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대표와 청소년 대표로 뛴 23세의 트라이애슬론(철인3종경기) 선수 고 최숙현 씨가 2013년 전국 해양스포츠제전에 참가해 금메달을 목에 거는 모습. 고 최숙현 선수 유족 제공
“그 사람들 죄를 밝혀줘.”
한 트라이애슬론 유망주가 세상을 떠나기 전 어머니에게 남긴 메시지가 한국 사회를 들끓게 했습니다. 감독, 트레이너, 선배의 폭행과 가혹 행위가 날마다 새롭게 드러났습니다. 진실이 모습을 드러내면서 ‘그 사람들’의 범위도 점차 넓어졌습니다. 경찰은 수사에 적극적이지 않았고, 체육회 등 관계기관은 문제를 방관했습니다.
안녕하세요. 문화부 스포츠팀에서 일하는 이준희입니다. 지난 2일부터 경주시청 트라이애슬론팀 폭행 사건을 취재하고 있습니다. 이번 취재는 ‘산 넘어 산’이었습니다. 문제를 파면 팔수록 ‘과연 해결책이 있을까?’ 고민이 쌓여갔습니다. 오늘은 독자분들과 그 고민을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고 최숙현 선수가 올린 것으로 보이는 네이버 지식인 질문 내용. 세세한 내용이 경찰 진술서와 일치한다. 네이버 갈무리
취재가 시작되고 제가 처음 한 일은 고 최숙현 선수의 주변인 취재였습니다. 이들은 소중한 사람을 잃었다는 분노와 충격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속엔 두려움도 함께 도사리고 있었습니다. 폭행을 목격한 이들도, 폭행을 당한 이들도 쉽게 입을 열지 못했습니다. ‘문제가 해결되지 않을 것’이라는 절망과 보복에 대한 공포가 광범위하게 퍼져 있었습니다. “기자님, 알아요. 아는데… 죄송해요. 말을 못 하겠어요.”
깜짝 놀랄 만큼 체육계에서 폭행은 ‘일상’이었습니다. 지난 8일 <한겨레>와 한 인터뷰에서 폭행 사실을 인정한 김도환 선수는 ‘어떤 식으로 폭행당했느냐’는 질문에 제대로 답을 하지 못했습니다. 처음엔 어떻게 본인이 맞은 걸 기억 못 하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습니다. 천천히 그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15살 때부터 감독에게 훈육을 이유로 맞아온 그에게 폭행은 그저 매일 밥을 먹고 잠을 자는 일에 가까웠습니다. “기자님, 사실 전 그게 문제라고 생각을 안 했어요. 그래서 기억도 잘 안 나요.”
취재 과정에서 만난 한 아버지는 저를 붙들고 눈물을 흘렸습니다. “자식이 맞는 거 알고도 침묵했다. 아니, 때론 때려달라고 부탁했다. 문제가 있다고 생각해도 말을 꺼낼 수 없었다.” 지금도 자녀를 감독에게 맡기며 ‘엄하게 다뤄달라’고 부탁하는 부모들이 많다고 합니다. 맞는 걸 알면서도, 성적이 잘 나오면 ‘감사하다’는 말까지 한다고 합니다. 인권영화 <4등>은 영화가 아니라 현실이었습니다. 아버지는 “우리를 이렇게 만든, 체육계의 뿌리 깊은 문제를 밝혀달라. 꼭 후속 보도를 해달라”고 당부했습니다.
김도환 선수의 고백이 나온 다음날 경주시체육회를 찾았습니다. 경주시체육회는 전날까지도 소위 ‘팀 닥터’로 불렸던 트레이너 문제에만 집중했습니다. 김도환 선수가 감독과 장아무개 선수의 폭행을 증언한 상황에서, “트레이너 외엔 폭행 혐의를 확인 못 했다”는 입장에 변화가 없는지 궁금했습니다. 다시 선수들을 조사할 계획은 없는지도 궁금했습니다. 그러나 경주시체육회의 문은 굳게 닫혀 있었습니다. 안에서 직원들이 수시로 오갔지만, “너무 바빠서 기자는 들어올 수 없다”는 말만 반복했습니다. 전날 경상북도는 경주시체육회에 대한 감사를 진행하겠다고 발표했습니다.
굳게 닫힌 문 앞에 서서, 기자도 이렇게 벽을 느끼는데, 고 최숙현 선수는 오죽 절망했을까 조금은 짐작이 됐습니다.
선수들 사이에 깔린 절망과 두려움, 폭력이 일상화된 체육계, 조직 방어에만 몰두하는 관계기관. 고인이 느꼈을 답답함과 무력감은 감히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였겠지요. 경찰 진술서와 세세한 내용까지 같아서 최숙현 선수가 지난해 3월 네이버 지식인에 올린 것으로 보이는 고소 문의글이 떠올랐습니다. “방법을 주세요. 제발….” 수많은 기관이 있었지만, 그가 할 수 있는 건 인터넷에 고통을 호소하는 일뿐이었습니다.
그렇지만 희망이 없는 건 아닙니다. “선수생활이 끝날까” 두려웠던 최숙현 선수의 동료 2명은 용기를 내 국회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추가 폭행을 폭로했습니다. 그중 한명은 “너무 떨렸다”면서도 작성해온 글을 기자회견에서 또박또박 읽었습니다. 이들은 검찰에 가해자 4명을 고소했고 9일 참고인 조사를 시작으로 법적 대응에 나섰습니다. 두려움에 떨던 동료들은 서로의 용기가 됐고, 언론사에 다양한 목격담을 전하고 있습니다.
“왜 선수들이 신고를 못 했을까요? 문제가 뭘까요?” 제 질문에 한 전직 선수는 “기자님, 당연한 거 아닌가요?”라고 되물었습니다. 그는 “어떤 기관이 생기고, 어떤 제도가 만들어져도 바뀌지 않을 것”이라고 잘라 말했습니다. 하지만 최근 그가 다시 전화를 걸어왔습니다. “기자님, 우리 바꿉시다. 이 문제 꼭 해결합시다.”
이제 선수들은 용기를 냈습니다. 더 늦기 전에, 우리가 그 용기에 답해야 할 때입니다.
이준희 문화부 스포츠팀 기자 givenhappy@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