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정 루트를 가다] ②
‘정의 필승 당대 영웅 윤봉길’
폭탄 의거에 감복한 중국인들
임정요인 피난살이 결정적 도움
충칭 청사 국민당 정부 돈으로
선의와 연대는 지금까지 이어져
류저우·창사 등 임정 기념관은
한국 정부나 민간 지원 아닌
뜻있는 중국인들 노력으로 건립
중국 상하이시 루쉰공원(옛 훙커우공원) 안에 있는 매헌 윤봉길 기념관. 조소영 피디 azuri@hani.co.kr
1932년 4월29일 금요일 새벽.
그는 김구와 이른 아침을 먹었다. 전날 김구는 동포 김해산에게 고기를 사서 조밥을 지어달라고 부탁했다. 그와 나누는 마지막 한끼였다. 그는 밥을 달게 먹었다. 일터에 나가는 농부 같았다. 아들뻘인 그의 태연함에 김구는 자꾸 목이 메었다. 전날 사진을 찍을 때, 엷은 미소를 지은 그와 달리 김구는 웃지 않았다.
시계가 일곱시를 가리켰다. 그가 자신의 회중시계를 꺼내어 김구에게 내밀었다. “어제 산 6원짜리 시계인데 선생님 시계는 2원짜리니 제 것하고 바꿉시다. 제 시계는 앞으로 한 시간밖에는 쓸 데가 없으니까요.”(<백범일지>) 김구는 시계를 건네받고 한참을 들여다보았다. 그러고는 도시락과 물병으로 위장된 폭탄 두 개를 건넸다. 하나는 적을, 하나는 그를 위한 폭탄이었다.
훙커우공원으로 가는 차편에 오른 그는 호주머니에 있던 돈을 김구에게 건넸다. 김구가 마다할 즈음 자동차가 움직였다. 잠긴 목소리로 김구가 외쳤다. “후일 지하에서 만납시다.” 차창으로 고개를 내밀고 김구를 바라보던 그가 고개를 숙였다. 그의 이름은 윤봉길이었다. 두 사람이 헤어진 곳은 ‘원창리’ 13호라고 전해진다. 87년이 지나도록 그곳에는 표지석 하나 없다.
지난달 18일 오후 루쉰공원(옛 훙커우공원)에는 부슬비가 내렸다. 윤봉길을 존경한다는 한 중국인 촌로는 헝겊을 잘라 만든 물병붓으로 바닥에 ‘정의 필승 당대 영웅 윤봉길 의사’라고 썼다. 입장료 15위안(한화 약 2400원)을 내고 공원 한편에 있는 ‘매원’(梅圓)에 들어갔다. 윤봉길의 호(매헌)를 딴 기념관이 자리한 곳이었다. 곳곳의 매화꽃이 방문객을 맞았다. 중국인들도 고개를 숙여 예를 표한다는 그의 흉상이 기념관 안에 놓여 있었다.
윤봉길 의사가 폭탄 의거를 벌인 루쉰공원 광장. 바로 오른편엔 루쉰의 묘역이 조성돼 있다. 조소영 피디 azuri@hani.co.kr
죽을 자리를 찾아서 김구에게 온 그였지만 처연한 마음은 감출 수가 없었다. 거사 이틀 전 사전조사를 위해 공원을 둘러본 매헌은 다음과 같은 시를 남겼다. “무성한 봄풀들이여/ 내년에도 봄기운 돌아오거든/ 왕손(임)과 더불어 같이 오게나// 푸르른 봄풀들이여/ 내년에도 봄기운 돌아오거든/ 고려 강산에도 다녀가오// 다정한 봄풀들이여/ 금년 4월29일에/ 방포일성(의거)으로 맹세하세.” 이 시에 대해 그는 “상해 신공원의 식장을 미리 조사하러 갔을 때 내가 밟은 잔디가 그대로 일어서지 못하는 것도 있고, 또다시 일어서는 것도 있었다. 그것을 보고 나는 인간도 또한 강한 자로부터 유린되었을 때 이 잔디와 하등 다름이 없다고 생각하고 대단히 슬픈 감정이 샘솟아났다. 그 감정을 유서로 썼다”고 ‘자술서’에 적었다.
일본은 윤봉길을 훙커우공원에서 공개처형하려던 계획을 접고 그를 본국으로 압송해 그해 12월 총살했다. 그의 나이 24살이었다. 서리와 눈을 두려워하지 않고 언 땅 위에 고운 꽃을 피워 맑은 향기를 뿜어내던 매화 한 송이가 그렇게 스러졌다. 매헌을 잊지 못한 김구는 1949년 <백범일지>에 서명을 담아 그의 장남인 윤종에게 주었다.
매원에는 ‘윤봉길 의거 현장’이라는 표지석이 있지만, 사실 이곳이 사건 현장은 아니었다. 당시 2만여명이 운집했다던 현장은 매원을 나와 100여 미터를 더 들어가야 나온다. 펜스로 출입이 제한된 그 광장 앞에 중국의 대문호 루쉰의 묘가 있다. ‘많은 사람이 걸으면 그것이 곧 길이 된다’며 ‘희망의 원리’를 말한 반제국주의자 루쉰과 일본 제국주의자들에게 폭탄을 던져 그 스스로 길이 된 매헌의 흔적이 한곳에 있다는 사실은 의미심장했다.
거사일 전날 김구와 윤봉길이 찍은 사진. 엷은 미소의 윤봉길과 달리 김구는 웃지 않았다. <한겨레> 자료사진
윤봉길의 폭탄 의거는 일본에 충격과 공포였다. 자신의 조계지 훙커우에서 ‘상하이 사변’ 승리를 자축하려던 일제는 식민지 청년의 기개에 경악했다. 중국과 조선인들은 환호했다. 명맥만 유지하던 임시정부에 중국 국민당 정부의 지원이 이뤄진 것도 윤봉길 때문이었다. 이 사건은 백범을 임정 내에서 가장 유명한 인물로 만들었다. 물론 그만큼 거센 탄압과 검거 열풍이 몰아쳤다. 임시정부가 상하이를 떠나 피난살이에 나서게 된 계기였다. 이제 우리는 임정을 따라 항저우로 가야 한다.
항저우시 ‘호변촌’에 위치한 임시정부 청사는 1932년 5월부터 1935년 11월까지 3년 반 동안 사용됐다. 1920년대 지어진 2층 건물로 1층에는 손님방과 주방이 있고 2층에는 당시 임정 요인들이 서재로도 쓴 크고 작은 침실들이 있다. 바로 옆에는 같은 구조의 2층짜리 전시실이 이웃해 있다. 2012년 독립기념관의 전시 지원으로 새롭게 단장했다.
일본 관헌을 피해 오른 임정의 ‘대장정’에는 그들과 뜻을 같이한 중국인들의 도움이 절대적이었다. 전시실에는 이들의 헌신이 소개돼 있다. 신해혁명의 원로로 당시 저장성 국민당 정부 주석이었던 추푸청(저보성·1873~1948)은 위험을 무릅쓰고 김구와 임정 요인, 그리고 그 가족들을 상하이로부터 자신의 고향인 자싱(가흥)으로 피신시킨 인물이다. 양자인 천퉁성(진동생)의 집을 김구 거처로 내주도록 배려하기도 했다. 추푸청의 아들인 추펑장(저봉장·1896~1953)과 며느리 주자루이(주가예)도 임정 요인들의 안전과 가족들의 생활을 거들었다고 한다.
중국인들의 선의와 연대는 지금까지 이어져오고 있다. 한국 정부가 보존을 요청해 겨우 철거 위기를 모면한 상하이 청사와 달리 항저우를 비롯해 류저우·창사·전장 등에 있는 임정 기념관은 모두 중국 지방정부가 세운 시설들이다. 한국 정부의 요청이 아닌 임정 역사를 보존하려는 중국인들의 건의를 바탕으로 건립됐다. 2014년 항저우 임정 청사가 중국의 ‘국가급 항전 시설 및 유적지’로 지정된 배경에는 이러한 중국인들의 노력이 깃들어 있다. 사실 임정이 줄곧 국민당 정부의 지원을 받아온 사정을 고려하면, 중국 정부와 중국인들이 자국 내 한국 항일운동을 보듬는 이런 대목은 분명 ‘대륙적 도량’이라 부를 만하다.
임정의 마지막 근거지였던 충칭 임정 청사. 일본 전투기의 폭격을 피해 네 번의 이사 끝에 마련했다.
독립운동가 집안을 대표해 이번 탐방에 동행한 조성희씨는 항저우 청사를 보고 감개무량한 표정이었다. 그의 남편은 조선혁명당 대표를 지내고 임정 군사위원회 위원을 지낸 황학수 선생의 증손자다. 그는 “이들의 고난으로 오늘 우리가 자유인으로서 살 수 있다는 걸 깨달았다”며 “이게 바로 희망의 씨앗이다. 이 씨앗을 한국에 돌아가 널리 알리고 싶다”고 했다. 이번 임정 탐방에는 역사 콘텐츠 등을 만드는 유명 ‘유튜버’ 10여명도 함께했다. 이들은 임정에 대한 소개와 소감 등을 담은 동영상을 제작해 젊은이들과 공유할 계획이다. 임정 100돌을 맞아 임정 루트 답사의 내용과 형식도 더 젊어지고 있다.
임정 수립 100주년을 맞아 정부는 다채로운 행사를 벌이며 임정의 의미를 재조명하고 있다. 그러나 역사학계의 평가가 우호적인 것만은 아니다. 최초의 민주공화제 정부를 수립했다는 점에서 임정의 역사적 의미는 작지 않지만, 독립운동사에서 시기에 따라 임정의 역할이 들쭉날쭉했던 것도 사실이기 때문이다. 임정이 독립운동 전체를 대표할 수 없다는 얘기다. 존립 그 자체가 목적이었던 ‘장정 시기’(1932~1940년)에 대해 역사학계의 평가가 인색한 것은 그래서다. 일정의 끄트머리, 임정의 마지막 근거지이자 재활약의 거점, 충칭으로 향한 이유다.
1932년 4월 상하이를 떠난 임정은 항저우-전장-창사-광저우-류저우-치장을 거쳐 1940년 9월 중국 국민당 정부의 지원으로 충칭에 당도했다. 8년5개월의 여정이었다. 충칭에서도 임시정부는 네 번의 이사를 해야 했다. 2017년 12월 문재인 대통령의 방문으로 더욱 유명해진 ‘연화지’ 청사는 1945년 1월부터 11월까지 사용된 마지막 청사다. 입구에 검문소를 설치하는 등 정부청사로서 그나마 구색을 갖춘 최초의 청사이기도 하다.
임정이 충칭에서조차 청사를 옮겨 다닌 이유는 ‘충칭대폭격’이라 불린 일본 전투기의 6년여에 걸친 폭격 때문이었다. 무차별 폭격으로 임정 각료였던 신익희의 조카와 조선의용대 소속 김영린의 아내가 목숨을 잃기도 했다. 두 사람이 숨진 날은 가장 폭격이 심했던 날로 참상이 이루 말할 수 없었다고 전한다. “한 방공호에서 400명이니 800명이니 하는 질식자를 낸 것이 이때였다. 그 시체를 운반하는 광경을 내가 목도하였는데, 화물자동차에 짐을 싣듯 시체를 싣고 달리면 시체가 흔들려 떨어지는 일이 있고, 그것을 다시 싣기가 귀찮아서 모가지를 매어 자동차 뒤에 달면 그 시체가 땅바닥으로 엎치락뒤치락 끌려가는 것이었다. 시체는 남녀는 물론하고 옷이 다 찢겨서 살이 나왔는데 이것은 서로 앞을 다투어 발악한 형적이었다.”(<백범일지>) 그때를 증거하듯 청사 뒤편에는 방공호가 남아 있었다.
충칭 임정 청사 내 임정 요인들의 집무실. 상하이 임정 청사와 달리 사진 촬영이 가능하다.
해방을 맞아 임정 요인들이 국내로 환국한 뒤 연화지 청사는 한동안 여관, 학교, 주택 등으로 사용되었다. 1994년 6월 독립기념관과 충칭시 대외인민우호협회가 충칭 대한민국임시정부 청사 복원협정을 체결해 이듬해 8월 복원을 완료했다. 뒤편 계단을 두고 왼편에는 2층 구조의 전시관이 있고 계단 위 오른편 2층 건물에는 당시 임정 요인들의 근무실과 침실 등이 자리해 있다. 주변으로는 오래된 고층아파트들이 즐비했다. 상하이 청사와 달리 사진 촬영이 자유로웠다.
비서실로 쓰인 방 텅 빈 책상 앞에 앉아 보았다. 임시정부 수립 100돌, 김구가 꿈꿨던 나라에 대한민국은 얼마나 가까이 가 있는 것일까. 그의 희망은 아득해서 여전히 요원해 보였다. 그러나 임정이 걸어온 길은, 한 시인의 표현대로 불의와 맞선 날들만이 역사라는 사실을, 자기 생애를 쉼 없이 밀고 나가는 것만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라는 단순한 진실을 가리키고 있었다. 그리하여 잠들지 못하는 꿈의 거처에서 다시 시작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었다. <끝>
상하이 항저우 충칭(중국)/글·사진 오승훈 기자 vino@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