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재는 ‘연예인들의 연예인’이었고 ‘패피들의 패피’였다. 사건 전날, 데뷔 뒷무대를 찍은 영상 속 마지막 장면에서 김성재가 웃고 있다. 그는 12시간 뒤 주검으로 발견됐다. 유튜브 영상 갈무리
▶연재 순서
① 운명의 밤
② 오른팔의 주사자국
③ 누가 부검을 반대했나
④ 진정서와 동물마취제
⑤ 제보자와 황산마그네슘
⑥ 누락된 증거와 첫 공판
⑦ 법의학 vs 법의학
⑧ 교체된 검사와 변호사
⑨ 무너진 유죄의 근거들
⑩ 왜 영구미제가 되었나
▶등장인물
K 김성재 여자친구
정희선 전 국과수 원장
이정빈 검찰 쪽 법의학자
피고인 K가 대법원에서 무죄 확정판결을 받으면서 김성재 변사사건은 영구미제가 됐다. 사건이 미궁에 빠진 가장 큰 원인은, 초동수사 부실과 현행 검시제도에 있었다. 김성재 몸에서 동물마취제를 발견해 수사방향을 뒤바꾼 정희선 전 국립과학수사연구소장은 김성재 사건에 대해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무엇보다 범죄 증명의 핵심은 사건발생 초기에 증거확보를 위해 범죄현장 보존을 철저히 하고, 변사자나 현장 주변 등 현장사진과 더불어 호텔에 설치된 CCTV의 필름, 현장 증거물을 채취하는 일이다. 이번 사건의 경우 황산마그네슘과 졸레틸50을 주사하고 남은 빈 약병이나 주사기가 수거되었다면 빠른 시간 내에 약물이 확인되어 사건이 쉽게 종료되었을 것이다. 부검결과를 통보받고 뒤늦게 호텔에 설치된 CCTV의 필름과 졸레틸50을 주사하고 남은 약병이나 주사기 등의 증거물을 채취하려 하였으나, 아쉽게도 호텔의 규정에 따라 폐쇄회로는 10여 일이 지나서 이미 지워진 상태였고 방을 청소한 쓰레기 등은 일찌감치 치워졌다. 역시 철저한 초동수사가 사건 해결의 필수요소라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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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의 초동수사는 왜 그토록 부실했을까. 지금은 얼마나 달라졌을까. 우리가 김성재 변사사건을 되돌아 본 이유 가운데 하나다. 대다수 미제사건에서 나타난 초동수사의 부실은, 근본적으로는 수사와 부검이 별도로 진행되는 한국 검시제도의 후진성에 기인하고 있다. 즉 부검을 통하여 사인을 결정하고 사체소견을 해석하는 부검의의 일과, 현장에 대한 검시조사와 사망의 종류, 증거물 수집 같은 수사기관의 분리돼 있는 것이다.
2 수사와 검시가 분리된 탓에 사건 현장에서 법의학적 지식을 가진 검시관에 의해 검시가 이뤄지지 못한 채, 사건 발생 하루 이틀이 지난 시점에서야 국과수를 통한 부검이 진행되는 실정이다. 초동수사가 부실할 수밖에 없는 구조적인 문제점이 있다는 얘기다.
김성재는 1995년 런칭해 선풍적인 인기를 끈 의류브랜드 ’292513=STORM’의 광고모델로도 활동했다. 안성진 작가가 1995년에 찍은 광고사진. 유족 제공
김성재 사건의 경우, 사건 당일 사체는 응급처치를 위해 병원으로 옮겨졌다. 사망이 확인됐지만 직장 온도, 시반과 시강(사후 경직도) 등은 곧바로 측정되지 못했다. 사건 현장보존도 이뤄지지 않았고 부검은 이튿날 오전에야 진행됐다. 범죄현장이 아닌 병원 영안실에서 검시가 이뤄진 것은, 사건접수가 늦게 이뤄진 점에도 한 원인이 있지만, 검시제도의 한계와도 결코 무관하지 않다.
또 다른 미제사건인 치과의사 모녀 살해사건의 경우도 같은 문제점을 안고 있었다. 김성재 사건보다 5개월 앞서 일어난 이 사건에서 아파트 욕조물에 잠겨 있던 시신은 부검을 위해 다른 장소로 옮겨졌다. 화장실과 욕조물의 온도, 직장온도는 측정되지 않았다. 초기 시강 정도와 동공관찰 등도 없었다.
법의학자들은 두 사건 모두 발생 당시 현장에서 검시가 이뤄졌다면, 영구미제가 되는 일은 막을 수 있었을 것이라고 지적한다. 공판 당시 검찰 쪽 증인으로 나섰던 이정빈 서울대 의대 교수는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김성재 사건 당시에도 채증이 허술했냐는 질문에 다음과 같이 개탄한 바 있다.
“보통 부검 재감정에 들어가면 해석은 달라질 수 있어요. 하지만 사실(fact)이 뒤바뀌지는 않습니다. 김씨 사건에서 경찰이 수집한 사실은 형편 없었습니다. 어떤 현상이 나오면 사실을 딱 떨어지게 객관적으로 기술해야 합니다. 하지만 경찰은 사실을 소홀히 하고 감정적으로 기술했어요. 시신에 나타나는 시반은 ‘사실’의 문제인데 경찰은 ‘그렇다, 아니다’라고도 쓰지 않았어요. 시신을 찍은 즉석카메라 상태도 엉망이었죠. 게다가 시신을 제대로 찍지도 않고 옮겼습니다. (증거가) 날아가 버린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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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소심 판결은 사망시각추정, 치사량, 전문가 증언 배척 등의 문제에서 많은 의문을 낳았다. 사진은 솔로 데뷔 음반에 실린 안성진 작가의 김성재 화보. 유족 제공
이 교수의 말처럼 사건 당일, 검안과정에서 폴라로이드 카메라로 사체 사진을 찍은 점은 경찰의 치명적 실수였다. 이는 훗날 법의학자들의 양측성 시반 감정이 부정당하는 근거가 됐다. 결과적으로 사망추정 시각이 미궁에 빠지게 된 계기였다. 치과의사 모녀 살해사건 수사에서도 경찰은 피해자들의 시신을 폴라로이드 카메라로 찍었다. 폴라로이드 카메라로 촬영할 경우 따로 현상하지 않아도 돼 편리하지만, 사진의 화질에서 필름카메라에 못 미치는 것은 분명했다. 1995년 당시 경찰의 법의학적 지식의 수준이 낮았음을 방증할 수 있는 대목들이다. 김성재 사건 이후 검시현장에서 폴라로이드 카메라는 디지털카메라로 서서히 대체됐다.
일반적인 수사 또는 내사 절차에 비해, 검시는 사체를 대상으로 법의학적 지식에 과학적 수사기법을 결합해 증거를 수집한다. 검시과정의 작은 오차, 실수, 지연만으로도 증거가 오염되는 효과가 발생하고, 죽음의 원인에 대해 잘못된 증거판독 결과가 도출될 수 있다. 전문가들이 검시결과에 매우 높은 수준의 신뢰성이 담보돼야 한다고 지적하는 이유도 검시결과가 그만큼 중요하기 때문이다.
4 변사사건은 주검의 부패로 인해 검시과정의 실수를 만회할 수조차 없다.
최영식 전 국립과학수사연구원 법의학부장은 시사주간지 <한겨레21>과 2013년 3월 이뤄진 인터뷰에서 한국 검시제도의 문제점에 대해 다음과 같이 탄식했다. “사건 현장에서 사체를 보존하는 법적 조항이 전혀 없다.
5 경찰이 현장에서 (사체) 사진을 찍은 뒤 옮겨도 불법이 아니다. 그렇게 옮겨진 사체는 대부분 동네 병원 영안실 냉동고에 들어간다. 그러고는 경찰이 일차적으로, 검사가 최종적으로 부검 여부를 결정한다. 오늘 사망한 변사사건 사체가 있으면 아무리 빨라야 다음날 아침에 국과수 부검실로 들어오는 거다. 사체의 경직 상태나 직장(대장의 가장 아랫부분) 온도 등 사후 경과 시간을 추정할 수 있는 부분의 절반은 이미 날아간 상태인 거다. 냉장고에 들어갔다가 나온 사체의 직장 온도를 따지는 게 얼마나 의미가 있겠나. 그러다보니 우리는 일부분의 경직 상태, 복부에 나타난 피부 변화, 부패 진행 정도 등 나머지 절반을 보고 사후 경과 시간을 추정한다. 이렇게 처음부터 법의학 전문가가 사건 현장에 갈 제도적 장치가 없는 게 한계라고 본다.”
1975년께 외할머니(왼쪽)와 함께 찍은 가족사진. 김성재 외할아버지는 한국 축산업의 아버지로 불린 육종륭 서울대 초대 농대학장이었다. 유족 제공
영국과 미국 등 영미법계 국가는 초동수사 단계부터 법의학자가 직접 검시한다. 검시 단계에서 수사기관의 관여 없이 부검 여부가 결정되고, 검시가 검시관 또는 법의관 주도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수사기관에 의해 부검 여부가 결정되는 독일·유럽·한국 등 대륙법계 국가들에 비해 독립성이 보장되는 이점도 있다.
아마추어적인 검시는 구조적 한계라 하더라도, 당시 경찰은 보강증거 수집에서도 면밀하지 못했다. 사건 발생 보름이 지나서야 CCTV 확보에 나섰지만 이미 다른 화면이 녹화돼 있었던 일이나, 사건 초반 마약 사고사에 대한 확신에 차 있다가 동물병원장의 제보 이후엔 K가 약품을 구입한 사실에 환호해 디테일을 놓쳐버린 점 등은 두고두고 뼈아픈 대목으로 남았다.
물론 26년 전과 비교해 달라진 점도 없지 않다. 경찰청은 2006년 검시조사관 제도를 도입, 현재 100여명의 검시조사관을 변사사건 현장에 투입하고 있다. 간호사, 임상병리사 출신인 검시조사관들은 의학지식과 임상 경험이 있고 법의학 지식까지 갖춰 자칫 자살로 묻힐 만한 사건들을 밝혀내고 있다. 김성재 사건처럼 변사사건 발생시 범죄 관련 지식이 부족한 민간 의사에게 검시를 위탁해 오던 관행이 개선된 것이다.
그러나 법의학자가 사건현장에 직접 투입되는 미국·영국 등과 비교할 때 질적 차이도 엄연한 것도 사실이다. 아무래도 경찰 검시조사관들은 법의학자보다 전문적인 식견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전문 검시관 제도 도입 움직임이 간헐적으로나마 이어지고 있는 이유다. 진선미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지난 20대 국회 때 검시관이 갖춰야 할 자격과 직무, 검시관 양성에 대한 사항, 검시연구원 운영 등의 내용을 담은 ‘검시관의 자격과 직무 등에 관한 법률안’을 발의한바 있다. 지난해 7월엔 검시관 제도 도입을 위한 토론회를 열기도 했다. 앞서 2005년 유시민 당시 열린우리당 의원도 검시제도 개선 법안을 국회에 발의했지만 검찰·경찰·국과수·법무부 등 부처간 주도권 다툼으로 17대 국회 내내 표류하다 결국 폐기됐다. 18대 때는 유선호 열린우리당 의원이 총리 직속의 검시위원회 설치 등을 뼈대로 한 법률안을 발의했지만 역시나 제정되지 못했다.
유년시절 김성재. 영어·일어를 모국어처럼 구사했던 그의 꿈은 치과의사였다. 연예인일 때도 공부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 학업을 이어갔다면 그의 삶은 달랐을까. 유족 제공
제도 도입이 연거푸 좌절된 것은 예산과 인력 때문이다. 법의학 자체가 비인기 분야인데다 직급과 처우가 낮아 후학 양성이 어렵고 이로 인해 인력풀도 협소한 점이 원인으로 꼽힌다. 검시관 양성을 위한 예산지원은 당장 눈에 보이는 치적이 아니다. 제도의 피해를 본 이들도 모두 죽은 자들이라는 사정도 제도 개선을 더디게 만든다. 김성재 사건이 오늘날 다시 일어나더라도, 영구미제가 될 가능성이 없다고 자신할 수 있을까.
검시제도와 같은 구조적 문제점과 함께 법원 판결에 대해서도 다양한 의견이 제시되고 있다. 26년이 지났지만 김성재 변사사건은 여전히 대중과 법원 사이의 괴리가 가장 심한 판결 중 하나다. 사람들의 분노와 의혹에는 과연 이유가 없는 것일까.
당시 판결은 사망시각추정, 치사량, 전문가 증언 배척, 살해동기 해석 등에서 따져볼 대목이 적잖다. 한 법률가의 표현처럼 모든 것은 비판을 통해 진화한다. 법원 판결도 예외는 아니다. 이런 점에서 비춰보면 항소심 판결은 여전히 논란거리다. △비전문가인 변호인의 실험 등을 받아들여 법의학자들이 양측성 시반을 근거로 추정한 사망시각을 배척한 점 △변호인 쪽 법의학자의 감정증언을 채택하며 검찰 쪽 법의학자들의 감정증언을 통째로 배척한 점 △개를 대상으로 한 실험결과를 인간에게 곧바로 적용해 치사량이 아니라고 한 점 △알코올처럼 약물 반응은 사람마다 다른 점 △졸레틸 한 병은 치사량이 아니라는 판단이 설득력이 있으려면 비슷한 시기에 졸레틸을 구입한 사람이 K 말고도 김성재 주변에 여럿인데 그 중 K가 구입한 약물의 함량이 치사량에 부족했어야 한다는 점 △소변에서 나온 마그네슘염을 몸 속에 있는 물질로 본 점 △피부에서 검출된 마그네슘염은 논의조차 되지 않은 점 등을 두고 비판이 제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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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 때 가족과 유원지에 놀러간 김성재(오른쪽). 어머니 육미승씨는 1969년 이화여대를 졸업해 상업은행에 취업한 엘리트였다. 유족 제공
결과적으로 수사기관의 초동수사 실패로 영구미제가 됐다는 점에서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소송을 제기할 수 있었지만, 유족들은 이 방법조차 알지 못했다. 그 사이 국가배상청구권 소멸시효(5년)는 이미 지나가 버렸다. 지난해 여자친구 쪽이 ‘김성재 사인은 약물중독사’라는 취지로 보도자료를 내 사자명예훼손 논란이 일었지만, 형편이 어려운 유족은 법적 대응의 여력조차 없다. 아들은 그렇게 갔고 세월은 오늘도 무심히 흐른다.
<끝>
오승훈 기자
vino@hani.co.kr
▶각주
1. 정희선, <보이지 않는 진실을 보는 사람들>, 랜덤하우스코리아, 2015
2. 하태훈, ‘현행 검시제도의 문제점과 개선방안’, <형사정책>, 한국형사정책학회, 2006
3. <동아일보> 2011년 8월29일치
4. 김태우, ‘검시제도 개선방안’, <법제논단>, 2013.2
5. 변사사건 처리규칙은 2019년 3월에야 경찰청 훈령으로 제정됐다.
6. 항소심 판결에 대한 대표적 비판은 도진기 전 서울북부지법 부장판사의 “듀스 김성재 의문의 타살, 법원판결 과연 최선이었나”, <월간중앙>, 2017년 2월호를 참고할 것
▶기획 의도
1995년 11월20일 새벽, 서울 서대문구 홍은동 스위스그랜드호텔에서 인기 댄스그룹 ‘듀스’의 전 멤버 김성재(23)가 숨진 채 발견됐다. 듀스 해체 이후 성공적인 솔로 데뷔 무대를 마친 다음날이었다.
1993년 4월 노래 <나를 돌아봐>로 데뷔한 듀스는 ‘서태지와 아이들’과 함께 1990년대 가요계의 아이콘이었다. 서태지와 아이들의 음악적 바탕이 록이었다면, 김성재와 이현도로 이뤄진 듀스는 뉴잭스윙과 솔 등을 기반으로 흑인음악을 일관되게 추구한 뮤지션이었다. 듀스를 한국 힙합의 원조라고 하는 이유다.
그가 떠난 지 올해로 26년이 됐다. 그 무심한 세월 동안, 김성재의 죽음을 둘러싼 의혹은 여전히 해소되지 못하고 있다. 김성재 변사사건이 대한민국 연예계 최대 미제사건으로 불리는 이유다.
김성재의 유족은 오늘도 고통 속에 살고 있다. 가장 격이던 큰아들의 느닷없는 죽음으로 가족의 삶은 나락으로 떨어졌다. 범인이 누구인지, 죽음의 이유가 무엇인지 알지 못하는 탓에 온전히 망자를 떠나보낼 수조차 없었다. 한국 사회는 이런 비극이 반복되지 않도록 당시 수사에 문제점은 없었는지 되돌아봐야 한다. 특히 김성재 변사사건은 경찰 초동수사의 중요성을 일깨우는 대표적 사례다. 사건을 미궁 속으로 빠뜨린 당시 검시제도의 문제점은 오늘날에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전문가 증언을 배척하거나 채택하는 등의 문제 또한 유효하다. 모두 김성재 변사사건으로 짚어봐야 할 공익적 가치다.
지난 1년6개월여 동안, 그날의 진실을 알기 위해 수사·공판 기록과 당시 신문·잡지 기사 등 3천 쪽 넘는 관련 문서를 검토하고 당시 수사기관·법원 관계자들을 수소문해 인터뷰했다. 유족과 지인들을 만났고 법의학자와 의사들의 조언도 구했다. 살인 용의자로 지목돼 1심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가 대법원에서 최종 무죄가 확정된 김성재 전 여자친구 쪽 변호인들도 수차례 접촉했다. 이제 26년 전 한국 사회를 충격에 빠뜨린 죽음의 진상을 10차례에 걸쳐 들여다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