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시 암이 더 커지면 어떡하지?’ ‘혹시 암이 다른 곳으로 전이되면 어떡하지?’
대학병원에서 진료를 받는 과정은 피가 말랐다. 기다리고 또 기다리는 한없는 기다림의 연속이었다. 2019년 12월12일 유방암 진단을 받은 나는 1차 병원에서 예약해준 서울의 한 대학병원 유방외과를 찾았다. 그동안 대학병원 진료를 한번도 받아본 적 없는 나는 대학병원 진료 절차에 무지했다. 첫 진료를 보고 나면 바로 수술 날짜가 잡히고, 내 몸에서 당장 떼어버리고 싶은 암 덩이를 싹둑 잘라낼 수 있을 줄 알았다. 그런데 웬걸. 유방외과 의사는 정확한 진단과 치료 계획 수립을 위해 검사를 진행해야 한다고 했다. 진료는 원점에서 다시 시작됐다.
의사는 피 검사, 소변 검사, 흉부 엑스(X)선 촬영은 물론이고, 유방 초음파 검사와 유방 촬영술(mammography), 흉부 시티(CT·컴퓨터단층촬영)와 뼈 스캔, 엠아르아이(MRI·자기공명영상촬영) 검사를 한 뒤 열흘 뒤에 다시 보자고 했다. 1차 병원에서 가져온 암 조직 슬라이드를 다시 분석하는 작업도 한다고 했다. 이름만 들어도 무시무시하게 느껴지는 검사들을 그렇게 많이 해야 한다고 하니 다리가 후들거렸는데, 그마저도 예약이 쉽지 않았다. 검사 예약을 해주는 간호사는 “엠아르아이와 뼈 스캔은 대기자가 너무 많아 지금 예약을 해드릴 수 없네요. 빈자리가 생기면 연락드립니다. 전화 안 받으셔도 다시 전화 안 드리니 전화 꼭 받아주세요”라고 말했다.
‘하…. 이걸 어쩌나….’
깊은 한숨이 나왔다. 전화를 기다리면서 입은 바짝바짝 타들어갔다. 휴대전화를 손에 꼭 쥐고 바라보고만 있었다. 일체유심조라고 했던가. 암 진단 전에는 같은 몸으로 멀쩡하게 잘만 지냈으면서, 암 진단을 받은 뒤로는 공포심이 내 목을 꽉 조였다. 금방이라도 암이 커져서 나를 삼켜버릴 것 같은 걱정, 암이 다른 곳으로 번져 죽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들이 나를 꽁꽁 에워쌌다. 의사는 “암이 그렇게 빨리 전이되지 않는다. 걱정하지 말고 검사한 뒤 보자”고 했지만 그런 말들은 귀에 들리지 않았다.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잠을 설쳤고, 암 덩이가 있다는 왼쪽 부위를 제대로 움직일 수 없었다.
한없이 주어진 시간은 ‘절대 고독’의 시간이었다. 세상은 나와 상관없이 돌아갔고, 나는 그 누구와도 소통할 수 없는 외딴섬에 갇힌 기분이었다. 가족들이 내게 다정한 말을 건네고 웃음을 보여도 반응이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마음의 갈피를 잡지 못한 날이면, 바깥에 나가 하염없이 걷고 또 걸었다. 걷다가 무심코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면 투명하게 빛나는 햇살과 뭉게구름은 왜 그렇게 슬프도록 아름다운지. 벤치에 앉아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다 잔잔하게 흐르는 안양천 위의 반짝이는 윤슬을 보며 한없이 상념에 젖었다.
유방암 3기 진단을 받고 항암, 수술, 방사선이라는 3대 표준치료를 다 마친 지금, 누군가 ‘가장 힘든 시간이 언제였냐?’고 물어본다면, 나는 모든 것이 불투명했던, 치료 방향이 잡히기 전인 그 시기라고 대답할 것이다. 검사하고 검사 결과를 기다리면서 내 마음에서는 끊임없이 나를 자책하고 지나온 내 삶을 부정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내가 너무 오지랖이 넓었나? 내가 너무 하고 싶은 것이 많고 욕심을 부린 걸까? 그놈의 열심병 때문에 이 사달이 난 것일까? 그동안 고기를 너무 많이 먹었던 걸까? 잠을 너무 줄였나? 아니면 남편과 싸우고 그날 그렇게 펑펑 울어서 병이 왔나? 오랫동안 운영하던 베이비트리를 그만두면서 스트레스를 너무 받았나?’
질문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하루에도 몇번이고 나는 내 인생의 테이프를 되돌려 감았다. 급기야 어린 시절 콜라나 참치 통조림 같은 음식을 먹은 걸 후회하는가 하면, 공기도 좋지 않은 서울로 굳이 대학 진학을 하겠다고 한 내 선택을 후회하기도 했다. 그렇게 나는 과거의 망령에 붙들려 헤어나지 못했다.
정신의학자 엘리자베스 퀴블러로스에 따르면, 죽음 또는 죽을 만큼 힘든 상황이 닥쳤을 때 사람들이 이를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과정에는 5단계가 있다고 한다. ‘죽음의 5단계’ ‘슬픔의 5단계’라 불리는 이 과정은 부정-분노-협상-우울-수용이다. 그 시기 나는 부정과 분노, 협상, 우울의 단계를 수시로 오갔던 것 같다. 가장 힘든 시간이었다.
크리스마스 직후인 27일, 각종 검사 결과를 듣는 날이었다. “제발 전이가 없게 해주세요”라고 간절하게 기도하고 진료실에 들어갔다. 의사는 “다행히도 뼈나 장기 전이는 보이지 않는다. 암 크기는 2.7㎝ 정도 되고, 공격적인 암은 아니며 여성호르몬 수용체가 있는 호르몬 양성 암이다”라고 설명했다. 쉽게 말해 내 유방암은 여성호르몬을 먹고 자라는 암이며, 여성호르몬을 차단하면 예후가 좋은 암에 속했다.
우리 몸의 세포 표면이나 핵에는 다른 세포와 신호를 주고받을 수 있도록 하는 ‘수용체’가 있다. 이들 수용체 사이의 신호를 매개로 세포들이 분화하고 사멸한다. 암이란 갑자기 세포 사이에 신호가 과다하게 발생하거나 같은 신호를 보내도 수용체가 과민하게 반응해 세포가 비정상적으로 무한증식하면서 생기게 된다. 한마디로 돌연변이 세포인 것이다.
유방암에서는 주로 에스트로겐 수용체, 프로게스테론 수용체, 허투(HER2) 수용체가 발견된다. 여성호르몬인 에스트로겐, 프로게스테론 수용체가 과발현된 그룹을 호르몬 수용체 양성 그룹으로, 만약 이 세가지 수용체가 모두 없다면 삼중 음성 그룹으로 분류한다. 암이 어떤 수용체를 갖고 있느냐에 따라 치료 방향은 달라지며, 내 암이 어떤 성질인지는 조직검사 결과지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조직검사지를 보니, 내 암은 에스트로겐 수용체 90%, 프로게스테론 수용체 80%였다.
공격적인 암이 아니라는 말에 친정어머니와 나, 남편 모두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고맙습니다”라는 말이 절로 나왔다. 그러나 기쁨도 잠시. 의사가 머뭇거리며 말을 이어갔다.
“암 위치가 좋지 않아요. 보통 이런 경우 전 절제(유방 한쪽 전체를 자르는 것)를 권하는데, 선항암 또는 선호르몬 치료를 통해 암의 크기를 줄여 부분절제를 시도해보는 게 좋겠습니다. 그리고 검사 결과를 보니 겨드랑이 림프절 한곳이 약간 부어 있어요. 전이된 것인지 아니면 그냥 부은 것인지 검사해보죠.”
‘하…. 이건 또 무슨 일이지?’
예측하지 못했던 일은 계속 터졌다. 다시 가는 칼날을 겨드랑이 쪽에 총처럼 쏘아 조직을 떼는 총조직검사를 했다. 다음 진료는 열흘 뒤에나 잡혔다. 환자는 하루하루가 지옥이었지만, 대학병원 진료는 거북이걸음처럼 느릿느릿 진행됐다. 열흘이 지난 1월7일, 겨드랑이 림프절 조직검사 결과를 듣는 날이 왔다. 쿵쾅쿵쾅. 진료실 앞에서 기다리는데 내 심장 박동 소리가 크게 들렸다. “양선아님~ 들어오세요.”
떨리는 가슴을 안고 의자에 앉았는데, 주치의가 컴퓨터 모니터를 빤히 쳐다보고 있다. 표정이 좋지 않았다. 잠시 멈칫한다. “조직검사 결과에서 겨드랑이 전이가 있는 것으로 나왔어요.” “아…. 정말…. 어떡해….” 친정어머니가 탄식했다.
“1차 병원에서 림프절 전이가 없는 것으로 보인다고 했는데요. 그렇게 빨리 전이가 되나요?”
“초음파로는 발견 못 했을 수도 있지요. 흔히 전이가 됩니다. 전이가 됐다고 달라질 것은 없어요. 다음주 맘마프린트 결과를 보고 최종적으로 결정하시면 됩니다. 맘마프린트 결과에서 낮은 위험도가 나오면 호르몬 치료를 먼저 하고, 위험도가 높게 나오면 항암 치료를 먼저 합니다.”
병원에서는 호르몬 수용체 양성, 허투 음성 그룹인 환자들을 대상으로 임상시험에 참여하면 암 재발 예측 검사인 맘마프린트를 무료로 해준다고 했다. 다양한 유전자를 분석해 재발 예측 검사를 하는 맘마프린트 검사는 건강보험이 적용되지 않아 비용이 400만원가량이었다. 항암을 피하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임상시험에 참여하기로 했다. 림프절 전이를 확인한 뒤에도 맘마프린트 결과가 나오기까지 또 일주일의 시간을 기다려야 했다.
“인생은 초콜릿 박스와 같아. 무엇을 고르게 될지 알 수 없거든.”
영화 <포레스트 검프>에 나온 명대사다. 가슴은 타들어갔지만, 내 삶이라는 상자 속에는 쓰디쓰고 맛없는 초콜릿 말고도 달콤한 초콜릿도 들어 있었다. 어느 날, 한 후배가 집 근처로 찾아왔다. 아버지를 대장암으로 잃은 그는 10년 전 자신 또한 갑상선암에 걸려 치료를 받았다. 후배는 자신에게 큰 도움이 된 책이라며 의료사회학자인 아서 프랭크의 <아픈 몸을 살다>라는 책과 몸을 따뜻하게 만들어주는 계피생강차를 내게 건넸다.
“우리 조직이 차별이 없는 곳이라지만 학연, 지연, 공채 기수 등에 따라 인연이 얽히고 그러잖아요. 그런 관계 속에서 아무런 편견 없이 제 고민을 들어주고 그랬던 사람이 선배예요. 선배는 그렇게 따뜻한 사람이에요. 자꾸 선배에게서 암의 원인을 찾지 말아요. 그냥 운이 좀 안 좋았던 것이고, 선배는 선배답게 잘 이겨낼 거예요.”
진심이 담긴 후배의 위로와 공감에 나는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암에 걸렸다는 이유로, 그동안의 내 삶을 부정하고 나 자신을 원망하고 있었는데, 후배가 들려준 말은 내 자존감을 회복시켜줬다. 집에 돌아와 책을 읽으며 ‘암=고통’, ‘암=상실’이라고 인식됐던 내 관점이 대폭 전환됐다. 서른아홉에 심장마비, 마흔에 암이라는 질병을 두번 겪은 아서 프랭크는 그의 저서에서 질병을 ‘위험한 기회’라고 정의했다. 그러면서 그는 아프기 전의 자신에게 “두려울 수밖에 없겠지만, 두려움에 차서 인생을 보낸다면 바보 같은 일일 거라고, 미래의 너는 고통받고 많은 것을 잃게 되겠지만 고통과 상실은 삶과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해주고 싶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는 서문을 이렇게 끝낸다.
“많은 것을 잃겠지만 그만큼 기회가 올 겁니다. 관계들은 더 가까워지고, 삶은 더 가슴 저미도록 깊어지고, 가치는 더 명료해질 거예요. 당신에게는 이제 자신의 일부가 아니게 된 것들을 애도할 자격이 있지만, 슬퍼만 하다가 당신이 앞으로 무엇이 될 수 있는지 느끼는 감각이 흐려져선 안 돼요. 당신은 위험한 기회에 올라탄 겁니다. 운명을 저주하지 말길. 다만 당신 앞에서 열리는 가능성을 보길 바랍니다.”
그날 나는 비로소 유방암을 내 삶의 일부로 받아들였다. 이 질병이 부정하고 원망하고 미워하고 싸우고 극복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이 또한 내 삶이고 내 삶의 일부라는 것을 수용하기로 했다. 그제야 암 진단을 받기 전 내가 살아온 40여년의 삶이 너무 소중하게 느껴졌다. 나는 치열했고 열정적이었고 내 삶을 사랑했다. 그런 내 삶의 궤적 위에 유방암이라는 ‘위험한 기회’가 보태졌고, 또다시 이 삶의 과정을 내가 어떻게 통과하느냐가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삶은 현재진행형이라는 것을 잊지 않겠다고 다짐했고, 내 작은 불행을 현미경으로 확대해 들여다보기보다 내 삶 곳곳에 숨어 있는 행복의 파랑새를 부지런히 찾겠다고도 결심했다.
사회정책팀 양선아 기자
anmadang@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