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일 대법원의 파기 환송으로 2심 재판을 다시 받게 된 김기춘 전 대통령 비서실장(왼쪽)과 조윤선 전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연합뉴스
대법원이 박근혜 정부 때 특정 문화·예술계 인사들 지원을 배제했던 이른바 ‘블랙리스트’ 사건의 재판을 다시 하라고 판결했다. 김기춘(81) 전 대통령비서실장 등이 헌법과 법률을 위반해 ‘직권’을 남용했지만, 직권남용죄에서 말하는 ‘의무 없는 일’에 해당하는지 엄격히 살펴야 한다는 이유였다. 대법원이 직권남용죄 적용을 엄격하게 따지면서 사법농단, 유재수 감찰무마 의혹 등 직권남용 혐의가 적용된 다른 재판에도 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대법원 전원합의체(재판장 김명수 대법원장, 주심 안철상 대법관)는 30일 직권남용·강요죄 등으로 재판에 넘겨진 김 전 실장, 조윤선 전 청와대 정무수석 등의 상고심에서 대법관 11명의 다수의견으로 직권남용 부분에 대해 원심을 파기하고 사건을 서울고등법원으로 돌려보냈다. 이날 선고는 대법원 전원합의체가 내놓은 직권남용에 대한 첫 판단으로 주목받았다.
직권남용죄(형법 123조)는 공무원이 ‘직권을 남용’해 사람으로 하여금 ‘의무 없는 일’을 하게 하거나 사람의 ‘권리행사를 방해’한 경우에 성립한다. 박근혜·이명박 전 대통령과 양승태 전 대법원장, 조국 전 법무부 장관 등 2~3년 새 기소된 고위 공직자들에게 모두 이 혐의가 적용됐는데, 직권·남용·의무·방해 등 애매한 개념이 많아 하급심에서 판단이 엇갈렸다.
이날 대법원은 직권남용의 ‘의무 없는 일’에 대해 엄격한 기준을 내놨다. 김 전 실장 등이 정치적 견해 등을 이유로 정부 지원을 배제한 것은 ‘직권남용’에 해당하지만,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직원 등이 문화체육관광부에 명단을 송부하고 사업 진행 상황을 보고한 행위 등은 ‘의무 없는 일’이 맞는지 따져봐야 한다는 것이다.
대법원은 “직권에 대응해 어떤 일을 한 것이 의무 없는 일인지 여부는 관계 법령 등의 내용에 따라 개별적으로 판단해야 한다”며 “예술위 직원 등의 명단 송부 행위 등도 종전의 행위와 어떤 차이가 있는지 법령 위반 여부를 심리했어야 한다”고 판단했다. ‘의무 없는 일’에 해당하는지는 직권남용 여부와 별개로 상대가 일을 할 법령상 의무가 있는지를 살펴 개별적으로 판단해야 한다는 취지로, ‘의무 없는 일’의 범위를 상당히 좁힌 것이다.
이날 국정농단 특검은 “이번 판결은 큰 틀에서 특검이 기소한 범죄사실이 인정됐고, 다만 실무 차원에서 이뤄진 명단 송부 행위 등이 의무 위반 행위인지 추가 심리해야 한다는 취지”라며 “파기환송심에서 공소유지에 만전을 기하겠다”고 밝혔다.
최우리 고한솔 장예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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