일본 헌병대의 무자비한 진압이 시위 군중의 분심을 자극하고 있으나 이에 맞선 조선 민중이 가질 수 있는 무기는 없다. 3일 황해도 수안에서는 시위 군중 400~500여명이 일본 헌병분견소를 찾아가 “이제 조선은 독립이 되었으니 일본인들은 빨리 물러가라”고 요구하였는데, 헌병대는 처음에는 당황하였다가 시위대가 재차 삼차 몰려들자 무차별 사격을 퍼부은 것으로 전해졌다. 13명이 즉사하고 18명이 다치고 83명이 체포되었다. 이날 상황을 한 서양인 선교사는 이렇게 전하였다. “한 노인이 (헌병대의) 한국인에 대한 (발포) 행위에 대해서 항의를 하러 갔다. 이 노인을 헌병은 쏘아 죽였다 그의 아내가 찾아와 시체를 발견하고 그 옆에 앉아 통곡했다. 그녀는 조용히 하라는 말을 들었으나 그대로 울고 있었으므로 헌병들은 또 그녀를 죽였다. 이 부부의 딸이 분견소로 갔는데, 이번에는 난도질을 해 죽였다.” (1919년 3·1운동 기간 동안 비폭력의 원칙은 철저히 지켜졌다. 조선인이 손에 든 것은 고작 조그만 돌멩이나 나뭇가지를 꺾어 만든 회초리 정도였다. 만세운동에 나선 조선인이 총포를 동원했다는 기록은 확인된 적이 없다.)
조선반도는 사실상 계엄상태에 들어갔지만 시위는 그칠 줄을 몰랐다. 덕수궁 앞 시위행렬. 한겨레 자료사진.
조선 각지에서 독립만세를 고창하는 목소리가 천둥과 같이 울려 퍼지고, 이를 진압하는 일제의 총구가 불을 뿜어내는 와중에도 전국적인 배포망을 가진 유일한 신문 <매일신보>는 눈감고 귀닫은 듯 국장과 관련한 가십들만 쏟아내고 있다. 허나 선언서가 방방곡곡 전달되고 있는데다 어용신문을 대신하여 전국 각 학교 학생들이 격문과 지하신문을 만들어 배포하고 있으므로 만세운동의 기세는 한층 등등해질 것으로 예측된다. 국장 구경을 위하여 경성에 올라왔던 이들도 인산 뒤 고향으로 돌아가 만세운동을 일으키려 벼르고 있는 터이다.
△참고문헌
김정인, ‘1919년 3월1일 만세시위, 연대의 힘’(역사교육·2018)
독립유공자사업기금운용위원회, <독립운동사 제2권: 삼일운동사(상)>(197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