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l 3·1세대의 탄생
3·1운동 경험 뒤 달라진 조선 민중
국내외 막론 독립운동 뛰어들어 이것만이 아니었다. 만주와 연해주에는 만세시위에 참여했다가 피신하거나 독립운동에 뜻을 품고 국경을 넘은 조선인들로 북적였다. 이들 가운데 일부는 북간도나 서간도에서 군사훈련을 받고 독립군에 편성되어 무장투쟁에 나섰다. 서간도의 대표적 무관학교였던 신흥무관학교는 1920년 8월까지 2천여명의 졸업생을 배출했는데, 3·1운동 이전에 배출한 졸업생이 500~800명 안팎으로 추정되므로, 3·1운동 발생 뒤 1년5개월 사이에 1천명이 훌쩍 넘는 조선인이 그곳에서 군사훈련을 받았음을 알 수 있다. 만주 각지에서 군사훈련을 받고 독립군의 주력으로 거듭난 이들은 1919년 가을 무렵부터 국내로 잠입해 면사무소와 경찰관주재소를 타격하고, 관공리와 경찰, 친일부호 등을 처단하는 무장투쟁을 벌였다. 독립군의 국내 잠입 작전은 1920년에만 1651회에 달하고, 여기에 참여한 독립군은 4673명에 이른다는 일제 관헌 기록이 있을 정도다. 암살과 파괴를 표방한 의열단과 같은 의열단체도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등장했다. 의열투쟁에 나선 단체들도 3·1운동을 몸소 체험한 ‘3·1세대’들이 만들어낸 단체들이었다. 의열단의 김원봉은 박태원이 정리한 <약산과 의열단>을 통해 3·1운동의 평화적이고 외교적인 방법에 답답함을 느끼고 의열투쟁에 나섰다고 회고했다. <아리랑>의 주인공 김산(본명 장지락)도 3·1운동을 경험한 뒤 16세라는 어린 나이로 1920년 초 신흥무관학교에 들어갔다가 의열단원이 되었다. 의열단체는 국내에서도 여럿 등장하였는데, 천마산대와 대조선독립보합단 등이 대표적인 단체들이었다. 독립자금을 모아 전달하고 상해 임정과 국내를 연결하는 것을 목적으로 했던 비밀결사들도 속속 등장했다. 김마리아가 중심이 되었던 대한애국부인회도 이러한 비밀결사들 중 하나였는데, 이들 역시 3·1운동을 몸소 체험한 ‘3·1세대’가 주축이 됐다. 3·1운동 이후 사회주의혁명을 통해 제국주의 국가를 타도하고 독립을 성취하려는 공산주의자들이 본격적으로 등장하기도 했다. 흥미로운 것은 조선 공산주의운동의 주요 계파 지도자 대부분도 3·1운동을 몸소 체험한 ‘3·1세대’였다는 점이다. 상해 임시정부·신흥무관학교부터
의열단·대한애국부인회 결성하고
박헌영 ‘화요파’·김사국 ‘서울파’ 등
조선 공산주의운동에도 본격 등장 화요파 공산주의자의 지도자로 1925년 조직된 조선공산당에서 주축이 되었던 박헌영은 1919년 경성고등보통학교 재학 중 3·1운동을 체험하고 이듬해 상해로 건너갔다. 그는 상해에서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에 참여하여 조선의 주요한 공산주의자로 성장했다. 동창생이었던 심훈(본명 심대섭)도 3·1운동 이후 상해로 건너가 일정 부분 그와 활동을 같이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후일 그가 쓴 소설 <동방의 애인>은 박헌영을 모델로 상해에서 자신이 한 경험을 집필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심훈은 혁명운동을 접고 귀국해 시인이자 소설가, 극작가 등으로 활동했지만, 3·1운동을 통해 지니게 된 독립에 대한 뜨거운 마음을 평생 잊지 않고 문학작품으로 표현했다. 박헌영과 함께 화요파의 지도자로 활동했던 김단야(본명 김태연)는 3·1운동 당시 행적이 구체적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배재고등보통학교 학생이었는데 <반도의 목탁>이라는 지하신문 발행에 참여했다가 고향인 경북 김천에서 만세시위를 주도했다. 그는 현장에서 체포되어 태형 90도를 언도받았다. 출옥 후 그는 적성단이라는 비밀결사에서 활동했고, 1919년 12월 상해로 망명해 공산주의자가 되었다. 화요파와 쌍벽을 이루었던 서울파 공산주의자들도 3·1운동 당시 화려한 운동 경력을 갖고 있다. 서울파 최고의 지도자였던 김사국은 당시 한성정부에 참여했으며 국민대회 학생 실행팀을 지도했다. 이 과정에서 김사국은 일본 유학생 출신이던 김유인, 보성고등보통학교 학생이던 장채극과 인연을 맺게 되었고 이들은 평생의 동지로 조선 독립과 혁명을 위해 살았다. 일제 통치에 동화 대신 항거의 길
포기할 줄 몰랐던 ‘평범한 사람들’
민주주의 바로 세운 역사 중심에 3·1운동 이후 일제 당국은 언론·출판·집회·결사의 자유를 일부 허용할 수밖에 없었다. 또다시 조선인들을 거리에서 맞이하는 것보다 제도 안에서 감시와 검열을 통해 통제하는 것이 낫다고 판단해서다. 언론·출판·집회·결사의 일부 허용은 3·1운동이 가져온 가장 눈에 띄는 성과가 되었다. 조선인들은 이를 최대한 활용하여 민족운동을 확대해나갔고, 이는 조선 사회에 커다란 활력이 되었다. 1920년대 수많은 청년·종교·노동·여성단체가 쏟아진 것도 그 덕분이다. 이들 단체에서 활약한 인물들 역시 ‘3·1세대’가 주축을 이뤘다. 3·1운동의 경험은 조선의 민중도 변화시켰다. 조선에 거주하는 일본인들은 더는 고분고분하지 않은 조선인들을 대하며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다수인 보통 사람들의 결집은 일본인들이 공포를 느끼게 하는 데 충분했다. 조선인들은 일본인들의 부당한 차별과 대우를 다수의 힘으로 고치려고 했다. 1920년 8월 경성에서 벌어진 대중시위가 대표적인 예다. 콜레라 보균 의심자로 잡혀가던 한 남자가 순사 2명에게 잡혀가던 중 억울함을 호소하자 순식간에 군중이 모여 순사들을 쫓아내고 만세를 부르며 그를 풀어줬다.
조한성 민족문제연구소 선임연구원, <만세열전> 저자
<참고문헌>
서중석, <신흥무관학교와 망명자들>(역사비평사·2001)
기유정, ‘식민지 군중의 길거리 정치와 식민자의 공포(1920~1929)’(<도시연구> 19·2018)
김영범, ‘3·1운동과 혁명적 민중폭력의 사상’(<3·1운동 100년> 5·휴머니스트·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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