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승수 전주시장이 지난 27일 자신의 집무실 들머리에 붙여둔 사진들을 가리키고 있다. 사진 속 주인공들은 시장선거 기간에 만났던 시민들이다. 전주/장철규 선임기자 chang21@hani.co.kr
코로나19는 국가의 정책과 개인의 호흡기가 얼마나 밀착돼 있는지를 역설적으로 증명했다. 4·15 총선의 드물게 높았던 투표율과 전례 없는 여당 압승이 기존 정치공학만으로 온전히 설명되지 않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나아가 이 바이러스는 ‘국가란 무엇인가’라는 질문 자체를 재구성하도록 했다. 중앙정부가 곧 국가의 전부는 아니었다. 중앙정부보다 기민하게 시민의 삶 속 깊숙이 촉수를 뻗은 지방정부(지방자치단체)들의 진가가 비로소 체감되기 시작했다.
지방정부 가운데서도 가장 강한 인상을 준 곳은 전주시다. 전국 최초로 ‘착한 임대료 운동’ ‘재난기본소득’ ‘해고 없는 도시 상생 선언’을 잇따라 내놓았다. 문재인 대통령도 두차례 깊은 공감을 표명했다. ‘비결’이 궁금했다. 전주 시정을 이끌고 있는 김승수 전주시장을 지난 27일 찾아갔다. 기자는 인터뷰를 한창 진행하다 문득 당황했다. “그런데 여기가 어디죠? 시장실인가요?” 의자가 없는 집무용 스탠드 책상에 회의 탁자 두어개 말고, 그 흔한 소파 하나 없다는 걸 그제야 알아챘다.
―코로나19 사태 초기부터 ‘착한 임대료 운동’을 내놨는데. 순발력이 대단하다.
“‘착한 임대료’는 우리가 붙인 이름은 아니다. 그리고 순발력의 문제도 아니다. 3~4년 전부터 임대료를 올리지 않는 가게에 리모델링 비용을 지원하는 ‘함께 가게 운동’, 중개인 60여명과 수수료 인하 협약을 맺은 ‘사회적 부동산 운동’ 등을 꾸준히 해왔다. 코로나19 사태로 임차인뿐 아니라 임대인도 함께 힘들어진 걸 보고 ‘임대료 인하 운동’으로 나아간 것이다. 간부회의와 동장회의를 여러 차례 했고, 실제 35명 동장 모두가 건물주들을 찾아다니며 설득했다. 어떤 동장은 30분 동안 부동자세로 건물주한테 욕만 먹었다고 한다. 그런 노력이 쌓이고 쌓여 임대료 인하로 이어졌다고 본다.”
―공무원들이 수모까지 겪으면서 하려고 하던가?
“처음엔 ‘다른 일도 많아 죽겠는데 이런 일까지 해야 하느냐’며 굉장히 불만이 많았다. 하지만 조금씩 성과가 나타나자 동장들도 동장이라는 직무와 동의 역할에 대해 새롭게 실감하고, 큰 보람과 자부심을 갖는 것 같더라. 현재 전주 시내 전체에서 900곳 넘게 동참했고, 다음달이면 1000곳을 넘을 것으로 예상한다. 외지인 건물주들도 적극 동참하고 있다.”
―그러고 나서 얼마 뒤 ‘전주형 재난지원금’ 정책을 내놨다.
“우리는 재난지원금이 아니라 ‘재난기본소득’이라고 부른다. 엄밀한 개념으로는 기본소득이 아니지만, ‘수당’이나 ‘지원금’보다 낙인감이 없다고 봐서 선택했다. 우리는 이미 4년 전부터 일자리를 잃은 청년들에게 석달 동안 월 50만원씩 지원하는 ‘청년쉼표’ 사업을 해왔다. 이 분야 최고 전문가인 김미곤 한국보건사회연구원 박사의 주도로 세심하고 신중하게 설계했다. 서울대 행정대학원 쪽과는 따로 평가 작업을 하고 있다.”
―애초 5만명을 지원하는 것으로 설계했다. 선별과 집행에 많은 행정력과 시간이 들 텐데.
“충분히 검토했다. 현재 4만6천명이 신청했고 3만2천명에게 지급했다. 설계 당시 일정에서 일주일 정도 지연됐지만, 공무원들이 적극적으로 나서서 속도가 붙고 있다. 며칠 안에 신청자가 5만명을 넘을 것 같고, 열흘 안에 지급도 마칠 예정이다.(전주시는 이날 신청 기간을 일주일 연장한다고 발표했다.) 신청 대상에서 제외된 시민들의 반응도 걱정이었는데, 다행히 별 문제제기가 없다. 공무원들의 헌신이 없으면 불가능했다. 고마울 뿐이다.”
―‘전 시민 지원’을 선택하지 않은 이유는 뭔가?
“65만 시민에게 5만원씩 나눠 주는 것이 가장 수월한 방법일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정부 지원의 사각지대에서 어려움을 겪는 분들을 찾아내려고 했다. 소득이 아예 없어지거나 급감한 이들이 가장 심각한 어려움에 빠져 있다. 우선 급한 사람들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미는 것이 중요하다고 봤다. 지자체의 역할은 시민의 가장 가까이에서 시민의 삶을 보듬는 것이다. 중앙정부와 지방정부는 상호보완적인 관계가 바람직하다. 중앙정부는 할 수만 있다면 총수요 진작 차원에서도 전 국민에게 지급하는 게 맞는다고 본다.”
김승수 전주시장이 27일 의자도 없이 서서 일하는 집무실에서 전주시 팔복동 예술공장 등 시정현안을 점검하고 있다. 전주/장철규 선임기자 chang21@hani.co.kr
―‘해고 없는 도시 상생 선언’은 어느 정도 진척됐나?
“지난주에 시작해서 아직은 초기 단계다. 이번주에 현장 상황실을 열고, 개별 기업들을 전방위로 접촉해 설득할 것이다. 전주는 중소기업이 대부분이다. 중소기업은 인건비가 경영의 핵심 변수다 보니 위기가 오면 사람 줄이는 것부터 생각한다. 큰 댐이 한쪽에 금이 가고 터지기 시작하면 금세 댐 전체로 퍼지듯이, 한 중소기업이 해고를 하면 도미노처럼 번질 것이다. 먼저 해고 분위기 형성을 막는 것이 급하다. 이번 선언에 중소기업인연합회, 여성기업연합회 등이 참여했는데, 기업인들로서는 매우 힘든 선택을 해줬다. 여기에 금융기관, 노동계, 노동당국 등이 결합했다. 참여 주체가 늘어나면 ‘우리도 해고하기가 어렵잖으냐’는 사회적 분위기가 형성될 것으로 기대한다. 다양한 지원 정책도 마련했다. 현장 상담을 통해 정책 수단을 계속 발굴할 것이다.”
―인상적인 정책들을 잇따라 발 빠르게 내놓았는데, 가장 큰 어려움은 뭐였나?
“시작할 때의 ‘상상력’! 나는 도시 운명을 좌우하는 게 상상력이라고 생각한다. 임대료 문제, 해고 위기, 정부 지원 사각지대는 전주시뿐 아니라 대한민국 모든 지자체가 인식하고 있다. 하지만 어느 도시는 정책을 내고 어느 도시는 내놓지 못한다. 상상력의 차이다. 현실의 어려움을 뚫고 가려는 ‘결단’도 시작 단계에서 매우 어려운 문제다. 그리고 상상력과 결단의 힘은 다름 아닌 시민의 절박함을 인식하는 공무원의 절박함에서 나온다.”
―전주는 재정자립도가 썩 좋은 도시는 아니다.
“한번도 돈이 많은 국가, 돈이 많은 도시가 경제위기를 잘 극복했다는 얘기를 들어보지 못했다. 돈의 문제보다 사회적 연대를 어떻게 형성하느냐 하는 가치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이번 위기가 지나면 재정자립도가 가장 높은 지자체가 경제위기를 가장 잘 극복했는지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결과는 다를 거라고 장담한다. 재정자립도가 아무리 높은 지자체도 예산이 남는 곳은 한 곳도 없다. 전주도 큰 건물과 큰 도로가 필요하지만, 우선순위를 달리한 것이다.”
―앞으로 또 다른 사업 구상이 있다면?
“크게 세가지 분야다. 첫째, 경제위기에 대응하는 것, 둘째, 복지위기에 대응하는 것, 셋째, 시민들의 거대한 우울감을 치유하는 것이다. ‘마음치유지원단’을 구성했다. 이 세 분야 안에서 구체적인 정책들이 나올 것이다.”
―풀뿌리 지방자치의 존재 가치와 효용감이 재발견되고 있다.
“전주시 페이스북에 ‘전주라는 도시가 이렇게 가까이 있다는 걸 처음 느꼈다’는 댓글이 달린 걸 봤다. 국민은 국가가 이런 거구나, 시민은 도시가 이런 거구나 하고 인식하는 계기가 됐다고 본다.”
―하지만 지방자치가 시행된 지난 20여년 동안 정작 중앙에 대한 지역의 종속은 심화됐다.
“제도적인 종속 문제가 있지만, 인식의 종속 문제도 크다. 중앙과 광역, 기초의 역할이 다른 것인데 능력의 차이로 인식하는 경향이 강했다. 코로나 사태를 겪으면서 중앙정부의 발상을 뛰어넘는 지자체들이 나오고 있다고 생각한다. 인식의 종속은 개선되고 있고 앞으로 더 개선될 것이다. 이를 위해 지자체 리더들이 중앙정부를 넘어서는 능력을 증명해야 한다. 제도의 종속 문제는 국회에서 풀어야 할 일이다.”
김승수 전주시장이 27일 자신의 집무실에서 <한겨레>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벽에 ‘사람의 도시, 품격의 전주’라는 전주형 사람정책의 구호가 보인다. 전주/장철규 선임기자 chang21@hani.co.kr
―전주는 관광객이 무척 많이 찾기는 하는데, 한옥마을 말고는 서울 사람들이 잘 모르는 것 같다.
“전주만의 일이 아니다. 국가 브랜드와 도시 브랜드는 각각 독립적이어야 한다. 가령, 내게 미국이라는 국가의 이미지는 트럼프, 인종차별, 마약, 총기 같은 것이다. 하지만 나는 시애틀에도 가보고 싶고, 포틀랜드에도 가보고 싶다. 우리나라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가운데 거의 유일하게 국가 브랜드이자 서울의 브랜드만 있고, 도시 브랜드가 없다. 중앙정부의 책임이 크지만 도시들의 책임도 적지 않다. 다들 ‘서울의 길’을 따라가려고 한다. 전주는 ‘전주의 길’을 갈 것이다.”
―전주의 길은 무엇인가?
“세가지다. 사람, 생태, 문화! 예를 들어 시청 바로 뒤에 오래된 성매매 집결지가 있는데, 6년 전 문화재생사업을 시작했다. 집결지를 감소시키는 가장 손쉬운 방법은 공권력을 투입하는 것이다. 포주들은 아파트를 짓자고 했다. 하지만 우리는 문화적 재생과 인권 기반의 재생 사업으로 갔다. 건물을 사들여 서점, 회의 공간, 박물관으로 재생했다. 성매매 종사자를 지원하는 조례를 전국 최초로 제정해, 탈성매매를 체계적으로 지원하고 있다. 현재 업소와 종사자 모두 70~80% 정도 줄었다. 전주역 외곽의 100만㎡ 개발계획도 취소 절차를 밟고 있다. 인구는 늘지 않는데 도시 팽창 정책을 펴면 엄청난 문제를 야기한다. 요즘은 ‘콤팩트 시티’ 개념이 빠르게 진화하고 있다. ‘도시공원 일몰제’에 따라 올해 전주 안에 있는 축구장 1800여개 면적의 공원용지가 해제된다. 시가 모두 사들여 나무 1천만그루를 심으려고 한다.”
―지금 당장 중앙정부나 국회에 요구하고 싶은 것이 있다면?
“다음 국회에서 분권형 개헌이 됐으면 한다. 무엇보다 이번 기회에 전 국민 고용보험 제도가 반드시 도입돼야 한다. ‘포스트 코로나 시대’에 위기는 계속해서 찾아올 것이다. 4차 산업혁명이 밀려온다고 하면서 비정규직, 프리랜서, 플랫폼 노동자들을 방치해서는 안 된다. 이들에게 언제까지 땜질식 지원만 하려고 하는가. 방파제가 필요하다.”
―포스트 코로나 시대에 대비해 전주시가 하는 것이 있나?
“사실 나도 예측을 못 하겠다. 미지의 세계로 들어서는 것은 분명하다. 집단지성이 발휘돼야 할 절체절명의 시기다. 국민 참여형 전략과 정책, 시민 참여형 전략과 정책을 만들어야 하지 않을까. 전주시는 이제 막 ‘포스트 코로나 미래위원회’를 꾸렸다. 전주시 내부 티에프(TF)와 전국 전문가 자문단, 시민 자문단으로 구성된다. 다음달 초에 서울에서 전문가 자문단 회의가 처음 열린다.”
안영춘 논설위원
jona@hani.co.kr
코로나 대처로 ‘전국구 인사’ 된 ‘어공’ 출신 재선 시장
김승수 전주시장은 누구
지방정부 단체장들의 이력은 크게 두 갈래다. ‘늘공’ 지방 공무원으로 성장해 선출직에 오른 경우가 한 갈래다. 공직을 불문하고 중앙에서 활동하다 출신 지역으로 돌아가 출마하는 경우가 또 다른 갈래다. 김승수 전주시장은 예외적이다. 전주에서 학부와 대학원을 졸업한 뒤 22년 전 김완주 당시 전주시장의 수행비서로 ‘어공’ 생활을 시작했다. 그 뒤 정무와 정책 쪽 일을 계속했고, 전라북도 정무부지사를 거쳐 2014년 전주시장에 당선됐다. 그가 정무적 감각과 함께 지역 맞춤형 정책 역량을 발휘하는 배경으로 보인다.
김 시장은 수행비서를 하면서부터 “내가 시장이라면 어떤 일을 할 수 있을까 고민을 많이 했다”고 밝혔다. 일찌감치 꿈을 키워 이룬 셈이다. 개인적으로는 도시의 생태에 관심이 많았다고 한다. 전주역에서 도심으로 가는 길 가운데에는 보행로와 다양한 문화행사를 할 수 있는 공간이 있다. 김 시장의 첫 재임기인 2017년 5월에 조성한 것이다. 8차로를 6차로로 줄이고 곡선이 살아 있게 도로 선형도 바꿨다. 길 이름은 ‘첫마중길’이다. 김 시장은 “그 사업으로 워낙 욕을 많이 들어서 재선에 실패할 뻔했다”고 돌이킨다. 그런데도 도심 한가운데 도로에도 비슷한 콘셉트를 도입하려 하고 있다. 그의 고집스러움이 묻어난다.
코로나19 사태를 거치며 김 시장은 전국구 인사가 됐다. ‘포스트 김승수’의 진로는 중앙정치 무대일까. 그는 “한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다. 무엇을 하는가와 어떻게 하는가보다 왜 하는가를 스스로 물을 뿐”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