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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여성

“친구들의 연대가 살게 해, 성폭력 이길 역량도 우리 안에 있어요”

등록 2023-03-21 10:00수정 2023-03-21 11:26

미투 5년, 지금은… (하) 회복하는 피해자
여기서 멈출 순 없어요, 제겐 제 삶이 있으니까요
※ 이미지를 누르면 크게 볼 수 있습니다.

성폭행 피해뒤 무고로 법정 선 30대
피해 직후 가해자와 일상 대화가 족쇄
외상후 스트레스·공황장애 시달려
3년 법정다툼 끝 무죄 판결 받아내
새로운 회사 입사 뒤 친구와 여행도

평범한 하루를 되찾기까지, 3년 가까운 시간이 필요했다. 30대 장민주(가명)씨는 최근 들어 비로소 소소한 일상을 마주하고 있다. 친구들과 오래된 맛집에 가거나, 실내 암벽등반(클라이밍)을 하는 등 일상을 찾아가고 있다. “이제 조금씩 다르게 사는 길이 보이기 시작했어요.” 힘겨운 시간을 버텨낸 장씨가 말했다.

그는 성폭력 피해자다. 가해자는 회사 상사였다. 2019년 성폭력 피해를 본 장씨는 가해자를 고소했다. 하지만 피고인으로 법정에 선 것은 가해자가 아니라 장씨였다. 검찰은 성폭력 피해 직후 장씨가 가해자와 일상적인 대화를 했다는 등의 이유를 들어 가해자를 무혐의 처분했다. 장씨는 무고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다. 장씨는 업무에서 배제됐고, 결국 회사를 떠나야만 했다.

장씨가 그나마 세상에 대한 희망의 끈을 놓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법원 판단 때문이었다. 법원은 장씨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가해자가 합의한 상태에서 성관계를 시도했다는 증거로 제출한 녹음파일 일부가 삭제된 것에 재판부는 주목했다. 가해자 진술이 의심스럽다고 본 것이다. 장씨는 2022년 무죄 확정 판결을 받았다.

이 과정에서 장씨는 몸과 맘에 큰 상처를 입었다.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와 수면장애, 공황장애, 원인을 알 수 없는 피부병 등에 시달렸다. 긴 법정 다툼과 억울함에 삶을 포기하고 싶은 적도 여러번이었다. 그럴 때마다 버틸 수 있었던 힘은 친구들의 존재였다. “친구들은 저의 어떤 이야기도 다 들어줬어요. 그들의 지지와 연대가 없었다면 버티기 쉽지 않았을 거예요.” 친구 이야기를 할 때, 장씨 얼굴에는 미소가 번졌다.

20대 고은주(가명)씨도 주변의 지지 덕에 일상을 살아갈 힘을 얻을 수 있었다. 고씨는 교제 폭력에 시달렸다. 가해자는 고씨 신체를 불법촬영하고, 이를 지인들에게 유포하기도 했다. 고소를 망설이던 고씨를 독려한 건 친구들이었다. 친구들은 “네가 잘못한 것은 없다”며 고씨를 설득했다. 삶의 끈을 놓을 뻔한 고씨에게 “같이 회복하자. 우리가 돕겠다”고 한 것도 친구들이었다. 고씨는 “친구들이 없었다면 지금의 나는 없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다른 피해자들의 존재도 힘이 됐다. “불구덩이 속에서 물동이 하나로 불을 조금씩 끄며 길을 낸 다른 피해 생존자들에게서 많은 용기를 얻었어요. 저도 다른 피해자들에게 그런 선례가 되어야겠다고 생각하면서 버텼죠.”

교제 폭력에 시달린 20대
신체 불법 촬영 당한 뒤 유포 피해
친구들이 “네 잘못은 없다”고 설득
가해자 처벌이 피해 회복의 시작점
차 마시고 책 읽고 해질녘 산책 나서

가해자 처벌은 피해 회복의 시작점이었다. 고씨는 가해자가 지난해 징역형을 확정받고 나서야 차 마시기, 책 읽기, 외국어 공부, 소설 강의 수강, 해질녘 산책 등의 일상생활을 할 수 있게 됐다.

물론, 피해자들이 피해 이전 상황으로 완전히 돌아가기란 쉽지 않다. 여성가족부의 2022년 성폭력 안전실태조사를 보면, 성폭력 피해 이후 일상생활의 변화를 묻는 항목(중복 응답)에 피해 여성들은 ‘다른 사람을 못 믿게 됐다’(46.2%), ‘안전에 대한 두려움이 생겼다’(33.9%),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것에 어려움을 느끼게 됐다’(31.0%)고 답했다. 장씨와 고씨도 모르는 사람에 대한 경계가 심해졌고, 가해자와 동일한 성별에 대한 반감도 생겼다고 했다.

하지만 장씨와 고씨는 세상에 맞서 자신의 삶을 다시 세우고 있었다. 고씨는 스트레스를 받으면 여전히 과호흡 증상이 나타나거나 몸이 차가워지지만, 앞으로의 모습을 그려보려고 노력한다. “지난 2년 동안 가해자를 처벌하는 것만이 제 목표였는데, 이제는 저도 행복해지려고 해요. 제가 행복해야 저 때문에 힘든 시간을 보낸 친구들에게도 좋은 기운을 줄 수 있으니까요.”

장씨는 무고 혐의에 대해 무죄를 확정받은 직후, 새로운 회사에 입사했다. 그는 좋은 팀원도 만났다고 했다. 자신에게 업무 배제 등의 불이익 처우를 한 이전 회사 관계자들과 가해자를 상대로는 현재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벌이고 있다. “더는 제가 피고인의 자리에 서 있지 않으니까, 지금은 미래를 계획할 수 있어요. 친구들이랑 여행 계획도 세울 수 있고요.”

어렵게 이야기를 털어놓은 장씨와 고씨는 다른 성폭력 피해자들에게 힘이 되고 싶다고 했다. 서로 다른 날짜, 다른 장소에서 두 사람을 인터뷰했지만, 이들이 전하고 싶은 말은 결국 하나였다. “살아내면, 힘들었던 날을 상쇄할 수 있을 만큼 즐거운 일을 일궈낼 힘이 생겨요. 우리에겐 시련을 이겨낼 역량이 충분히 있거든요.”(고씨) “힘들어도 버티셨으면, 살아내셨으면 좋겠어요. (피해자들이) 안 무너졌으면 좋겠어요.”(장씨) 이들이 피해자에게 전한 말은 지난 시간 자신을 버티게 한 말이기도 했다. ‘살아낸’ 이들의 일상 속으로 조금씩 온기가 스미고 있었다. <끝>

오세진 기자 5sji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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