텔레그램 성착취 ‘박사방’ 관련 첫 재판이 열린 11일 낮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법 앞에서 텔레그램 성착취 공동대책위원회 주최로 열린 기자회견에서 참석자들이 연대한다는 의미로 끈을 잇는 행위극을 하고 있다. 백소아 기자 thanks@hani.co.kr
텔레그램에서 여성 74명을 성착취한 ‘박사’ 조주빈(24)씨가 검거된 지 100일이 지났지만 피해 여성들은 여전히 일상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있다. 다른 이들에게 알리지 못한 채 수사와 재판을 이어가는데다, 박사방 회원들에게 신상정보가 공개돼 주거 불안까지 겪고 있다.
박사방에 주소 등 신상정보가 공개된 피해자 ㄱ씨는 최근 서울의 한 고시원으로 이사했다. 경찰에 피해를 신고한 지난해 9월 이후 조씨와 조씨 공범자들의 협박을 피해 친구 집으로 옮긴 데 이은 두번째 이사다. ㄱ씨는 23일 <한겨레>와 한 통화에서 “텔레그램방에서 신상이 다 털려서 안전한 주거지로 가는 게 가장 간절하다. 지금 형편에서 갈 수 있는 곳은 고시원뿐이다”라고 말했다.
고시원은 누구나 드나들 수 있기 때문에 ㄱ씨는 불안에 떨고 있다. 범죄 피해자에게는 국민임대주택이 지원되지만 당장 ㄱ씨는 500만원에 이르는 임대주택 보증금을 마련할 길이 없다. ㄱ씨는 박사방 피해를 당했을 때도 ‘고액 알바’의 유혹에 넘어갔다. 취약한 경제적 형편이 범죄에 노출되게 만들었고 그 피해를 회복하는 데에도 걸림돌이 되고 있는 것이다.
가족이나 직장에 알리지 못한 채 수시로 조사를 받으러 가는 점도 부담이 된다. ㄱ씨는 “직장은 물론이고 가족에게도 피해 사실을 말하지 못했는데, 수사기관에 조사를 받으러 갈 때 뭐라고 말하고 가야 하나, 혹시라도 누가 알게 되면 어떻게 하나 불안했다”고 말했다.
또 다른 피해자 ㄴ씨도 지난해 9월 경찰에 박사방 피해를 신고한 뒤 그 누구의 도움도 없이 일곱 달을 버텼다. 그는 신상정보 노출과 성착취물 유포의 공포 속에서 지내다 서울 생활을 정리하고 가족이 있는 먼 지역으로 떠나야 했다. 최근에야 ㄴ씨는 기사를 통해 알게 된 피해자 지원 단체에 직접 지원을 요청했다. 그는 “처음 경찰에 신고했을 때 국선변호인 선임이나 (성폭력 피해자) 쉼터 입소 같은 얘기는 듣지 못했다”고 말했다.
김혜정 한국성폭력상담소 부소장은 “조씨가 검거된 뒤에야 정부가 디지털 성폭력 피해자에 대한 지원 대책을 내놨다. 경찰 수사 단계에서부터 지원책을 적극적으로 내놓지 못한 것이 피해자의 일상 회복 속도를 더디게 만든 주된 원인이다”라고 지적했다.
이런 가운데 피해자의 일상을 되찾아주자며 팔을 걷어붙인 시민들이 있다. 미디어 스타트업 닷페이스와 한국사이버성폭력대응센터는 ‘엔(n)번방’ 등 디지털 성폭력 피해자들을 지원하는 ‘디지털 성폭력 피해 경험자 일상 회복 프로젝트’를 지난 2일 시작했다. 닷페이스의 박혜민씨는 “피해자들에 대한 정부의 지원 대책에 가장 중요한 ‘일상 회복’ 개념이 빠져 있다. 주변에 알리지 않고 경찰서, 법원을 다니며 경제활동을 이어가긴 힘들다. 작은 도움이지만 피해자들이 일상을 유지할 수 있도록 돕자는 취지다”라고 설명했다.
반응은 폭발적이다. 지난 2일 프로젝트가 시작되자 시민 1782명이 4400여만원을 후원했다. 닷페이스 등은 피해자들이 직접 예산을 짜면 그에 맞게 지원할 계획이다.
오연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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