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스 청소노동자 홍혜숙씨가 6일 오후 서울 관악구 차고지 버스 안에서 ‘중년 여성 향한 직장 내 성폭력 근절하자’라고 적힌 손팻믈을 들고 있다. 박종식 기자 anaki@hani.co.kr
‘젊은 여성들이 참 딱하다’고 생각했다. ‘나도 고발한다’(#미투)라는 목소리가 터져 나오던 2018년의 일이었다. 미투 피해자로 언론에 소개된 이들은 주로 30대 이하 여성이었다. 당시 40대 중반을 향해가던 홍혜숙(48)씨는 관련 보도를 접하며 안타깝다는 생각만 했을 뿐, 자신이 그 피해자가 될 거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법무부 간부에게 강제추행을 당했다’며 한국 사회 미투 운동을 촉발한 서지현 당시 검사가 또래였지만, 그가 고발한 일 역시, 30대 때의 일이었다.
홍씨의 생각이 무참히 깨지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2020년 8월, 서울지역 시내버스 운수업체인 ㅂ운수에 버스 청소노동자로 입사한 뒤, 그는 상사로부터 직장 내 성희롱을 당했다. 해당 상사는 홍씨가 소속된 정비팀 관리자인 ㄱ반장이었다. 그는 홍씨에게 ‘행실이 왜 그러냐’며 남자 운전기사들과 대화하지 말라고 하거나, 홍씨가 여름철 출퇴근용으로 반바지를 입으면 “각선미 자랑하냐. 사람들이 쳐다보니 반바지는 입지 말라”고 했다. 최근 <한겨레>와 만난 홍씨는 “사람들이 반장님과 무슨 사이냐고 물을 정도로 ㄱ반장이 나를 따라다녔다”고 말했다. 홍씨는 정비팀 8명 가운데 유일한 여성이다.
ㄱ반장의 통제는 성적 괴롭힘으로 이어졌다. 홍씨는 “ㄱ반장이 ‘대시하면 튕기지 말고 만나달라’고 하거나 ‘남자는 가끔 (아내가 아닌) 다른 여자도 만나야 한다’고 얘기했다. 또 ‘좋은 향기가 난다’며 머리 냄새를 킁킁 맡고 가기도 했다”고 말했다. 특히 ㄱ반장이 음료수를 건넬 때마다, 슬쩍 몸을 더듬었다고 홍씨는 밝혔다. 홍씨는 “그가 음료수를 주면서 ‘세상에 공짜는 없다’는 말을 덧붙였는데 마치 성적 요구를 하는 것 같았다”고 했다.
ㄱ반장의 성적 괴롭힘을 겪은 건 홍씨만이 아니다. 홍씨와 같은 지점에서 버스 내부를 방역하는 방역원으로 일한 박아무개(48)씨도 비슷한 경험을 털어놨다. 박씨는 “하루는 ㄱ반장이 ‘속옷은 입고 다니는 거냐. 거기(신체 일부)가 다 비친다고 하던데?’라고 말하면서 내 가슴 쪽을 뚫어지게 쳐다봤다. 정말 비참했다”고 했다.
홍씨나 박씨처럼 직장 내 성폭력에 노출된 중년 여성의 현실은 통계로도 확인할 수 있다. 서울여성노동자회가 지난해 8월 발표한 ‘2021년 일하는 여성의 권리찾기 이야기’에 따르면, 직장 내 성희롱 상담 184건 가운데 40~50대 여성의 상담 건수는 26.1%였다. 20~30대 비율이 71.1%로 압도적으로 높지만, 상담 여성 10명 가운데 2~3명꼴은 중년 여성인 셈이다. 7일 우원식 더불어민주당 의원실을 통해 확보한 고용노동부 자료를 보면, 지난 5년(2018년~2022년 10월)간 직장 내 성폭력에 따른 여성 노동자의 산재 신청 185건 가운데 40~50대 신청 건수는 34.5%(64건)였다.
버스 청소노동자 홍혜숙씨가 6일 오후 서울 관악구 차고지 앞에 서있다. 박종식 기자 anaki@hani.co.kr
전문가들은 직장 내에서 성폭력 피해를 입는 중년 여성의 수가 통계로 드러난 것보다 더욱 많을 것으로 추정한다. 가부장제에 장기간 노출된 중년 여성일수록, 성적 불쾌감을 느끼면서도 ‘참는 게 당연하다’고 느끼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실제로 지난달 28일 너머서울 젠더팀이 발표한 ‘5060 지하철 청소노동자 성폭력 실태조사’를 보면, ‘성적 괴롭힘을 당한 적 있는가’라는 물음에 응답자(90명)의 86.6%(78명)가 ‘그렇다’라고 답했다. 하지만 이들 가운데 ‘직접적으로 불쾌함을 표현했다’는 응답은 5명(6.4%)에 불과했다.
여미애 너머서울 젠더팀 공동팀장은 “가부장제와 여성혐오 문화 속에서 자란 중년 여성들은 성희롱 등을 범죄로 인식하기 어렵고, 문제를 공론화했을 때 지지받지 못할 거라고 생각한다”고 설명했다.
홍씨도 1년여 동안 피해가 지속된 뒤에야 이를 공론화했다. 그러면서도 “사람들이 ‘반장 혼자 그랬겠냐’고 할까 봐, 아들이 ‘엄마가 행실을 제대로 못 한 것 아니냐’고 할까 봐 두려웠다”고 홍씨는 말했다. 한 지방정부 산하 돌봄기관에서 장애인활동지원사로 일하는 김아무개(52)씨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돌봄 대상자로부터 특정 신체 부위 접촉을 요구받는 등의 성폭력 피해를 입었지만, 1년6개월여 동안 참으며 가해자를 돌봤다. 김씨는 “우리 세대는 ‘여자는 참아야 한다’고 배우며 컸다. 평생을 그렇게 살다 보니 이 정도는 참아야 한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중년 여성을 ‘무성애적 존재’로 바라보는 사회적 시선도 피해자의 침묵에 영향을 끼친다. 김씨는 “사회는 중년 여성을 여성으로 인식하지 않는다. ‘다 늙어서 유난 떠냐’는 반응이 돌아올까 봐 그냥 버텼다”고 했다. 김다슬 한국여성의전화 활동가는 “성폭력은 성적 매력 있는 젊은 여성에게만 일어나는 일이라는 사회적 편견 탓에 중년 여성 피해자들을 망설이게 만든다”고 짚었다.
홍씨는 지난해 12월 경찰서를 찾았지만 고소장을 제출하지 못하고 발길을 돌렸다. 그는 “민원실에서 더 확실한 증거를 모아오라고 했다”며 “접수 단계에서부터 막히니 절망적이었다. 나이 든 여자라 (피해 사실을) 안 믿는 건가 싶었다”고 말했다. 성폭력 피해자 변호를 주로 맡아온 서혜진 변호사(한국여성변호사회 인권이사)는 “수사기관을 찾은 중년 여성 피해자들은 자신의 피해를 납득시키기 위해 젊은 여성 피해자보다 훨씬 더 많은 설명을 해야 한다. 수사기관조차 ‘젊은 여성도 아닌데 이 정도는 괜찮지 않나’라는 인식을 갖고 있다”고 지적했다.
홍씨는 지난해 12월 고용노동부 서울관악지청에 ㄱ반장을 직장 내 성희롱과 직장 내 괴롭힘으로 신고했다. 두달 이상 차일피일 조사를 미루던 ㅂ운수는 근로감독관이 ‘자체 조사를 하라’고 권고한 뒤에야 조사에 나섰다. ㅂ운수 관계자는 <한겨레>에 “ㄱ반장과 홍씨를 분리 조처했다”며 “진상 규명이 돼야 ㄱ반장의 직위해제 등의 절차를 밟을 수 있다”고 밝혔다. 고용노동부 관계자는 “지난 2일 ㅂ운수로부터 자체 조사 보고서가 제출돼 검토 중”이라고 말했다.
홍씨는 현재 수면제를 먹어야 잠을 잔다. 그마저도 2시간 정도밖에 못 잔다. 아들과 당뇨·천식을 앓고 있는 노모와 함께 살려면 홍씨는 어떻게든 일을 해야만 한다. 홍씨는 말했다. “가끔 숨이 안 쉬어져요. 내가 당해보니까, 젊은 여성들이 왜 얼굴을 공개하면서까지 피해 사실을 알렸는지 알겠더라고요. 그 사람들도 ‘살려고’ 그랬겠구나, 싶어요.”
박고은 기자
euni@hani.co.kr, 오세진 기자
5sjin@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