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로가기 :
<한겨레> 특별페이지 ‘낙태죄 폐지’ https://www.hani.co.kr/arti/delete
“학생인데 임신을 했습니다. 부모님께는 말할 용기가 안 나고, 전 남자친구는 자기는 돈이 없다며 모른 체 합니다. 낙태는 우리나라에서 불법이라는 데, 제가 낙태를 할 수 있는 방법이 있을까요?”
포털사이트 ‘네이버’ 지식인에 ‘낙태’를 검색하면 임신중지 방법을 묻는 글들이 수백여 개가 검색된다. 수능을 봐야 하는 고3인데 덜컥 임신해 어떻게 할지 모르겠다는 글, 마음이 급해 SNS에 올라온 광고로 임신중절약을 구매했는데 복용해도 몸에 문제가 없을지 묻는 글 등이다. 지난 11월27일 대구지법 형사12부(재판장 이진관)가 징역 23년형에 20년의 전자장치 부착명령을 선고한 정아무개(35)씨는 이렇게 궁지에 몰린 청소년들에게 접근했다.
‘산부인과’ 사칭해 청소년에 접근…낙태시술해준다며 성폭력 저질러
판결문에 따르면, 정씨는 임신중지에 대한 고민을 ‘네이버 지식인’에 토로한 아동·청소년들에게 자신을 ‘산부인과 의사’라고 소개하면서 접근했다. 정씨는 치밀하게 준비했다. 폐업한 산부인과 의원에 몰래 들어가 의약품과 시술도구를 훔치고, 전문의 자격증과 재직 증명서를 위조했다. 피해자 앞에서 과시할 의학지식을 따로 독학하기도 했다.
피해자들은 위조된 자격증까지 보여주는 정씨를 믿었다. 정씨는 피해자에게 ‘낙태 시술을 해준다’며 유사성행위를 강요했고, 심지어 피해자의 남자친구가 있는 공간에서 시술을 빙자해 성폭행을 저질렀다. 어떤 피해자에게는 진료라는 명목으로 신체를 찍은 사진을 요구하기도 했다. 이런 식으로 그의 범행에 피해를 입은 아동·청소년만 7명에 이르고, 피해 횟수는 수십 회에 달했다. 지난 6월 기소된 정씨는 법정에서 ‘성도착증 장애에 의한 심신미약’을 주장했다. 하지만 법원은 정씨가 화장실 불법촬영·아동음란물 소지 관련 혐의로 재판을 받던 도중에 이런 범죄를 저지른 점, 피해자 중 그 누구에게도 용서받지 못한 점 등을 들어 중형의 선고가 불가피하다고 했다.
네이버 지식인에 ‘낙태 고민’ 수백 개…처벌 두려움 토로에 ‘최대한 출산해라’ 답글
정씨의 범행은 임신중지가 처벌될 수 있는 불법이 아니었다면, 임신중지를 위한 적절한 정보제공·상담 창구를 국가가 마련해놓았다면 피할 수 있는 일이었다. 정씨의 피해자처럼 갑작스러운 임신으로 당혹스러운 상황에 놓인 청소년이나 대학생들은 네이버 지식인 등 포털사이트에 임신중지에 대한 고민 글을 올린다. ‘낙태’가 불법이라는 데서 오는 두려움, 임신 뒤 신체변화로 인한 불안감, 부모에게도 알릴 수 없는데 애인까지 등을 돌렸다는 절망감이 뒤범벅되어있다. 인공임신중절 수술을 받지 않고도 ‘자연유산’을 하는 방법을 묻는 글, 법망을 피해 인공임신중절 수술한 뒤 적절한 치료를 받지 못해 자살 충동에 시달린다는 글까지 올라와 있다. 이런 글들에는 ‘낙태는 최대한 피하고 출산을 해라’는 등 비전문적인 댓글들이 달린다.
문제는 임신중지 관련 입법 논의가 형법에서의 ‘낙태의 죄’ 폐지에 관한 논쟁으로 가로막힌 탓에 모자보건법에 규정된 상담·정보제공·의료지원 절차 등에 대한 입법 역시 함께 미뤄질 상황이 됐다는 것이다. 헌법재판소가 임신중지를 한 여성과 의사를 처벌하는 형법 일부 조항의 ‘헌법불합치’를 결정하면서 제시한 시한인 올 12월31일이 지나면, 당장 임신중지가 ‘비범죄화’된다. 국회에서는 올해 안에 대체입법안이 통과되기는 사실상 어려워졌다는 관측이 지배적이다.
“의료서비스·상담절차 마련 시급…‘의무’가 아니라 ‘권리’로 접근해야”
전문가들은 법 통과 전이라도 정부가 의료인에 대한 ‘가이드라인’과 임신중지를 원하는 이들에 대한 ‘상담·정보제공’ 절차를 마련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당장 임신중지 관련 시술을 해야 할 의료인들이 비범죄화된 상황에 맞게끔 적절한 의료서비스를 제공하고, 나아가 시술 뒤 안전한 사후관리까지 제공할 수 있도록 ‘정부 차원의 가이드 라인’을 마련해야 한다는 것이다.
특히 전문가들은 상담절차를 마련할 때 기존에 ‘임신중지’를 청소년 등 취약계층에 대한 ‘위기임신 구제’의 차원에서 접근해왔던 틀을 깨야 한다고 지적한다. 나영 모두를위한낙태죄폐지공동행동 공동집행위원장은 “현재의 상담절차는 법적인 처벌을 전제로 하기 때문에 위기상황에 놓인 청소년들은 구제하는 식의 ‘위기임신’의 틀에 갇혀있다. 이제는 임신중지가 비범죄화되기 때문에 임신중지를 ‘보건의료서비스’로 정식화하고, 그에 맞는 상담을 제공해야 한다”고 말했다. 형식적으로 ‘임신중지 여부’만을 상담할 게 아니라, 청소년·장애인·이주민 등 취약계층들도 자신의 상황에 따라 임신중지 전 과정에서 적절한 ‘의료서비스’를 받을 수 있도록 구체적인 정보를 제공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같은 맥락에서 현재의 정부입법안이 형법에 ‘낙태죄’가 존치되는 것을 전제로 해, 처벌을 피하기 위한 상담절차를 제공하는 식으로 짜여있는 데에 대한 비판도 나온다. 정부입법안은 사회·경제적 사유로 임신중지를 할 때는 국가가 지정한 ‘임신·출산 종합상담기관’에서 상담을 받고 24시간의 숙려기간을 거치도록 했고, 만 16살 미만 미성년자는 법정대리인의 동의를 받기 어려우면 이를 입증할 공적 자료를 상담사실확인서와 함께 제출하도록 했다. 나영 공동집행위원장은 “청소년들이 전문적인 상담절차를 피해 포털사이트에 문의하는 가장 큰 이유는 임신중지가 ‘처벌’될 수 있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현재 정부입법안은 여전히 ‘처벌’이 존치되어 있고, 처벌을 회피하는 방법으로 상담확인서와 24시간의 대기 시간을 요구한다. 향후 모자보건법 개정 논의에서 임신중지 상담은 처벌을 피하기 위한 의무가 아니라 의료서비스를 받을 ‘권리’로서 접근되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임재우 기자
abbado@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