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5년 여성발전기본법(현재의 양성평등기본법)에서 ‘직장 내 성희롱’이라는 법적 개념이 처음 정립된 뒤 27년이 지났다. 예방교육 의무화, 사업주의 처벌 규정 도입 등이 이어졌으나 일터의 현실은 크게 변하지 않았다. 여전히 공공기관이나 대기업조차 성희롱 사건이 발생했을 때 피해자를 위한 안전망과 보호조치를 제때 제대로 가동하지 않고 있다. 피해자들은 신고 뒤 사건 무마 시도나 2차 피해에 맞닥뜨린다. 가해자 대신 자신이 일터와 업무에서 배제될까 두려움을 안은 채 신고를 한다. 개별 사건마다 특수성이 있지만, 피해자의 이같은 우려는 공통이다. <한겨레>는 공공기관, 대기업에서 일어난 직장 내 성희롱 사건을 조명하고, 사건 처리 과정서 반복되고 있는 2차 피해 등의 실태를 3회에 걸쳐 짚어본다.
① 한국건강가정진흥원, 성희롱 사건 2차 피해 의혹
②“상사도, 인사팀도, 고용노동부도 믿지 마세요”
③ 왜 가해자 아닌 피해자가 내몰려야 하나요?
#2016년 여름. 면세점 내 화물 엘리베이터에 가해자와 단둘이 탑승했다. 문이 열려 내리려 하는데 갑자기 가해자가 “내려”라고 말하며 엉덩이를 손등으로 툭툭 쳤다. ‘설마 잘못 친 거겠지’ 열심히 합리화하고 털어냈다.
#2016년 11월. 면세점 내 카페테리아에서 간담회에 참석했다. 가해자는 내 왼쪽에 앉았다. 미팅 중간쯤 허벅지 쪽 느낌이 이상해 내려다보니 가해자의 오른쪽 손날이 내 왼쪽 허벅지에 붙어있었다. …가해자가 손을 올려댈 때마다 계속해서 손날로 쳐냈다. 현실 같지 않았다. 아무도 내 상황을 눈치채 주지 않았다.
#2016년 12월. 가해자가 지나가길 기다리는데 갑자기 손이 잡혔다. 제발 (성희롱이) 아니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3초만 더 세어보자’고 스스로를 타일렀다. 3초가 지나고, 지나고 또 지났다. 가해자의 손을 쳐냈다. …어느새 돌아온 가해자가 마치 확인시켜주듯 양손으로 양 허리를 잡아 올렸다. 머리가 암전이 됐다. 귀에서 삐 소리가 났다. 내 인생이 망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숨이 쉬어지지 않았다.
20대 여성 이아무개씨가 지난해 정신과 폐쇄병동에 입원했을 때 주치의 권유로 썼던 글의 일부다. 그는 2015년 12월 입사해 2020년 6월까지 햇수로 5년간 호텔신라에서 일했다. 이씨는 그 5년을 “성희롱을 피하느라 온 신경을 곤두세웠던 시간”이었다고 했다. 입사 2년차인 2016년 같은 팀 상사 ㄱ씨로부터 세차례 강제추행을 당했다. 이 사실을 상부에 보고했으나 사내 조사나 징계위원회 개최는 이뤄지지 않았다. 가해자가 아닌 ‘피해자’의 사무실 자리와 직무를 바꿔준 게 회사가 취한 ‘분리조치’였다. 이후에도 가해자를 주기적으로 마주치던 이씨는 결국 2019년 2월 인사팀에 직접 피해를 신고했다. 징계위가 열렸고 가해자는 정직 1개월 처분을 받았다. 가해자가 복귀하자 두 사람은 또다시 같은 부서에서 일했다. 견디다 못한 피해자는 결국 휴직했고 복귀 이후 다른 부서로 이동했다. 강제추행과 사내 2차 가해로 외상후스트레스장애(PTSD) 진단을 받은 이씨는 결국 퇴사해 정신과 폐쇄병동에 두 달간 입원했다.
지난 4일 만난 이씨는 “(직장 내 성폭력) 피해자가 질 수밖에 없도록 짜인 판에서 죽지 않고 버티기 너무 힘들었다”면서도 “이대로 묻고 가기에는 나와 같은 환경에서 일하고 있고, 일하게 될 여성들이 마음에 걸려 5년간 겪은 일을 알리기로 했다”고 말했다. 인터뷰 일주일만인 지난 10일 있었던 1심에서 재판부는 강제추행 혐의로 ㄱ씨에게 벌금 700만원(성폭력치료프로그램 40시간 이수)을 선고했다. 이씨가 고소(2020년 6월)한 지 1년6개월이 훨씬 넘었다. <한겨레>는 1심 판결 및 고용노동부 진정 결과, 피해자 진단서 등 수사·행정·의료기관의 공식조사 내용과 피해자 대면 인터뷰를 토대로 지난 5년을 재구성했다.
■ “실수했다 쳐라” 상부의 은폐… 피해자만 ‘부서 뺑뺑이’
3차례 강제추행 이후 2017년 1월 이씨는 ㄴ그룹장과의 면담에서 피해 사실을 상세히 털어놨다. 일주일 뒤 돌아온 말은 이랬다. “내가 (가해자에게) 강하게 경고했으니, 너도 아무 일 없던 것처럼 잘 지내봐. 사람이니까 한 번 실수했다 치고.” 6개월 뒤 견디다 못한 이씨는 다시 ㄴ그룹장에게 분리조치를 요구하는 메시지를 보냈다. “버텨보려 했지만 제가 왜 저 사람과 밥을 먹고 말을 해야 하는지… 두 달 넘게 체하기만 합니다.” 회사는 두 가지 선택지를 제시했다. 가해자의 근무지를 인천지점으로 옮기거나(두 사람은 서울지점에서 함께 근무했다), 피해자가 비서로 직무를 바꾸거나. “가해자가 근무지를 옮겨도 전화·이메일로 수시로 연락할 수밖에 없는 구조였어요. 분리가 절실했던 터라 울며 겨자 먹기로 비서직으로 옮겼어요. 비서로 일하면 근무지도 인천으로 바뀌고, 가해자와 상대적으로 덜 부딪힐 거라 생각했어요.”
피해자가 근무지와 직무 모두 바꿨지만 ‘분리’는 이뤄지지 않았다. 여전히 같은 팀 소속이어서 보고·행사·회식자리에서 불시에 마주치곤 했다. 급기야 2018년 초 서울지점에서 근무하던 가해자는 피해자가 일하는 인천으로 근무지를 옮긴다. 호텔신라가 인천공항 제2여객터미널 면세점 입찰을 따내면서 이뤄진 발령이다. 두 사람은 회식, 행사, 각종 교육일정에서 마주쳤다.
“제게 묻지도 않고 가해자를 발령냈어요. …하루는 임직원이 다 모여 성희롱 예방교육을 듣는데 인사팀이 ‘우리 회사는 직장 내 성희롱이 발생하면 가·피해자를 즉시 분리합니다’라고 자신 있게 말하더라고요. 정작 저는 이 교육일정이 가해자와 겹칠까 필사적으로 스케줄을 조정했는데요.”
꾹꾹 눌러왔던 울분은 이듬해인 2019년 2월 터졌다. 비서 업무 중 하나인 ‘생일자 업무’를 하다가 명단에 적힌 가해자 이름을 봤다. 가해자의 케이크와 상품권을 준비하던 이씨는 빈 회의실에서 숨죽여 울었다. 그리고 인사팀에 사건을 ‘직보’하기로 결심한다. “보고체계가 중요한 회사에서 직속 상사를 거치지 않고 인사팀에 바로 신고하면 불이익을 받을까 상사(ㄴ그룹장)에게 신고를 했었는데 이미 한번 묵살됐잖아요. 더는 참을 수 없었어요.”
이후 회사는 징계위원회를 소집해 가해자에게 정직 1개월 징계를 내린다. 그러면서 가해자가 한달 후 돌아와도 “받아줄” 다른 부서가 없으니, 분리되고 싶다면 피해자인 이씨가 부서를 옮기는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이씨는 “왜 피해자가 가해자 사정까지 고려해야 하느냐, 나는 더는 부서 옮기고 싶지 않다”고 거부 의사를 명확히 밝혔으나, 사측의 회유와 설득에 다시 한 번 부서를 옮긴다.
“부서를 옮기면 새 업무에 적응해야 하고, 무엇보다 소문에 시달려야 해요. ‘왜 옮겼니’ ‘나는 알고 있어’ ‘가해자는 억울하다더라’같은 말들에 다시 노출되는 거죠. 직장 내 성폭력 사건에서 보통 가해자는 상사잖아요. 가해자의 인적 네트워크가 피해자보다 넓기에 소문이 가해자에게 유리하게 날 수밖에 없어요. 내가 마음을 아무리 다스려도 소문은 끊이지 않고 들려오고 ‘그 일’은 계속 수면 위로 떠올랐어요.”
■ 호텔신라 “징계위 결과 보려면 영장 가져와라”
2020년 6월 피해자는 가해자를 형사 고소하고 8월 퇴사했다. 비닐봉지가 필수품이었을 정도로 시도 때도 없이 찾아오는 과호흡, 출근길 자살 충동을 억누르기 어려웠다. 퇴사 후 실업급여를 받기 위해 고용센터를 찾았을 때 이씨는 또 한 번 깊게 절망했다. 센터는 이씨가 제출한 ‘이직 사실 확인서’를 인정할 수 없다고 했다. ‘직장 내 성희롱 피해 신고 접수 및 처분 사실을 확인함’이라고 적혔고, 회사 직인까지 찍혔는데도 그랬다. 고용센터 담당자는 징계위 결과가 담긴 공식 문서를 제출하든지 노동청에 진정을 제기해야 한다고 했다.
사측의 대응은 더 납득할 수 없었다. 자신의 신고로 열린 징계위인데도 그 결과가 담긴 문서를 줄 수 없다며 “경찰 수사 영장이 있어야 반출 가능하다”고 했다. 결국 경찰이 법원에 영장을 신청해 징계 결과 문서를 확보했으나 바로 수사기관으로 넘어갔고, 이씨는 1심 선고가 난 현재까지도 해당 서류를 보지 못했다.
■ “가해자 갈 곳 없어 피해자 보냈다”는 게 문제없다는 고용노동부
이씨는 고용노동부에 진정도 제기했다. 남녀평등고용평등과 일·가정 양립 지원에 관한 법률(남녀고용평등법)은 직장 내 성희롱 발생 시 사업주가 △“지체 없이” 조사해야 하고 △피해자 의사에 반하는 조치를 취해선 안 되며 △피해자를 향한 2차 가해를 행하거나 방치하는 등 불리한 처우를 해서는 안 된다고 규정하고 있다. 신고자의 의사에 반하는 불리한 처우도 해선 안 된다. ㄱ씨의 3차례 강제추행 뒤 호텔신라는 2년 뒤에야 조사했고, 피해자와 가해자 분리가 이뤄지지 않았고, 피해자만 원치 않는 부서 이동을 당했다.
그런데도 고용노동부는 “법 위반 사항이 없다”는 회신을 보내왔다. 회신에는 △행위자(가해자)의 부서 이동이 불가하였다는 사측 주장은 합리적 이유가 있는 것으로 보이며 △피해자의 의사를 반영해 전환 배치가 이뤄졌으므로 강요에 의한 것으로 보기 어렵다고 적혀 있었다. 사측은 가해자의 연배나 직급을 고려했을 때 부서 이동이 불가능하다는 뜻을 고수해왔는데, 사측 사정만 참작한 셈이다.
이와 관련 <한겨레>는 해당 사건을 맡았던 서울고용노동청 쪽에 판단의 근거 등을 묻자 소속 ㄷ근로감독관은 “관련 법 조항은 없다. 다만 당시 상황을 봤을 때 가해자가 옮길 부서가 마땅치 않은 건 사실로 보였고, (이런 여건을 무시한 채) 사업주를 처벌하는 것까지는 어려워 보였다”고 했다. 가·피해자를 분리하지 않고, 피해자 의사에 반해 전환 배치가 이뤄졌는데 이를 왜 ‘불리한 처우’로 보지 않았냐는 질문에는 “사업주가 피해자에게 일부러 불이익을 주기 위해 그런 게 아니라, 회사 사정이 안 됐던 것으로 봤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씨가 겪은 정신·신체적 피해보다 사업주의 사정을 우선 고려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는 발언이다.
호텔신라 쪽은 “절대 벌어져서는 안 되는 일이었고, 부끄럽게 생각한다. 다만 당시 가해자와 피해자의 첫 신고를 소홀하게 여겼던 ㄴ그룹장 등 4명 모두를 징계했다. 징계위원회 결과 문서를 피해자에게 공개하지 않은 이유는 해당 문서에 개인정보가 다수 담겨있고 향후 새로운 법률 분쟁을 야기할 수 있어서였다. 징계위 문서는 수사기관의 요청이 있어야만 공개한다는 게 회사 원칙”이라고 했다.
이씨는 귀향해 가족 곁에 머물고 있다. 여전히 매주 정신과 상담도 받는다. “허벅지 한 번 만진 거 가지고 왜 자살까지 생각해? 그렇게 생각하는 분도 있을 거예요. 그런데 한번 당하면, 다음엔 언제, 어디서, 어딜 만질까 봐 초긴장 상태로 일할 수밖에 없어요. 가만히 있다가 범행을 당한 건 나인데 자꾸 부서를 전전해야 하고, 갖은 소문에 시달려야 해요. 다른 피해자에게 하고 싶은 말이요? (직장 내 성범죄) 발생하면 바로 112에 신고하세요. 현행범으로 잡히면 최소한 없던 일이 되지는 않을 테니까요. 상사도, 인사팀도, 고용노동부도 믿지 마세요.”
최윤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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