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5년 8월, 시어도어 루스벨트 미 대통령을 만나려 예복을 갖춘 이승만. <한겨레> 자료사진
<편집자 주> 올해는 3·1운동과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입니다. 역사적인 해를 맞아 <한겨레>는 독자 여러분을 100년 전인 기미년(1919)의 오늘로 초대하려 합니다. 살아 숨쉬는 독립운동가, 우리를 닮은 장삼이사들을 함께 만나고 오늘의 역사를 닮은 어제의 역사를 함께 써나가려 합니다. <한겨레>와 함께 기미년 1919년으로 시간여행을 떠날 준비, 되셨습니까?
【1919년 3월5일 경성/오승훈 기자】
이승만 박사가 미국 대통령 윌슨에게 위임통치라는 일종의 식민통치를 청원한 것은, 타협적 현실주의 운동을 견지해온 그에겐 자연스러운 귀결이라 할 만하다. 그는 외교 중심의 독립노선을 일관되게 유지하였다. 러일전쟁 이후 집필한 <독립정신>에서 “외교가 나라를 유지하는 법이며, 외교를 친밀히 하는 것이 강대국 사이에서 국권을 보존하는 방법”이라고 주장하였다.
그가 유학을 목적으로 미국에 건너간 것은 경술년(1910) 6월이었는데 공교롭게 이때는 일본의 한국 병합이 임박한 시점이었다. 국권을 잃자 동년 9월에 귀국한 그는 중앙기독교청년회 교육부 간사를 맡으면서 전도 및 교육사업에 뛰어들었다. 하지만 이것도 잠시, 소위 ‘105인 사건’으로 불리는 기독교계 인사들에 대한 대대적인 검거 선풍을 피해 다시 도미한다.
17개월 만에 미국으로 다시 돌아간 이승만은 공공연히 일본의 조선 통치를 찬양하는 듯한 발언을 서슴지 않았다. 그를 잘 아는 재미 독립운동가들은 “당시 이승만이 앞날에 대한 자신감을 상실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또다시 귀국해야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은연중 갖고 있었다”고 전한다.
계축년(1913) 초 하와이에 정착한 이승만은 ‘105인 사건’을 다룬 <한국교회 핍박>이라는 선전책자에서 무력항쟁이나 의열투쟁의 부질없음을 공박하고 나섰다. “한국인들은 불평한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혈기지용을 억누르고 형편과 사정을 살펴 기회를 기다리면서 내로는 교육과 교화에 힘쓰고 외로는 서양인에게 우리의 뜻을 널리 알려 동정을 얻게 되면 순풍을 얻어 돛 단 것같이 우리의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다.” 한마디로 인내하며 때를 기다리자는 얘기였다.
명문 양반가 출신들로 이뤄진 기호파의 대표주자였던 이승만은 미국에서 근대적 교육을 받았고 기독교인으로 미국 생활도 오래 했지만, 권위의식이 매우 강한 인물이었다. 미국에서 왕족으로 행세하기도 했고 영친왕 이은에 대해 묘한 라이벌의식을 가졌다는 이야기도 들린다. 봉건적 특권의식이 남달랐던 그는 양녕대군의 후예를 자처했다. 민국의 시대, 이승만이 부상할수록 민족진영의 근심이 늘고 있는 한 이유다.
△참고문헌
서중석, <이승만의 정치이데올로기>(역사비평사·2005)
고정휴, ‘이승만은 독립운동을 했는가’(역사비평·1991)
김수자, ‘이승만은 왜 두번이나 대통령자리에서 쫓겨났나’(내일을여는역사·20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