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방송작가는 1만여명으로 추산된다. 이들 가운데 정규직은 0.1%(10명)다. 전국언론노조 방송작가지부 회원들이 피켓시위를 하는 모습. <한겨레> 자료사진
▶ 전 직군을 대상으로 한 <티비에스>(TBS)의 정규직 전환 작업이 지난달 사실상 마무리됐다. 티비에스 안에는 여전히 80명 내외의 프리랜서 작가들이 있다. 정규직 작가가 10명임을 고려하면 압도적으로 많은 수다. 피디, 촬영 등 다른 직군 내 비정규직 비율과 비교해도 그렇다. 작가들은 왜 특수고용 비정규직으로 남게 된 것일까. 지난 2년간 정규직 전환 과정을 되짚어가며 작가들의 목소리를 들었다.
ㄱ 작가는 어디로 갔을까.
그는 출연자가 스튜디오에 들어서면 방송 원고와 함께 주차권을 건넸다. 출연료를 보낸다며 계좌번호를 묻는 것도 그의 일이었다. 출연자인 기자에게도
가끔 밤에, 또는 새벽에 연락이 왔다. 출퇴근 시간이 없어 보였다. “나인(9시)보다 조금 일찍 출근하긴 한다”고 했다. 제때(6시) 퇴근하는 경우는 드물었다. 사람들은 그를 “막내”나 “보조”라고도 불렀다(전국언론노조 방송작가지부가 정한 명칭은 ‘취재’ 작가다). 그러던 어느 날 프로그램 피디가 바뀌었다. 다음날 ‘막내’인 ㄱ 작가는 보이지 않았다. 그만이 아니다. ‘메인’ 작가도 ‘서브’ 작가도 짐을 쌌다.
TBS 비정규직 90%→0%, 그런데 작가는?
정규직 전환 논쟁이 뜨겁다. 인천국제공항공사는 정규직 전환이 공정성 논란으로 번지면서 몸살을 앓고 있다.
신문, 방송 등 언론이 이를 놓칠 리 없다. 정규직화와 관련한 보도가 넘쳐난다. 하지만 방송사도 정작 떳떳하지 못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비정규직을 가장 많이 고용한 곳 중 하나가 바로 방송사였다.
2년 전 자료를 보면, <한국방송>(KBS)은 16.7%가 비정규직이었다. <교육방송>(EBS)은 열 중 셋(32.6%)이 비정규직이었다. 둘은 그나마 나은 편이다. <티비에스>(TBS)는 방송 현장에서 정규직을 찾기 어려울 정도(90.3%)였다. 1990년 설립된 티비에스는 서울시 교통본부 소속 사업소로 분류돼 있었다. 시 예산과 인사상의 제약을 이유로 정규직 대신 임기제(기간제) 공무원을 뽑아왔다. 그 결과가 열명 중 아홉명이 비정규직이라는 기형적인 노동환경이었다.
정규직 전환이 시대적 흐름을 타면서 2018년 서울시도 노동존중특별시 선언과 함께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에 나섰다. 이는 2년에 걸친 티비에스의 독립법인화와 보조를 맞췄다. 티비에스의 비정규직을 기간제 근로계약으로 전환한 뒤 가점을 줘 공개채용에 따라 정규직으로 전환한다는 계획이었다. 2년여가 흘렀고, 지난 6월 사실상 정규직 전환 사업을 마쳤다.
‘전 직원 가운데 남은 비정규직은 2명(0.57%)뿐’이란 성적표(프리랜서 계약은 제외)를 손에 쥐었다.
“정규직 전환은 됐는데, 상황은 쉽지 않네요.”
지난 7일 <한겨레>와 만난 이윤정 전국언론노조 티비에스지부 부지부장의 한숨이 깊었다. 티비에스지부는 경영진과 함께 정규직 전환 과정을 이끈 한 축이다. 이 부지부장의 속앓이는 티비에스 비정규직 0%대의 성과가 정작 자신이 속한 작가 직군에는 해당되지
않아서였다.
이 부지부장은 전국언론노조 방송작가지부 부지부장을 지냈다. 그와 마찬가지로 티비에스 작가들은 모두 특수고용 비정규직, 프리랜서였다. 정규직 전환 과정에서 티비에스 내 작가 89명 중 23명만 직접 고용되는 기간제 근로계약을 체결했다. 그 가운데 공채 방식을 거쳐 정규직이 된 7명을 포함해 티비에스의 정규직 작가는 겨우 10명뿐이다. 다른 방송사에는 정규직 작가가 없으니 전체 방송작가 1만명 중 정규직은 10명, 0.1%인 셈이다(전국언론노조 추산). 그나마 작가 정규직화가 방송사 최초라고 위안해보지만 티비에스 내 조연출, 카메라 등 다른 직군 구성원들 거의 전원이 기간제 근로계약을 체결하고 정규직 전환을 한 것과 비교하면 초라한 수치다.
2017년 11월 출범을 준비중인 전국언론노조 방송작가지부. 김봉규 선임기자 bong9@hani.co.kr
작가 다수가 정규직 전환 과정에서 시행된 기간제 계약을 거부하고 프리랜서를 유지한 이유는 무엇일까. 2018년 1월 서울시의 의뢰로 한국노동사회연구소가 내놓은 용역보고서 ‘티비에스 내 프리랜서 비정규직 고용모델 개선 실행방안 연구’를 보면, 작가들은 “한 방송사에 매여 있을 수 없어서”를 우선 꼽았다. 더해 “근로계약이 프리랜서로 누려온 여유로운 시간 사용의 자율성을 침해할 수 있다”는 인식도 강하게 자리 잡았다. 이 말 속에는 1개 프로그램만 참여하면서 일주일에 하루 이틀만 출근하고 싶다는 바람과 2~3개 프로그램에 동시에 참여해 수입을 올리고 싶다는 생각이 동시에 담겨 있다.
“계약 뒤 피디와 관계가 껄끄러워질 수 있다”는 현실론도 있었다. 한 티비에스 피디는 최근 <한겨레>와 한 통화에서 “새롭게 피디가 투입되는 경우는 물론이고 청취율이 예상 밖으로 저조한 경우에도 작가를 교체하는 게 피디의 권한이라는 게 오랜 관행이었다”며 “작가들이 정규직이 되는 게 부담스러운 것은 사실”이라고 했다. 일부 작가들은 티비에스지부를 찾아 “‘피디가 (기간제) 근로계약을 한 작가와는 일을 못하겠다고 해서’ 계약을 하지 못했다”고 증언하기도 했다. 당시 사정을 잘 아는 티비에스 관계자는 “피디 직종의 집단적 반발을 우려할 만한 상황이라고 판단했다”며 “기간제 근로계약은 원하는 분 모두와 계약했지만, 정규직은 안팎의 의견을 참고해 10명을 채용하기로 했다. 무엇보다 작가 내부에서도 정규직에 대한 필요성이 높지 않았다”고 했다.
이에 대해 티비에스지부의 입장은 분명했다. 이 부지부장은 “23명 기간제 작가 모두 정규직 전환을 위한 공채에 응시했다. 정규직 전환의 원칙대로라면 이들 모두는 정규직이 됐어야 한다”며 “경영진은 정무적 판단으로 채용 규모를 정해 원래 취지를 어긴 것”이라고 말했다.
어떤 정규직이어야 할까
티비에스 작가의 정규직 전환 과정은 ‘비정규직이냐 정규직이냐’ 이분법을 넘어 ‘어떤 정규직이어야 하느냐’는 난제를 던졌다. 정규직인 한 작가는 “일주일에 이틀씩 출근하던 작가가 전일 출근으로 바뀐다면 그만한 대가가 있어야 했다. 고용 불안이 해소된다는 것만으로 시간의 자율성을 포기하기 힘들어하는 분위기였다”고 했다.
처우에 대한 불만도 있다. 티비에스는 연차 15년 안팎의 작가들 가운데 라(3명)급과 마(7명)급을 정규직으로 뽑았다. 라급이면 일반직으로 8급 정도다. 정규직 전환된 작가들을 포함한 티비에스 작가 내부 분위기는 함께 일했던 임기제 공무원(피디 직군) 혹은 카메라 등 비슷한 경력의 신규 채용 인력에 비해 적게는 한 단계 또는 두 단계 이상 낮은 직급을 받은 것으로 본다. 연차에 비해 직급이 낮다 보니 작가 수입도 줄어든 경우가 대부분이다. 특히 두세개 프로그램에 참여하던 작가는 연봉이 절반 이상 줄어들었다. 정규직이 된 한 작가는 “월수입이 100만원 넘게 깎였다. 금액의 차이가 있겠지만 다른 작가들 사정도 비슷할 것”이라고 했다. 이와 관련해 티비에스 관계자는 “작가 정규직 전환이 다른 방송사에서 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상황에서 직급을 조정하는 데 어려움이 있었다”고 설명했다.
물론 애초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작가라는 직군이 본격적으로 분화되기 시작한 1990년대 초만 해도 작가의 업무는 주로 피디가 프로그램을 제작하는 과정에서 대본 집필 등으로 한정돼 있었다. 하지만 현재는 제작 전 과정에 걸쳐 피디와 협업한다.
티비에스 피디는 정규직임에도 상대적인 자율성과 함께 비정규직 시절의 소득이 보장됐다. 같은 방송 현장 인력임에도 작가 직군에 대한 고민은 부족했던 것이다. 티비에스의 다른 작가는 “물론 자는 시간을 빼고 거의 일에 매달리던 시절의 연봉을 그대로 받길 원하는 분위기는 아니다. 현장에서의 기여도 등을 객관적으로 평가하고 합당한 대우를 해주면 되는 것”이라며 “정규직이 된다고 해서 ‘매인다’는 인식이 없으려면 그만한 자율성을 보장해주면 되는데 아직 그런 인식은 부족한 것 같다”고 했다. 이윤정 부지부장은 “정규직이라도 작가 직무 특성에 맞게 최대한 역량을 발휘할 수 있도록 근무여건이나 처우에 변화를 줘야 한다. 그래야 정규직 전환을 한 조직과 작가 자신들이 시너지를 낼 수 있고, 정규직 전환의 효과를 제대로 평가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지난 2년의 실험은 의외의 결과를 가져오기도 했다. 노성철 사이타마대학 교수는 ‘티비에스 프리랜서 계약 작가들의 기간제 근로계약 전환과정 및 근로계약하에서의 일 경험 조사’라는 논문에서, 작가가 주장하는 시간 자율성 자체에 대한 의문을 던졌다. 노 교수는 논문에서 “방송작가 직군이 프리랜서를 고집하면서 시간자율성이 높다고 주장하는 것은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라며 “오히려 그들은 시간빈곤(1주일 168시간 중에서 개인 관리와 가사·보육 등 가계 활동에 필요한 시간을 뺀 시간이 주당 근로시간보다 적을 경우)의 상태에 있다”고 했다. 이어 “상당수의 프리랜서 방송작가들은 객관적인 시간빈곤에 시달리고 있으면서도 주관적으로 이를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며 “일부 작가들은 스스로 주 노동시간을 산출하는 것조차 어려움을 겪을 정도”라고 했다.
예를 들어 작가들은 집, 카페 등 사적 공간에서 자신이 몸담고 있는 프로그램을 위해 수행하는 뉴스 모니터링, 독서, 트렌드 분석 등의 자료조사를 노동으로 보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이를 두고 노 교수는 “노동시간의 감수성이 부족한 상태”라며 “이를 일깨우기 시작한 것이 바로 근로계약”이라고 주장했다. 이는 현장에서도 확인된다. <김어준의 뉴스공장>에서 일했던 송지연 작가는 <한겨레>와 한 통화에서 “일주일에 이틀 정도 출근하다가 정규직이 되면서 출근 자체가 힘들었던 것도 사실이다. 다만 분명한 건 노동과 휴식의 명확한 구분이 생겼다”며 “이제는 퇴근 뒤, 주말 등의 휴식 개념이 명확해지면서 삶의 질이 달라졌다”고 했다. 정규직이 된 작가 10명 가운데 이탈자가 없는 것도 주목할 만하다. 송 작가는 이에 대해 “수입이 줄어든 것과는 별개로 당장 잘릴 걱정 없다는 심리적 안정감이 주는 장점이 크다”며 “업무의 지속성은 회사에도 도움이 될 것”이라고 했다.
정규직 아닌 이들 노동조건은 후퇴
정규직 전환이 마무리된 뒤로 작가들의 노동조건은 나아졌을까. 티비에스는 회사 차원의 기간제 근로계약이 끝나 결원이 생긴 작가 13명 모두를 각 프로그램 피디 권한으로 프리랜서로 채웠다. 그들 중 지난달 23개월 계약 기간이 만료
된 한 작가의 경우 주급 50만원의 프리랜서로 대체됐다. 이 일은 출퇴근 시간이 일정한 주 5일 상근의 상시지속업무였다. 기간제 전임 작가는 4대보험과 함께 서울형 생활임금(220만원)과 처우개선수당(20만원)을 합한 240만원과 야근수당 등 시간외수당을 따로 받았다. 후임 작가는 4대보험의 혜택을 받지 못하니 프리랜서로서 고용불안 또한 온전히 자신의 몫이다
. 티비에스지부는 사실상 생활임금과 4대보험이라는 노동조건의 최저선이 무너진 퇴보로 받아들이고 있다. 심각한 것은 회사는 이와 관련한 채용 현황을 정확히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프리랜서는 근로계약을 체결하지 않고, 피디의 직권으로 인건비가 아닌 프로그램 제작비에서 채용하기 때문이다. 이에 티비에스지부는 경영진에 최소한 신입 작가는 직접고용(기간제 근로계약)을 할 것을 주장하고 있다.
이강훈 티비에스지부장(기자)은 “비정규직 방송노동자의 정규직 전환이라는, 어렵지만 필수적인 과업, 그중에서도 가장 어려운 작업인 작가 정규직화를 티비에스가 대한민국에서 가장 선도적으로 나선 것에 나름의 의미와 자부심을 느끼고 있었는데, 여전히 신입 작가가 프리랜서로 고용되고 있는 현실이 안타깝다. 작가의 정규직 인원을 늘리고 직접 고용해야 한다”고 말했다.
하어영 기자 haha@hani.co.kr
서울 마포구 상암동에 있는 TBS 전경. 김경호 선임기자 jijae@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