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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여성

[초단편소설,들 8] 달콤쌉싸름한 초콜릿

등록 2020-12-26 14:46수정 2020-12-27 19:21

#낙태죄_전면폐지_2000자_엽편_릴레이
사진 클립아트코리아
사진 클립아트코리아

바로가기 : <한겨레> 특별페이지 ‘낙태죄 폐지’ https://www.hani.co.kr/arti/delete

10월7일 정부는 임신 주수와 사유에 따라 임신중지를 범죄로 규정한 낙태죄 개정안을 내놓았다. 바로 다음날인 10월8일 오후 에스엔에스(SNS)에 하나의 해시태그가 올라왔다. ‘#낙태죄_전면폐지_2000자_엽편_릴레이’. 전혜진 작가가 제안하고, 문녹주 작가가 해시태그를 만든 뒤 지금까지 20명 가까이 되는 작가가 임신중지와 그 권리를 다룬 초단편 소설을 써 온라인 소설 플랫폼 브릿G와 에스엔에스 개인 계정 등에 올렸다. 같은 주제를 다채롭게 엮어낸 소설들을 작가들의 동의를 얻어 <한겨레> 낙태죄 폐지 특별 페이지에 싣는다.

※ 작품을 원문 그대로 싣습니다.

달콤쌉싸름한 초콜릿 ㅣ 해원

이레 초등학교 2학년 8반 59번 하소은은 한 반에 한 명쯤 있을 법한, 또랑또랑한 학생이었다. 수업 시간이면 먼저 나서서 질문하고 손을 번쩍 들며, 선생님을 쭉 보고 있다가 심부름이 필요하면 바로 눈을 반짝이며 ‘제가 돕겠어요!’ 외치는 아이였다. 그렇기에 선생님들은 소은을 좋아했고, 그 역시도 그 기대에 부응하려고 답했다. 그렇기에 남들은 건성으로 듣는 성교육 시간 역시 소은은 눈을 반짝이면서 들었다.

하나하나 놓치면 안 돼.

소은은 보건 교사의 입 움직임 하나하나에 집중하려고 들었다. 옆에서 짝꿍인 민철이 졸고 있든, 책상에 연필로 낙서를 그리고 있든 상관없었다. 어차피 여자애들끼리는 수가 부족하니까 같이 앉지 말고 어울려 놀라고 억지로 붙여놓은 짝이었다. 그러니 한심하기 짝이 없는 남자애들에게 무엇을 바라겠는가? 보건 교사가 대형 TV의 나무문을 열고 비디오를 밀어 넣었다. 그는 정신 사나운 초등학생을 집중시키기 위해서는 무엇이 가장 좋은지 알고 있었다. 바로 동영상이었다. 보건 교사는 어깨를 으쓱이며 과장된 어조로 말했다.

“우리는 우리 몸을 아주 소중히 여겨야 해요. 알겠죠? 특히 여자들은 우리 몸에 생명이 자리 잡을 수 있는 아기집이 있다는 걸 인지하고 함부로 몸을 다뤄서는 안 됩니다. 지금 볼 비디오는 미국에서 발표된 소리 없는 비명이라는 영화예요. 왜 아기집을 소중히 여겨야 하는지 보여주는 영상이에요.”

그는 고개를 숙여 특정 장면이 나올 때까지를 기다리며 빨리 감기를 눌렀다. 교실 불이 꺼지고 영상이 흘러나왔다. 초음파 영상이 나오고 배 속에 있는 태아가 나왔다. 태아를 수술 도구를 이용해서 끄집어내고, 아이는 공포에 질려서 몸을 피하고 입을 벌리면서 도망간다. 그러나 곧 기구로 태아의 머리는 몇 조각으로 바수어지고 아기집에서 긁어낸 사체 조각들이 등장했다. 이 광경을 보고 헛구역질을 하는 여자아이들도, 뭔가, 하고 눈을 반짝이는 남자아이들도 있었다. 하지만 소은은 이 둘 중 하나도 아니었다. 그는 괜히 배를 눌러보았다. 아기집이 어디 있는지는 정확하게 모르겠지만, 배를 박박 긁어대는 기구를 피해 누군가가 뱃속에서 요동친다면 엄청 아플 거라는 생각에서였다. 왜 아기집은 나한테만 있는 것일까. 남자와 여자가 만나서 아기를 만든다면, 공평하게 남자한테도 아기집이 있어야 하는 건 아닌가. 상념이 끝나기 전에 교실의 불을 켠 보건 교사가 물었다.

“그러니 이런 일을 방지하려면 우리는 순결을 지켜야겠죠?”

“네!”

소은이 앞서 외쳤다. 절대로 자신은 앞서서 아기를 죽이는 사람이 되지 않을 것이다. 그는 속으로 생각했다. 아기집은 아이라는 또 다른 생명이 사는 곳이니까. 보건 교사는 소은의 열성적인 태도에 미소를 지었다. 그는 힘입어 다른 주제로 넘어갔다.

“그런데 이렇게 고귀한 순결을 지키는 건, 오롯이 내 몫이에요. 남들이 지켜주지 않아요. 낯선 사람이 와서 예쁘다고 막 나를 만지려고 할 수도 있고, 해코지하려고 들 수도 있어요. 막 도와달라고 하면서 내 소중한 곳을 만지려고 하고, 머리를 쓰다듬으려고 할 수도 있다고요. 그럴 때 우리는 뭐라고 해야 할까요?”

보건 교사의 질문이 나오자마자 민철은 다시 책상을 칼로 후벼 파고 있었지만, 소은은 아랑곳하지 않고 손을 번쩍 들었다. 이건 답을 잘 알고 있었다. 엄마가 가르쳐주었기 때문이다.

“안 돼요, 싫어요를 외치면 됩니다!”

“자, 맞았어요. 그러면 여자친구들 우리 함께 외쳐볼까요? 안 돼요, 싫어요!”

“안 돼요, 싫어요!”

여자아이들의 목소리가 낭랑하게 울려 퍼졌다. 역시 여자애들은 딴짓도 하지 않고 말을 잘 들으니 교육하는 보람이 있었다. 보건 교사는 흐뭇함에 뒷말을 이었다.

“이것도 따라 외쳐보세요. 내 몸은 나의 것이다! 남이 손댈만한 것이 아니다!”

“내 몸은 나의 것이다! 남이 손댈만한 것이 아니다!”

내 몸은 내 것이니까, 내가 지켜야 한다! 그래, 내 몸은 내 것이지. 소은은 선서하듯 손까지 흔들어대며 찬동했다. 성교육 시간이 끝나고 나서 보건 교사는 수업을 잘 들었다는 보상으로 책상마다 ABC 초콜릿을 하나씩 나눠주었다. 교사는 소은의 책상 근처로 왔을 때, 기특하다는 듯이 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C”가 적힌 초콜릿을 주었다. 비닐 껍질을 까며, 소은은 쉬는 시간에 초콜릿을 굴려 먹었다. 초콜릿은 달콤쌉싸름했다.

<끝>

#낙태죄_전면폐지_2000자_엽편_릴레이 참여 작가 해원

※ <한겨레>는 작가의 동의를 얻어 작품을 게재합니다. 해당 작품의 저작권은 작가에게 있으며 저작권자의 동의 없는 무단 발췌 및 전재를 금합니다.

▶바로가기: <한겨레> 특별페이지 ‘낙태죄 폐지’ https://www.hani.co.kr/arti/delete

바로가기 : 온라인 소설 플랫폼 브릿G #낙태죄_전면폐지_2000자_엽편_릴레이 셀렉션 https://britg.kr/novel-selection/1259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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