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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여성

‘스튜디오 촬영’ 또다른 피해자 23살 전직 모델의 고백

등록 2018-06-06 11:55수정 2018-06-07 13:43

미성년자 강압촬영 사진가에게 당한 피해 증언
당시 수사경찰, 여친 폴더에 저장돼 연락 안해
피해자 이메일서 다른 사진 몰래 빼내가기도

전직 누드모델인 23살 ㄱ씨는 3년 전부터 아마추어 누드모델을 하다가 에이전시에 소속된 직업 누드모델이 되었습니다. ㄱ씨는 누드모델이라는 직업에 애착과 자긍심을 가지고 경력을 쌓았습니다. 그런데 그 자긍심이 꺾이는 일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일부 사진가들이 강압적으로 노출을 요구했고, 이에 따라 법적 분쟁도 겪어야 했습니다. 그런 ㄱ씨가 오랜 고민 끝에 <한겨레>와 만났습니다. 그는 “다른 피해자들이 나오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에 떠올리기 싫은 기억을 증언하러 인터뷰에 나왔다고 했습니다. 그의 이야기와 <한겨레> 취재를 묶어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찬찬히 살펴보겠습니다.

ㄱ씨는 친구 소개로 20살 때 처음 세미 누드 촬영을 하게 됐습니다. ㄱ씨에게 이 촬영은 “인생의 터닝포인트”였다고 합니다. 세미 누드 촬영에 나서기 전까지 ㄱ씨는 자신이 “칙칙하고 어두운 사람”, “다른 사람과 잘 어울리지 못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자신감이 없었고 나 자신을 너무 싫어하던 사람”이기도 했다고 합니다. 자기혐오 감정에 휩싸여 폐쇄적인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사진 속의 나’는 달랐습니다. 다른 사람이 렌즈로 담아낸 자신의 모습을 보고 ㄱ씨는 “사진 속의 나는 혐오스러운 사람이 아니었고, 더 이상 내가 싫어할 만한 사람이 아니었다”고 했습니다. 이전까지는 사람과 마주 보고 대화하기도 힘들었던 ㄱ씨는 렌즈에 담긴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자기혐오가 옅어지는 걸 느꼈습니다. 단둘이 마주 보는 독대 자리도 이젠 두렵지 않았고, 다른 사람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대화를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전업 누드모델을 자신의 직업으로 삼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된 까닭이었습니다.

ㄱ씨는 누드 작품의 피사체가 되고자 하는 자신의 욕망 내지는 욕구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의 편견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이해도 한다고 합니다. “최근에 불거진 일련의 사건에서 피해자를 욕하는 사람들이 많아요. 웹상에서 보이는 이런 2차 가해자들의 대부분이 피해를 당하고도 다시 사진을 찍은 모델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더군요. 각자가 살아온 인생이 다르듯이 욕망도 다르기 때문이라는 점을 알았으면 좋겠어요.” ㄱ씨의 말입니다.

처음 시작하는 모델들이 대부분 그렇듯 ㄱ씨도 모델 에이전시에 들어가기 전에는 개인 작업으로 포트폴리오를 쌓았습니다. 사진가 개인에게 모델료를 받고 촬영에 응한 적도 있고, 사진가의 작품이 마음에 들어서 먼저 무보수로 작업을 해보자고 연락했던 적도 있었습니다. ㄱ씨 커리어 초기에 작업을 진행한 사진가 ㄴ씨는 사진이 마음에 들어 ㄱ씨가 먼저 연락했던 작가 가운데 한 명이었습니다. ㄴ씨는 당시 사진 동호회 내에서도 특이한 사진 기법으로 사진을 찍는 것으로 유명했고, ㄱ씨는 ㄴ씨의 그 사진들이 마음에 들었습니다. 아는 작가 중에 그런 촬영을 하는 사람은 ㄴ씨가 유일했습니다.

하지만 곧 ㄴ씨와의 촬영은 악몽이 됐습니다. ㄴ씨는 사진을 마음에 들어했던 ㄱ씨의 마음을 이용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꽤 전형적인데, 당시엔 바로 눈치채지 못했습니다. 의상을 입고 테스트로 진행한 첫 촬영에서는 아무 문제가 없었습니다. 2015년 5월쯤 서울 강북에 있는 어느 아파트에서 사진작가가 어머니와 함께 사는 집에서 테스트 컷을 찍었습니다. 이 사진들은 꽤 마음에 들었습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일이 터졌습니다. 세미 누드 촬영으로 합의하고 같은 아파트로 작업하러 간 날이었습니다. ㄴ씨의 어머니가 촬영 도중 집에서 나갔습니다. 그러자 ㄴ씨는 노출 수위를 높이면서 포르노 수준의 촬영을 요구했습니다. ㄱ씨는 “나체 사진이라고 해서 다 같은 것이 아니다. 세미 누드와 누드, 그리고 포르노 촬영은 구분하는 확실한 선이 있다”며 “ㄴ씨와 세미 누드를 촬영하기로 합의했는데 포르노 수준의 촬영을 강요했다”고 말했습니다.

ㄱ씨는 부당함을 느끼면서도 따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두려움 때문이었습니다. <한겨레>가 ㄴ씨를 아는 관계자에게 물었더니 “가해자 ㄴ씨는 남자가 보기에도 위압감이 느껴질 정도의 덩치였다”는 증언을 듣게 됐습니다.

“둘만 있는 상황에서 사진가가 벗으라고 하면 그 상황을 벗어날 방법이 없어요. 당시에는 위험을 사전에 알아채지 못했지만, 이후 여러 촬영을 생각해보면 ㄴ씨는 항상 문 근처에 서서 문을 등지고 촬영을 진행했어요.” ㄱ씨의 말입니다.

결국 ㄱ씨는 그날 찍은 사진도 확인하지 못한 채 그 집에서 나왔습니다. 이후 ㄱ씨는 ㄴ씨에게 1년에 걸쳐 여러 차례 사진을 지워달라고 요구했지만, 거절당했습니다.

그런데 그 사건이 있고 난 뒤 1년쯤이 지난 2016년 4월께, ㄱ씨가 함께 사진 모델을 하던 한 지인과 동석한 자리에서 지인이 전화를 한 통 받았습니다. 서울의 한 경찰서 소속 형사가 “사진가 ㄴ씨로부터 강압 혹은 몰래 촬영을 당한 피해 사실이 있느냐”고 묻는 전화였습니다. ㄱ씨도 소속되어 있는 한 사진 그룹에서 아마추어 모델들의 사진을 찍던 사진가 ㄴ씨가 부모의 허락 없이 미성년자의 노출 사진을 강압적으로 촬영한 사건으로 구속 수사를 받고 있다는 얘기였습니다. 수사 과정에서 경찰이 그의 하드디스크에 있던 다량의 피해자 사진들을 발견해 특정이 가능한 피해자들에게 전화해 추가 피해 조사에 나선 참이었습니다.

지인에게 뒤늦게 ㄴ씨의 이름 석자를 전해들은 ㄱ씨는 화들짝 놀랐습니다. ㄱ씨는 경찰에 먼저 전화를 걸어 “내가 ㄴ씨의 강압 촬영 피해자”라고 털어놓고 그의 하드디스크에 있는 자신의 사진을 확인하기 위해 경찰서를 찾았습니다.

경찰서에서 ㄱ씨는 다시 한 번 소스라치는 경험을 해야 했습니다. 일단 자신의 사진이 들어 있는 ㄴ씨 하드디스크 폴더 이름이 ‘여자친구’로 적혀 있었습니다. 소름이 끼쳤다고 했습니다. ㄱ씨는 경찰에게 “어째서 (피해자 가운데) 나에겐 연락하지 않았느냐”고 물었고, 경찰은 “폴더에 ‘여자친구’라고 되어 있어서 먼저 전화를 걸지 않았다”고 밝혔습니다. ㄴ씨의 하드디스크 안에는 6개의 폴더가 있었는데, 이 가운데 하나에는 심지어 ㄱ씨가 다른 사진가들과 찍었던 사진들도 들어 있었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ㄱ씨가 ㄴ씨와 사진을 주고받는 과정에서 대용량 파일 전송을 위해 딱 한 번 이메일의 계정과 비밀번호를 공유한 적이 있는데, ㄴ씨가 이때 확보한 이메일 계정과 비밀번호로 1년 가까운 기간 동안 ㄱ씨의 이메일에 접속해 다른 사진가들이 촬영해서 이메일로 보낸 사진들을 몰래 빼내어 간 것이었습니다. ㄱ씨는 “당시 ㄴ사진가의 하드디스크에 적어도 15명 이상의 피해자 사진들이 있었다”고 기억합니다.

ㄱ씨가 경찰과 다른 피해자들에게 들은 ㄴ씨의 범행 사실도 충격적이었습니다. ㄴ씨는 한 한복업체의 룩북(브랜드의 신제품 모델 화보를 모은 사진집) 촬영을 빌미로 당시 17살, 20살 정도의 여성을 섭외한 뒤 “모델을 하려면 누드 촬영도 할 수 있어야 한다”며 “옷을 벗기고 촬영을 강행한” 혐의를 받고 있었습니다. 또한 ㄴ씨는 이후 “사과를 하겠다”며 20살 여성 모델을 자신의 지하 작업실로 불러내 감금한 뒤 유사 강간을 한 혐의도 받고 있었습니다. 이 사실을 확인한 2016년은 ㄱ씨가 누드모델 에이전시에 들어가 사진이나 크로키 모델로 안정적인 커리어를 이어가던 시점이었습니다. 하지만 ㄱ씨는 “그런 사람과 한 공간에서 촬영을 했었다는 사실에 다시 한 번 소름이 끼쳤다”며 “이 사건으로 경찰서를 들락날락하고 다른 피해자와 이야기를 나누며 점차 누드모델에 대한 꿈을 접기 시작했다”고 말했습니다.

경찰은 ㄴ씨가 부모의 동의 없이 미성년자를 촬영한 혐의를 비롯해 여러 개의 혐의로 기소되어 2년의 실형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ㄱ씨를 괴롭힌 건 이 사건을 대하는 주변의 반응과 입방아였습니다. 2016년 5월, ㄴ씨가 활동하던 페이스북 사진 동호회는 이 사건으로 들썩였습니다. 오프라인 모임에서 자주 만나던 동호회 사람 중에서는 “ㄴ씨가 그럴 사람이 아니다”라거나 “ㄱ씨가 꽃뱀 아니냐”는 무심한 말이 오갔습니다.

ㄴ씨를 상대로 고발에 나선 피해자가 3명에 불과하다는 점을 봐도 ㄱ씨와 같은 사진 촬영 피해자가 적극 대처하기 힘들다는 점을 방증합니다. ㄱ씨는 “사진가들은 모델이 요청해도 찍은 사진 전부를 보여주는 일이 거의 없고, 지워달라고 해도 절대 지워주지 않는다”며 “피해자들은 사진가가 자신의 신체 가운데 어떤 부위를 찍었는지도 모르는 경우가 많아서 자신이 피해를 입었는지 인지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고 말합니다. 당시 ㄴ씨 사건 피해자들을 상담한 헤르프메 마음상담소(소장 공현준)는 “이런 사건의 경우 경찰에서 피해자를 특정하기도 어렵지만, 경찰에서 연락이 가더라도 피해자들이 피해 사실을 부인하는 경우가 많다”며 “오랜 기간이 지난 뒤 사진이 유포되고 나서야 피해 사실을 인지하는 경우도 있는데, 적극적으로 대응할 경우 주변에 알려질까 봐 상담만 받고 아무 대응도 못 하고 넘어가는 경우도 많다”고 밝혔습니다.

ㄱ씨는 자신과 같은 피해자가 다시는 생기지 않기를 바랍니다. ㄱ씨는 “제가 겪은 일 그리고 이와 비슷한 일련의 사건은 20대 사회 초년생, 모델의 꿈이 있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사진의 피사체가 되고자 하는 욕망을 이용해 성적으로 착취하는 사건”이라며 “이들은 매우 용의 주도하게 범죄가 아닌 것처럼 보이는 증거를 수집한다”고 밝혔습니다. ㄱ씨의 설명을 들어보면, 사진가 중에는 일부러 탈의나 환복 장면을 찍는 사람들이 많다고 합니다. 그때 “왜 찍느냐”고 물어보면 사진가는 “느낌이 좋아서”라고 대답하고 어물쩍 넘어갑니다. 이것 역시 나중에 알고 보니 수법이었습니다. “(모델들이) 강압에 의한 촬영으로 신고를 하면 탈의 사진을 보여주면서 ‘스스로 옷을 벗었다’고 증언”하기 위함입니다. 또 “도망가지 못하게 모델이 입고 온 옷을 치워두거나, 휴대전화를 빼앗아 가는 것 역시 흔한 방법”이라며 “20대 초반의 여성이 그런 상황에서 도망칠 방법은 없다”고 말했습니다.

ㄱ씨는 아직도 ㄴ씨가 찍은 사진들을 생각합니다. 경찰서에서 확인한 ㄴ씨의 하드디스크엔 ㄱ씨가 어렴풋이 기억하는 몇몇 사진들이 빠져 있었습니다. 경찰 수사에서도 찾지 못한 그 사진들은 지워진 게 확실할까요? ㄱ씨는 “다른 사람이 내가 원하지 않는 사진을 가지고 있다는 생각을 해야 하는 심정은 이루 말할 수가 없다”며 “하루 종일 그 생각이 머릿속을 가득 채운다”고 밝혔습니다.

ㄱ씨와 같은 피해자가 다시 발생하지 않도록 하는 제도적 대안은 없을까요? 김재련 변호사는 <한겨레>와의 통화에서 “제도적으로는 공정거래위원회에 ‘연예인 표준전속계약서’처럼 촬영하는 신체 부위를 명시하는 서면 합의를 권고하는 ‘사진 촬영 표준계약서’를 제정·공표하도록 요청하는 방안 등이 있다”라고 밝혔습니다. 이어 김 변호사는 “그러나 지금으로써는 계약서를 쓰지 못하는 경우라면 어떤 식으로든 촬영의 노출 부위 등에 대해서 합의한 흔적을 남기는 것이 중요하다”며 “합의하지 않은 범위의 촬영은 성폭력 특별법 상 ‘성적 욕망 또는 수치심을 유발할 수 있는 다른 사람의 신체를 그 의사에 반하여 촬영한 것’에 해당되어 처벌이 가능하다”고 덧붙였습니다.

관련 기사 : “살아서 나가야 한다는 생각뿐” 한 모델이 밝힌 ‘촬영 성폭력’

박세회 기자 sehoi.par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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