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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여성

“당신 덕분에 수많은 양심들이 또다시 혁명의 주체로 태어납니다”

등록 2019-01-15 14:47수정 2019-01-15 15:26

[심석희 선수에게] 나임윤경 한국양성평등교육진흥원장이 보낸 편지

“미안합니다.” “용기 내줘서 고맙습니다.” 쇼트트랙 국가대표 심석희 선수의 용기있는 고발에 시민들의 지지가 이어지고 있습니다. 백은 옥 한양대학교 공과대학 교수(10일), 정춘숙 더불어민주당 의원과 시민 4명(11일), 신지예 녹색당 공동운영위원장과 30대 직장인(13일), ‘06년생 학생’ 등 시민 10명(14일)에 이어 15일엔 나임윤경 한국양성평등교육진흥원장이 응원을 담은 편지를 보냈습니다.

“함께하겠다”는 목소리를 전합니다. 편지글은 doall@hani.co.kr로 보내주세요.

지난해 12월1일 열린 성차별·성폭력 끝장집회 ‘결국엔 바꾼다 #미투가 해낸다’에서 참석자들이 성폭력과 성차별 등을 규탄하고 있다. 김경호 선임기자 jijae@hani.co.kr
지난해 12월1일 열린 성차별·성폭력 끝장집회 ‘결국엔 바꾼다 #미투가 해낸다’에서 참석자들이 성폭력과 성차별 등을 규탄하고 있다. 김경호 선임기자 jijae@hani.co.kr

심석희 선수에게

석희 선수, 저는 얼마 전까지 대학에서 석희 선수 또래의 학생들을 가르치다 최근에 한국양성평등교육진흥원에서 일하기 시작한 나임윤경이라고 해요. 먼저 기성세대의 한 사람으로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미안함을 전합니다. 미안해요. 정말 미안해요.

한국 사회는 그간 식민시대와 한국전쟁 때 겪은 설움과 가난을 이겨내겠다고 혈안이 되어 돈 벌고, 집 사고, 땅 사고, 배불리 먹는 데만 급급해 있었어요. 그러는 사이 도덕이 뭔지, 윤리가 뭔지, 인권이 뭔지도 모른 채 괴물 같은 사회가 되어 버렸네요.

물론 정치, 노동, 교육, 문화 등 사회 전반에 걸쳐 자유, 민주, 평등의 외침은 있어 왔지만 개인 한 사람 한 사람이 마땅히 누려야 할 인권과 평등에 대해 구체적으로 말하지 않아 왔어요. 부모와 교사들 역시 자식과 학생들이 돈 벌고 유명해지도록 하는 데만 관심을 쏟았지, 한 사람 한 사람의 존엄과 인간으로서의 권리에 대해서는 모른 척하고 살았지요.

노동운동을 하며 돌아가신 분들, 민주주의를 외치다 유명을 달리하신 분들을 위해 한국 사회는 분연히 일어나 혁명을 외쳤지만, 어쩐 일인지 입시 지옥이나 성폭력 등 십대들이 겪어 내고 있는 비민주, 반인권에 대해서는 침묵해 왔어요. 여성들이 일생에 걸쳐 참아내고 있는 성차별에 대해, 오히려 남성들이 차별받는다고 억지주장하는 일부의 사람들에게도 아무 말 않고 이만큼이나 왔네요.

저 역시 다른 사람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음을 비겁하게 고백합니다. 석희 선수가 이번에 보여준 정의로운 용기가 저와 많은 사람들에게 더 이상 침묵하면 안 된다는 깨달음을 갖게 했어요. 그래서 이 지면에서 석희 선수의 입을 빌려, 석희 선수와 함께 한국 사회에 던지고 싶은 질문들을 하려 해요.

성폭력이라는 엄청난 범죄 근절을 위해 과거 민주투사라던 국회의원들은 왜 강력한 대책 마련을 하지 않는 겁니까? 인터넷과 현실 세계에서 벌어지는 여성혐오 발언과 실천들에 대해 경찰, 검찰, 사법부는 왜 이리도 황당한 태도를 보이는 겁니까? 진보적 관점에서 사회 문제를 조망한다는 남성 학자들과 운동가들은 여성들이 당하는 일상적 성폭력에 대해 왜 개혁과 혁명을 말하지 않는 겁니까? 스쿨 미투에 미온적인 학교의 책임자들에게 교육청과 교육부는 왜 그렇게 관대한 겁니까? 자사고와 특목고 폐지나 대입전형 변화에 마스크 쓰고 피케팅하는 부모들은 왜 학생들의 성폭력 피해에 대해서는 잠자코 계신 겁니까?

언급한 당신들 모두는 일상적인 여성폄하와 여성에 대한 폭력이 정치, 노동, 교육, 문화 등 사회 전반에 녹아 있음을 모르는 겁니까? 그러면서 어떻게 자유, 민주, 평등, 평화를 주장할 수 있는 겁니까? 남성들이 더 차별받는다고요? 여성들 살기가 편해졌다고요? 그러면 지금까지 폭로된 성폭력은 무엇입니까? 아니, 폭로되지 못한 수많은 여성들의 성폭력 피해는 무엇입니까?

이 글이 얼마나 많은 악성 댓글을 불러 모을까요? 심석희 선수는 또 얼마나 많은 2차 가해에 시달릴까요? 그런다 해도 정치인, 경찰, 법률가, 학자, 운동가, 교사, 부모들은 또 여전히 입을 다물겠죠. 그들 때문에 이미 10년 전 여러분의 선배들이 어렵게 낸 용기가 스포츠계에 그 어떤 변화도 일으키지 못하고 그대로 주저앉아 버렸었지요.

석희 선수, 그리고 석희 선수와 함께하고자 나선 빙상 선수들! 그렇지만 이제는 혼자가 아니에요. 사회를 변화시키지 못한 못난 선배들이지만 석희 선수와 여러분의 힘들었던 시간들을 나누어 지고 앞으로의 재판에서 더 이상의 비민주, 반인권적 판결이 나오지 못하도록 함께 노력할게요.

석희 선수는 원하지 않았을 수도 있지만, 대한민국의 수많은 양심들은 석희 선수 덕분에 또다시 혁명의 주체로 태어납니다. 석희 선수, 고맙고 미안합니다.

나임윤경 한국양성평등교육진흥원장 드림

박다해 기자 doal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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