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6일 서울 마포구 망원동 퀴어 페미니즘 책방 ‘꼴’에서 만난 운영진 잇을(왼쪽)과 나기는 “페미니즘은 인권을 바라보는 렌즈이자 프리즘”이라고 말했다.
지난 6일 찾은 책방 ‘꼴’. 유리로 된 외벽에 흰색 래커로 엑스(×)자가 곳곳에 커다랗게 그려져 있다. 행사 포스터에는 검은색 매직으로 엑스자와 함께 ‘동성애 하면 부모님이 슬프셨겠죠?’ ‘동성애는 죄입니다!’라는 글이 쓰여 있었다. 무지개가 그려진 간판에도 흰색 래커가 뿌려졌다. 이곳은 여성주의 문화운동단체 ‘언니네트워크’ 사무실이자, 언니네크워크가 2017년 11월25일 문을 연 ‘퀴어 페미니즘 책방’이다. 서울 마포구 망원동 한 주상복합아파트 1층 입구에 슈퍼마켓과 세탁소, 방앗간 등 이웃 가게들과 함께 자리하고 있다. 책방 운영에 참여하는 활동가 ‘나기’와 ‘잇을’은 지난달 23일 이 혐오 낙서를 발견했을 때 “놀랍진 않았다”고 했다. 왜일까? 이들에게 동성애 혐오 낙서 사건과 책방이 지향하는 페미니즘 등에 대해 들어보았다.
두 사람의 말은 겹치는 경우도 있어서 굳이 응답자를 나누어 표기하지 않았다.
―놀랐을 것 같은데요.
“처음엔 ‘이게 뭐지?’ 했고, 그다음엔 잡아서 꼭 본때를 보여줘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저희가 대응하지 못할 거라고 여겨서 이런 일을 했다고 봐요. 성소수자 단체들이 사무실을 구하지 못하거나, 구하더라도 임대인한테 무슨 일을 하는 곳인지 분명하게 얘기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어요. 한국 사회에서는 성소수자 운동을 한다는 행위 자체로 사회적 차별을 받을 수 있으니까요. 저희는 이곳에 오픈된 사무실과 책방을 열고, 어떤 지향을 갖고 어떤 일을 하는 곳인지 다 보이는 형태로 운영하겠다고 결정하면서 이런 일은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놀랍지 않았어요. 오히려 굉장히 오랜만에(웃음) 일어났다고 생각해요.”
―지금까지는 이런 일이 전혀 없었나요?
“주민들이 뭐 하는 데냐고 궁금해하며 들어오기도 하고, 아이들과 그림책을 사 가기도 하고 잘 지냈어요. 아, 2018년에 나온 책 <조선의 퀴어> 포스터를 외벽에 여러 장 붙여놓았는데, 누군가 다 찢은 적이 있었네요.”
―이런 일이 또 일어날까 걱정되진 않나요?
“지속적으로 일어난다면 그때마다 신고해서 차별금지법을 제정하는 근거로 쓰이게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하지만 아무리 각오하고 있더라도 지속적인 괴롭힘은 정신적인 스트레스를 유발하기 때문에, 실제로 발생한다면 어떨지 잘 모르겠어요. 언니네트워크 회원들이나 책방 손님들이 위축되거나 힘들어질 수 있으니까요. 인근 합정동에 있는 퀴어 술집이 지난해부터 지속적인 괴롭힘을 당하고 있어요. 소음 민원을 끊임없이 계속 제기하는 방식으로요. 그런 상황은 더 드러나야 한다고 생각해요.”
‘범인’은 빨리 잡혔다.
책방이 폐회로텔레비전(시시티브이)이 있는 건물 현관에 자리한 덕분에 범행 장면이 다 찍혔다. 그는 지난 4일
재물손괴 혐의로 경찰 조사를 받은 뒤 자필 쪽지와 음료 등을 책방 앞에 두고 갔다. 다음날에도 찾아와 ‘합의’를 요구했다. ‘두 아이의 엄마’라는 그가 A4용지 7장짜리 편지에서 스스로 밝힌 범행 이유는 “동성애가 에이즈를 양성한다고 해서 미성년자 보호 차원에서 그렇게 했다”는 것이다. 편지에는 “동성연애자”에 대한 편견과 혐오, 그리고 “회개하라”는 요구가 가득했다. 그는 “재물손괴에 대해 화나셨다면 죄송하다”는 말로 혐오에 대한 무지를 덮고 있었다.
책방 꼴은 “절대 합의하지 않겠다”는 입장이다.
지난달 23일 한 여성이 퀴어 페미니즘 책방 꼴에 흰색 래커로 엑스자를 그리고, 외벽에 붙은 포스터에 동성애 혐오 낙서를 했다. 책방을 위로하고 응원하는 글이 적힌 포스트잇이 붙어 있는 모습.
퀴어 페미니즘은 장애 여성, 성소수자 여성, 이주 여성, 청소년 여성, 빈곤 여성 등 여성의 경험은 차이로 인해 다양하게 존재한다고 본다. “여성이기만 한 사람은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여성’이라는 범주를 넘어 다양한 정체성을 가진 사람들을 페미니즘의 주체로 인식하고, 모든 걸 ‘여성’이라는 범주로 단일화하는 것에 함께 저항해야 한다고 본다. 언니네트워크는 2016년 이곳으로 이사하면서 퀴어 페미니스트 잡지 <펢>을 창간했고, 이듬해 11월25일 책방 꼴을 열었다.
―왜 책방을 냈나요?
“원래 사무실은 언니네트워크 활동가를 위한 공간이었어요. 그런데
2000년대 중반부터 학생운동 사회가 붕괴하고 총여학생회 활동이나 페미니즘이 침체하면서 활동가가 단체로 유입되지 않았어요. 그래서 표면적을 넓혀서 회원뿐 아니라 외부인들도 언니네트워크가 이야기하는 페미니즘을 눈으로 볼 수 있는 공간을 만들자고 생각했죠. 한편으로는 꼭 우리 입으로만 얘기할 게 아니라, 다른 이들이 글로 남긴 페미니즘 작업을 보여주고 싶었어요. 그게 서점이었고요.”
―책방 이름이 특이한데요.
“뭔가 ‘센 이름’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페미니즘은 다양한 목소리를 담고 있는 것이라는 걸 보여줄 수 있는 이름을 원했고요. 당시 페미니즘이 ‘리부트’ 되면서 ‘백래시’도 심해지던 시기였어요. 페미니스트를 ‘꼴페미’라고 부르고요. 그래서 우리는 페미니즘 잡지와 책방을 운영하는 꼴페미다라고 한 거죠.(웃음) 그리고 ‘꼴’은 다양한 형태를 뜻하는 말이고요.”
―어떤 책을 들여놓나요?
“2015년 이후로 페미니즘 서적들이 점점 많이 나오기 시작했는데, 대형서점 페미니즘 섹션에는 베스트셀러 몇권만 디스플레이 돼 있고, 성소수자나 소수자 인권을 다루는 ‘불온한 서적’은 들여놓지 않거나 매대 낮은 곳에 두잖아요. 저희는 이런 책이 굉장히 많이, 다양하게 나오고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어요. 그래서 퀴어 페미니즘 이론서와 대중서, 어린이용 도서, 만화, 문학을 배치했어요. 여전히 잘 팔리지는 않지만요.(웃음) 언니네트워크가 2000년대 초반부터 해왔던 비혼 운동과 관련한 코너, 장애인과 난민 등 소수자 정체성에 대한 사회과학·인문 서적 코너 등도 따로 두었어요.”
10평이 안 되는 책방은 나기와 잇을 등 ‘꼴키퍼’라고 불리는 8명이 돌아가며 지킨다. 월~금요일 오전 11시~오후 9시, 토요일 오후 2~7시에 문을 연다. 2주에 한번 입고회의를 통해 책을 선정하는데, 처음 문을 열 때 350여종이던 책이 현재 700종까지 늘었다. 회의 때 검토하는 책도 2~3권에서 10권으로 많아졌다고 한다. 격월로 ‘꼴좋다’는 이름으로 저자와의 대화 등의 행사도 연다. 책방 한쪽 벽면에 적힌 ‘2019년 꼴 베스트셀러’ 목록에는 <펢>, 최영미 시인의 <다시 오지 않는 것들>(이미), 낙태죄를 다룬 <배틀그라운드>(백영경 외, 후마니타스), 결혼 제도에 관한 <하면 좋습니까?>(미깡, 위즈덤하우스) 등이 적혀 있다.
―운영이 쉽지는 않을 것 같아요.
“네.(웃음) 독립서점들이 일부 유명한 곳 말고는 마찬가지예요. 대부분 수익구조가 책 판매, 행사, 음료·다과 판매가 비슷한 비중인데, 저희는 음료·다과 판매를 하지 않지만 언니네트워크 사무실 겸용으로 임대료 부담이 없어 적자는 안 나고 있어요. 지금도 제일 잘 팔리는 게 <펢> 특별판이지만, 현재는 <펢>을 만들지 못하고 있어요. 기획이나 사업해야 할 게 많은데 잡지 만드는 품이 생각보다 너무 많이 들어서 잠정 중단된 상태예요.”
―특별판은 어떤 내용인가요?
“2017년 하반기에 ‘쓰까 페미’를 주제로 펴냈어요. ‘쓰까’는 ‘섞는다’는 뜻의 사투리이고, ‘쓰까 페미’는 여성인권에 다른 것을 ‘섞는 페미니즘’이라며 멸시하거나 비하하는 표현입니다. 장애 인권, 동물권, 성소수자 인권을 얘기하는 것이 여성인권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여성만의 권리와 여성으로서만의 피해를 이야기해야 한다는 주장이죠.”
지난달 23일 한 여성이 퀴어 페미니즘 책방 꼴에 흰색 래커로 엑스자를 그리고, 외벽에 붙은 포스터에 동성애 혐오 낙서를 했다. 책방을 위로하고 응원하는 글이 적힌 포스트잇이 붙어 있는 모습.
―최근 숙명여대에 합격한 트랜스젠더를 공격한 ‘
래디컬 페미니즘’도 이런 흐름인 거네요.
“네. 그분들 입장은 트랜스젠더나 성소수자, 장애인, 동물권 이야기를 하는 건 페미니즘이 아니라는 거예요. 페미니즘은 ‘여성’만을 얘기해야 한다는 거예요. 하지만 페미니즘은 ‘인권을 어떻게 바라볼 것이냐’는 렌즈와 프리즘이잖아요. 그리고 우리가 겪는 차별과 혐오는 가부장적인 성별 이분법에 의한 것인데, 어떻게 ‘여성’이라는 정체성만 딱 잘라내서 얘기할 수 있다고 하는 건지 모르겠어요. 그렇게 보편적인 인권 자체를 무시하는 혐오, 페미니즘에 대한 부정에 저항하기 위한 목소리도 많이 나오고 있고, 저희 ‘꼴좋다’ 행사에서도 그런 목소리를 담은 책을 소개하고 있어요.”
―페미니즘이 대중화하면서 오히려 혐오 양상이 심해지는 면도 있는 것 같은데, 왜 그렇다고 생각하나요?
“조직 내 성폭력이 일어나지 않게 하려면 기본적으로 조직 내 문화가 민주적이어야 하죠. 사람과 사람 사이의 위계를 어떻게 인식하고 있는지, 평등한 대화와 관계를 위한 노력을 얼마나 하고 있는지가 중요해요. 그것이 잘되면 성폭력이나 성희롱이 발생하는 상황 자체가 억제되니까요. 혐오도 그와 비슷한 현상이라고 생각해요. 기본적으로 보편적 인권에 대한 감각 자체가 많이 후퇴해 있기 때문입니다. 평등하지 않은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고, 내가 더 노력하거나 더 큰 피해를 받으면 그것 때문에 다르게 대우받을 수 있다는 생각이 광범위하게 퍼져 있어요. 게다가 페미니즘 리부트가 일어난 이후에도 그걸 제대로 받아들여 제도를 개선하거나 범죄를 해결하려는 적극적인 변화가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그에 대한 반발로서 일어난 현상이기도 해요.”
그러면서 이들은 “페미니스트들의 안일함”을 꼬집기도 했다. “초반에는 저희도 그랬지만, 그들이 왜 저렇게까지 분노하는지, 왜 다른 소수자성을 무시하면서까지 얘기하려고 하는지를 이해해주고 해석해주려는 노력이 있었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여전히 그런 분들이 많아요. 보편적 인권을 무시하는 차별과 혐오에 기반을 둔 거라고 생각하지 않은 채 ‘이해할 만한 과격함’, ‘과격한 페미니즘’ 정도로 이해해주는 거죠. 그런 주장으로 인해 누군가의 삶이 파괴되거나 삶의 기반 자체가 무너지고 있다는 걸 보려 하지 않고, 그게 자신이 해결해야 할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는 페미니스트들이 많다고 봐요. 그게 저 엑스 표시(낙서)보다 더 화가 나요.”
회개를 요구하는 혐오 낙서, 페미니즘의 이름으로 발화하는 혐오에도 이들이 “위축되지 않는다”고 당당히 말할 수 있는 건 연대와 응원 덕분인 것 같았다. 엑스 표시 낙서 주위에는 여러 사람이 글을 적고 갔다.
‘동성애 하면 부모님이 슬프셨겠죠?’ 옆에는 ‘비겁한 차별주의자가 되지 말라고 하셨어요(웃음)’, ‘아니던데요(웃음)’라는 글과 함께 ‘성소수자의 부모들은 내 자녀가 성소수자여서 걱정하는 게 아닙니다. 당신 같은 사람 때문에 화가 날 뿐입니다’라는 성소수자 부모 모임의 메시지도 적혔다. ‘동성애는 죄입니다’ 옆에는 ‘이게 죕니다’, ‘혐오가 죄입니다’라는 글과 함께 ‘이거 쓰신 분 꼭 잡히시길’ 등 처벌에 대한 요구도 쓰여 있었다. 응원 메시지도 빠지지 않았다. ‘다양해서 더 아름다운 세상이 될 거야.’
글·사진 이지은 기자 jieuny@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