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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여성

[초단편소설,들 9] 운과 때

등록 2020-12-27 18:04수정 2020-12-27 18:12

#낙태죄_전면폐지_2000자_엽편_릴레이
클립아트코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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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가기 : <한겨레> 특별페이지 ‘낙태죄 폐지’ https://www.hani.co.kr/arti/delete

10월7일 정부는 임신 주수와 사유에 따라 임신중지를 범죄로 규정한 낙태죄 개정안을 내놓았다. 바로 다음날인 10월8일 오후 에스엔에스(SNS)에 하나의 해시태그가 올라왔다. ‘#낙태죄_전면폐지_2000자_엽편_릴레이’. 전혜진 작가가 제안하고, 문녹주 작가가 해시태그를 만든 뒤 지금까지 20명 가까이 되는 작가가 임신중지와 그 권리를 다룬 초단편 소설을 써 온라인 소설 플랫폼 브릿G와 에스엔에스 개인 계정 등에 올렸다. 같은 주제를 다채롭게 엮어낸 소설들을 작가들의 동의를 얻어 <한겨레> 낙태죄 폐지 특별 페이지에 싣는다.

※ 작품을 원문 그대로 싣습니다.

운과 때

김휘빈

그녀는 임신테스트기를 옆에 두고 있었다.

양성이었다. 즉 그녀는 임신했다. 이것을 남자친구에게 어떻게 알려야 할지 고민했다. 알리면 남자친구가 나를 버리는 것 아닐까? 두려움이 가슴을 옥죄었다.

사랑에 눈이 멀어 남자친구가 떠날까 두려운 것이 아니다. 이것을 같이 책임져야 할 남자친구가 떠난다면 대체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인가. 고립되는 것도 무서웠다. 그녀는 말하자면 은따였다. 여자애들은 그들의 그룹에 그녀를 받아주지 않았고, 그녀 역시 그들과 어떻게 어울려야 할지 몰랐다. 배척이라고 하기엔 덜 적대적이었지만, 고통받고 있는 것은 사실이었다.

가난의 냄새가 난다고 하는 애들도 있었다. 어디서 맞은 건지 상처를 달고 있는 애랑 가까이 하고 싶지 않다는 애도 있었다. 그러나 그녀에게 인기인인 남자친구가 생긴 순간, 반 여자애들이 대하는 태도가 달라졌다. 갑자기 친한 친구가 생기지는 않았지만 미묘한 거부감이 사라지고, 대화가 원활해졌다. 묘하게 살 것 같았다.

그래서 남자친구가 성관계를 요구했을 때 안 된다고 말하기가 어려웠다. 남자애들 사이에서 ‘섹스 안 해주는 여자애 왜 사귀냐?’라는 말이 오가는 것도 들었다. 성관계를 거부하면 남자친구가 떠나는 것 아닐까. 그리고 다시 지독한 고립감 속에 버려지는 것 아닐까. 그래서 아무것도 요구할 수 없었다. 아니, 사실 요구해야 하는 게 있다는 것도 몰랐다. 피임 같은 건 들어보긴 했지만 자세히 알지 못했고, 긴장과 두려움으로 눌린 머릿속에서 떠올릴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나중에 콘돔에 대해 듣고 생각해보았지만 구할 수 있는 곳이 마땅치가 않았다. 편의점에서 콘돔을 사려고 했더니 신분증 제출을 요구받았다. 콘돔은 성인용품이라는 것이다. 네 하고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나중에 인터넷을 뒤져보고 나서야 일반형 콘돔은 누구나 구입 가능하지만 성적 쾌락을 위한 콘돔들이 성인용품으로 분류된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많은 판매자들이 일반콘돔도 성인용품으로 착각해 청소년에게 판매하지 않는다는 것.

그것을 알았다고 해도 이미 때는 늦었다. 생리일자를 검색하고, 임신중단비용을 검색하며 수많은 사람들이 불안에 떨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모두 정확한 정보보다는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말들로 서로를 위로하며 방법을 알려주고 있었다. 그리고 자신 역시 그런 구전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망설이다가 남자친구에게 만나자고 했다. 메신저로 말했다가 차단당하면 견딜 수 없을 것 같았다. 약속장소에 나타난 남자친구에게, 그녀는 말했다.

“나 임신했어.”

남자친구는 잠시 아무말도 없었다. 그녀는 그 침묵을 견뎌야만 했다. 남자친구가 물었다. 정말? 그렇다고 대답하자 남자친구는 잠시 후, 갑자기 활짝 웃었다.

“나 아빠가 되는 거야?”

얼떨떨한 반응이었다. 그녀가 고개를 끄덕이자 남자친구는 그녀를 끌어안고 얼굴에 입맞춤을 퍼부었다. 갑자기 눈물이 나왔다. 그녀가 흐느끼자 남자친구는 기뻐해야 하는데 왜 우냐고 말했다. 애는 학교 그만두고 노가다를 하면 된다고 말하며 아이를 낳자고 말했다. 너무나 기뻤다.

낙태해야 한다는 건 알았지만 그래도 낙태하고 싶지는 않았던 것 같다. 울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행복한 가족의 정경이 머릿속에 펼쳐졌다. 폭력적인 아버지 밑에서 언제나 이런 집에서 나가야한다고 생각했다. 이상적인 가정을 꾸리고 말겠다고, 사랑을 주고받으며 따뜻한 가정을 꾸리고야 말겠다는 꿈이 있었다. 그리고 그것이 지금 실현될 것 같아서 눈물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이후, 남자친구는 자기가 아버지가 될 것이라고 말하고 다니기 시작했다. 남자애들은 ‘오~’하며 추켜세웠고, 여자애들은 복잡한 표정을 짓다가도 고개를 끄덕였다. 대체 알지도 못했던 여자애들까지 와서 ‘너 임신했다며? 축하해’라고 하고 은은하게 웃으며 떠났다. 자신이 와 준 것이 대단한 행차라고 착각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녀는 떨떠름하게 고맙다고 대답했다.

모르는 사람까지 와서 볼 정도로 퍼진 이야기가 교사의 귀에 들어가지 않을 리가 없었다. 담임이 그녀를 조심스럽게 불렀다. 부모님께는 말씀드렸니?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말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담임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너희들이 양육하는 것은 무리다. 여기서 학업을 그만두면 중졸이 최종학력이다. 중졸 학력으로는 수입이 적다. 너희들 인생을 그렇게 어렵게 만들 수는 없다. 임신한 학생이 있는 것이 면학 분위기를 문란하게 만든다.

사실적인 말이라고 생각하며 듣고 있던 그녀는 마지막 말에 미간을 찌푸리며 되물었다. 문란하다니요? 담임은 말을 고르는 것 같았다. 길고 느린 담임의 말을 정리하자면 임신을 했다는 것은 섹스를 했다는 것이고, 섹스를 한 학생이 있다는 것이 면학분위기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거였다. 교칙에는 임신한 학생을 퇴학시킬 수 있다는 내용이 있다고도 말했다.

둘 다 퇴학당하는 건 문제였다. 그걸 걱정하자, 담임은 임신한 학생만 퇴학하는 거라고 말했다. 즉, 그녀만 퇴학당한다는 것이었다. 이상하다고 생각해서 되묻자, 남자는 눈에 띄지 않으니까 알 수 없고 따라서 면학을 저해하지 않는다는 이상한 대답이 돌아왔다.

인상을 찌푸리는 사이 너희는 아직 어리고, 살 날이 많으니까 경솔한 선택을 하지 말라며, 혹시 도움이 필요하다면 이쪽에 전화해보라며 메모지에 몇 개의 전화번호를 적어주었다. 여성센터나 미혼모센터의 이름이 옆에 적혀 있었다. 그 메모지는 일단 지갑에 넣어두었다.

남자친구는 아기용품을 자주 검색해 보여주며 이게 좋을지 저게 좋을지 상담했다. 그녀 역시 육아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나름대로 검색해보았다. 필요한게 많은 것 같았다. 주수가 차자 배가 불룩하게 튀어나왔다. 다행히 옷을 입으면 크게 티가 나지는 않았다. 날이 추워지는 계절이라 다행이었다. 남자친구에게 배를 보여주고 우리 아이가 이렇게 잘 크고 있다고 알려주기도 했다.

시험이 끝나고, 남자친구의 얼굴을 보기가 어려워졌다. 메시지는 여전히 주고 받았지만 일자리를 구하느라 바쁜건지 실시간으로 대화를 하는 경우도 적어졌다. 몸이 피로하고 끊임없이 허기가 졌다. 아이가 필요로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며 먹었다. 관계일로부터 생각해보자면 대략 5개월, 그러니까 주수로 따지면 20주일 것이다. 겨울방학이 멀지 않은 때였다.

남자친구는 아이를 키울 수 없다고 말했다.

방학식 날, 오랜만에 얼굴을 본 남자친구는 낙태해야 한다고 했다. 아직 20주니까 합법적으로 낙태 가능하다고 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아이를 키울 수 있을 것 같지 않다고 했다. 하늘이 무너지는 소리였다. 일방적으로 말한 남자친구는 그녀를 학교에 남기고 도망가버렸고, 메신저로 20만원을 송금한 다음 그녀를 차단했다. 갑자기 세상에 혼자 버려졌다. 돛도 닻도 노도 없이 파도치는 바다에 버려진 판자처럼 세상이 일렁거렸다.

살아야 했다. 키울 수 없었다. 다급하게 산부인과를 찾았다. 교복을 입은 채 들어온 그녀를 흘깃거리는 시선들이 있었지만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무슨 일로 온 거냐는 간호조무사의 질문에 그녀는 한참 입을 뻐끔거렸고, 간호조무사는 알겠다는 표정을 짓더니 몸을 일으켜 그녀에게 조그맣게 말했다. 여기서는 그런 거 하지 않는다고.

눈물 날 것 같은 친절이었다. 감사하다고 말하고 그녀는 다른 병원을 찾았다. 다른 병원을 갈 생각이 바로 든 것은 안내원이 친절했기 때문일까. 콘돔을 사려다 어디 어린애가 이런 걸 사느냐는 시선에 압박당한 후로 그녀는 콘돔을 살 용기를 내지 못했다.

거절하더라도 상냥할 것이라는 생각에 용기를 내어 다른 병원을 찾아 버스를 타고 이동했다. 들어서자 어느 노인이 젊은 여자애가 왜 여기 왔느냐고 말하는 걸 들었고, 그 옆에서 산부가 노인의 옆구리를 찌르며 학생이라도 몸 불편하면 오는거지 여기가 무슨 애만 보러 오는 줄 아느냐고 면박을 주었다.

그제야 그녀는 자신의 처지를 깨달았다. 교복을 입고 임신과 출산에 관여하는 병원에 온 여자. 접수원은 그녀의 복장과 복부를 잠시 쳐다보더니 처음 방문이라면 이름과 주민등록번호를 적으라고 했다. 불안감과 함께 개인정보를 적고 기다렸다.

곧 진료실에서 그녀를 호출했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남자 산부인과 의사가 그녀를 맞이했다. 남자 의사의 모습에 그녀는 잠시 멈칫했지만, 선택권은 그녀에게 없었다. 그녀는 앉아서 무슨 일로 왔느냐는 의사에게 임신이라는 한마디를 겨우 내뱉었다. 바로 의사의 눈이 가늘어졌다.

낳을거냐는 질문에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얼마가 드는지 알고 싶어서 온 거라고 했다. 마지막 생리일이 언제냐고 물었다. 그녀는 핸드폰을 켜고 생리 어플을 뒤져 마지막 생리일을 찾아냈다. 의사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24주가 넘어서 임신중단이 불가능해요.”

말이 안 되는 소리였다. 성관계 일자에서부터 지금까지 20주인데 왜 갑자기 4주가 더 늘어나느냐고 물었다. 의사는 고개를 저으며, 주수는 무조건 마지막 생리일로부터 세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녀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생리일이 불규칙하거나, 생리주기가 긴 그녀와 같은 사람은 이 계산법이 불합리했다. 본래 가능한 임신중단이 순식간에 불가능, 불법이 된다. 법의 모호함과 엄중함 앞에서 그녀는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소리도 없이 눈물만 흘렀다. 어떻게 해도 솟아날 구멍 같은 건 보이지 않았다. 죽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었다.

의사가 한숨을 쉬더니 티슈를 뽑아 그녀에게 건네며, 일단 초음파를 보는 게 좋겠다고 말했다. 비용이 얼마 추가되는지를 말하며 임신 초음파라고 떡 적혀서 나가는 게 아니라, 생리불순 때문에 초음파를 보던 임신 때문에 초음파를 보던 그게 그거라는 말과 함께. 그게 사실인지 안심시키기 위해서 한 말인진 몰라도, 그녀의 고개를 끄덕이게 하는 데에는 충분했다.

옷을 갈아입고 산부인과 의자에 다리를 벌리고 앉았다. 의사가 들어와 초음파기기를 질에 넣었고, 그녀는 불편함에 신음했다. 의사는 반응하지 않고 초음파를 보며 기기를 움직이더니, 화면을 가리키며 태아가 주수에 비해서는 작다고 말했다. 어디가 머리고 손발인지 알려주었다. 심장박동도 있다고 했다.

왈칵 눈물이 터져나왔다. 처음 보는 자신의 아기였다. 진작 왔으면 한 번이라도 더 볼 수 있었을까. 하지만 산부인과를 와야 하는 것조차 몰랐다. 뭘 해야 하는지 뭘 할 수 있는지 아무것도 몰랐다. 피임도 몰랐는데 알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우는 그녀에게 간호사가 티슈를 건넸고, 의사도 착잡한 표정으로 초음파를 끝냈다. 울면서 다시 진료실로 들어오는 그녀를 보며 의사는 자신도 모르게 ‘그러게 왜 무책임한 짓을 해서’ 라고 중얼거리고 말았다.

그녀는 울컥 터져나오는 눈물을 참지 못하고 큰 소리로 울며 헐떡거렸다. 무책임한 짓을 한 게 아니라고. 애 아빠가 책임진다고 했다고. 그런데 지금 책임 못 지겠다고 도망갔다고. 의사는 더욱 착잡한 표정으로 학생이 어떻게 그게 가능하냐고, 피임이라도 했어야 한다고 했다.

자기가 할 말은 아니지만, 남자는 손해 볼 게 하나도 없기때문에 조심할 생각조차 하지 않으며, 때문에 여자가 조심해야 한다고 했다. 전부 여자가 손해라고. 왜 이렇게 어린 나이에 아픈 일을 다 감수해야 하느냐고. 25주에 임신중단해서 처벌받는 건 여자지 남자가 아니라고. 불리하니까 몸 사려야 한다고.

다정한 위로였고, 조심하지 않은 그녀의 잘못을 헤집는 말이었다. 자신의 아이를 확인하고 그 생명을 느낀 순간과 동시에 온 임신중단의 실감에 그녀의 책임을 묻는 말이었다. 모든 것이 자신의 잘못이었고 그대로 붕괴되고 싶었다. 의사는 우는 그녀가 진정할 때까지 기다렸다가 아이를 20주로 정도로 볼 수 있다고 하며 빨리 중단하는 게 좋을 거라고 말했다. 그녀가 고개를 퍼뜩 들어 의사를 쳐다보았다.

의사는 절차에 따라 피임방법과 임신중단 방법, 그리고 14주 이상이기 때문에 상담이 필요하다는 점을 알렸다. 상담은 보건소 등 정해진 기관에서 해야했다. 그러나 오늘은 금요일 저녁이었다. 다음 주까지 기다려야 했다.

월요일에 기관에 방문해 상담하고, 화요일 숙려기간을 끝내고 수술한다. 머릿속에 계획이 잡힌 순간 아찔해졌다.

지금이 학기중이었다면 이 스케줄이 가능했을까? 자신이야 학생이라지만 성인들은, 회사원들은 방학이 있는 것도 아닐텐데 왜 굳이 기관에 가서 상담을 하게 하는 걸까? 왜 며칠을 허비하게 하는 걸까? 그렇다고 할 임신중단을 하지 않으리라고 생각하는 걸까? 키울 수 없으니까 중단하려는거야.

기관 안내 팜플릿을 받고, 그녀는 병원을 나왔다. 상담 전, 주말 동안 돈을 마련해야 했다. 대체 누구에게 돈이 있을까. 아무에게도 기댈 수 없었다.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었다. 한참 고민하다가, 그녀는 제법 자신에게 친절했던 노는 애에게 연락했다.

혹시 돈을 빌려줄 수 있냐고. 시간이 걸리겠지만 어떻게든 갚겠다고. 메시지를 보내자 바로 노는애가 전화했다. 그 애는 바로 그녀에게 물었다.

“너 낙태할거냐?”

긍정인지 흐림인지 모호한 목소리를 흘리자, 그 애가 혀를 차더니 어디냐고 물었다. 위치를 말하자 간다고, 기다린다고 말했다. 전화를 끊은 그 애는 메신저로 전자교환권을 보내더니 근처에 그 프랜차이즈 카페가 있으니 거기서 기다리라고 말했다. 초코라떼 전자교환권이었다.

초코라떼를 마시며 구석에 앉아있자, 그 애가 카페에 들어와 그녀 앞에 앉았다. 방학식 후 어디 가려던 건지 화려한 꾸밈이었다. 앉자마자 그 애는 ‘그 새끼가 책임 안 진대?’라고 물었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한참동안 그 애는 그녀의 남자친구 욕을 했다. 어쩐지 요즘 좀 이상하더라. 너 피하는 거 같고. 언제부터인가 좀 자신 없어진 거 같더니. 그러게 왜 주둥이는 나불대고 다녀, 씨발새끼. 너 이제 학교 생활 어떻게 하냐. 그러더니 그 애는 한숨을 푹 내쉬고 미간 찌푸린 표정으로 목소리를 낮췄다.

“돈은 빌려줄 수 있어. 우리 낙태계 있거든. 먼저 받고, 너도 들어와서 다달이 부어.”

낙태계는 들어본 적 있다. 노는 애들이 문란하게 굴기 위해 만들어진 것처럼 언급되었지만, 막상 자기가 거기에 끼고 보니 그게 아닌 것 같았다.

“자기 몸 보호하려고 하는거지... 피임이 늘 성공하는건 아니잖아. 아휴. 너도 씹새끼 때문에 결국 고생이네.”

어깨를 두들기며 그 애가 낙태계에서 공유되는 정보를 알려주었다. 병원은 어디가 싸고, 몸조리는 어떻게 해야 하고, 이게 효과가 직빵이더라 하는 이야기들. 저번에 어떤 새끼가 우리 계 여자애 강간하고 튀어서 같이 가서 줘팼다는 이야기라던가. 누가 걸레 소리 들었는데 의리가 있지 어떻게 그런 걸 두고 보냐던가, 그런 시덥잖은 이야기를 하고 있자니 불안한 마음이 가라앉았다.

그 애가 낙태계 사람들과 이야기해보기로 하고 헤어지고, 주말을 보낸 후 상담을 위해 보건소에 갔다. 하지만 예약이 다 찼기 때문에 내일 모레 가능하다는 말을 들었다.

불안이 치솟았다. 이 시간에도 아이는 하루하루 크고 있고 하루 1분 1초동안 수도 없는 불안속에서 흔들리는데 이틀을, 그리고 숙려기간을 포함하면 사흘을 견딜 수 있을까. 하지만 방법이 없었다. 비밀보장이 된다는 예약을 하고 집으로 돌아와 불안해하다가, 인터넷 커뮤니티의 유머 글을 보며 웃다가 친구들과 수다를 떨고, 또 불안해하다가 잠들었다.

그 와중에 낙태계 방에 초대받았다. 돈 안갚고 튀면 죽는다는 말이나 수술 언제하느냐는 말, 수술시 주의사항 같은 말이 환영인사와 함께 올라왔다. 혼자가 아니라는 생각에 불안이 조금 가라앉았다.

상담일 날, 상담을 하러 자리로 가자 분주하게 전화를 받고 서류를 뒤적이는 담당공무원이 보였다. 관련 상담원은 이 사람 한 명 밖에 없는 듯 했다. 상담원은 잠시 기다리라더니 10분 후에야 전화를 끊고 본론에 들어갔다. 시작부터 간결했다.

“임신중단하실건가요?”

고개를 끄덕이자 상담원은 이어 물었다.

“강요는 아니죠?”

어차피 이거 한다고 낙태 할 분들이 안 하는 거 아니라는 건 안다. 다만 아이를 낳고 싶은 분이 있을 경우 이런 입양처라던가가 있다는 것을 안내해드리고 있다. 그런 설명을 듣고, 상담이 끝나는 데에는 5분도 걸리지 않았다. 이것을 위해 이틀이나 기다렸다는 게 어이가 없었다.

“요식절차니까요. 여기 안내문 읽고 사인하시고, 짧은 영상 있는데 그거 보고 가시면 돼요.”

영상은 의미없는 예쁜그림이었다. 생명의 소중함. 그걸 누가 모르나. 알지만 할 수 없는 사람의 입장은 조금도 생각하지 않은, 아마도 낙태를 선택하는 사람은 무책임하고 잔인할 것이라는 편견이 녹아있는 듯한 메시지가 가득했다. 움직이던 태아를 떠올리면 가슴이 뜨끔거렸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낳을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할 수 있다면 입양이라도 보내고 싶지만, 어떻게 임신을 유지할 수 있단 말인가.

24시간이라는 의미 불명의 숙려기간이 지나고, 그녀는 확인증을 발급받았다. 당연하게도 확인증을 발급받기 위해 다시 방문해야 했다. 이 사이 버려지는 시간들, 차는 주수, 올라가는 임신중단 비용. 그것은 대체 누가 감당하나. 감당하는 사람은 그 누구도 아닌 그녀인데 누가 이런 것을 감당하도록 만드는가.

어쨌든 이제 시술이 가능하다. 새벽같이 발급한 확인증을 받아, 오후에 예약해둔 병원으로 가 본격적으로 설명을 들었다. 20주면 유도분만을 해야 한다. 사실상 출산과 같다. 이틀동안 분만을 유도하는 약을 넣고 3일째에 입원한다.

혼자 해야 하는 일이었다. 입원도 혼자 했다. 혼자 접수하고 혼자 병원에 누워 진통이 오기를 기다렸다. 통증도 혼자만의 것이었다. 수술실로 이동하는 침대 위에서 본 풍경도 발소리도 오직 그녀만이 기억하는 것이었다. 빠르게 정신이 어둑해지는 느낌도, 중간중간 들렸던 소리와 기계음과 어둑한 정신을 뚫고 느껴지는 통증도 전부 자신만의 것이고, 그 누구와도 공유할 수 없는 것이었다.

다시 눈을 떴을 땐 밝은 곳이었다.

“깼어?”

생각보다 정신은 바로 들었다. 약간 멍했지만 알아보기는 어렵지 않았다. 그 애랑 다른 낙태계의 멤버 한명이었다. 오늘 입원한다는 건 알았는데 그렇게 일찍 올 줄 몰랐다며 몸은 괜찮냐고 했다.

괜찮다고 하려고 했는데, 그 순간 갑자기 아래가 빠지듯이 아프고 허리가 저려왔다. 보니 나왔던 배는 들어가 있고 아래에는 기저귀 같은 것이 채워져 있었다. 지독하게 기운이 없고 아팠다. 그 애가 얼굴을 찌푸리며 그녀를 눕혔다. 해 봐서 아는데, 존나 아파. 누워. 대답도 못 하고 그녀는 색색거리며 천천히 베개에 기댔다. 그런데 몸이 축축했다.

“아, 얘 젖나온다.”

낙태계 멤버가 말했다. 그녀는 고개를 숙여 자신의 가슴을 쳐다보았다. 정확히 젖꼭지 위치가 젖어 있었다. 멤버가 회진돌던 간호사를 불러 젖이 나온다고, 패드 달라고 말하는 걸 흐린 눈으로 쳐다보면서 그녀는 허탈한 소리를 내뱉었다.

젖이 나온다니. 애도 없는데 젖이 나온다니. 웃기지도 않았다. 또 눈물이 나오는 것 같았다. 평생 울 것을 지금 다 우는 것 같았다. 간호사를 부르고 돌아온 멤버가 소리도 없이 눈물을 흘리는 그녀를 보더니 안타까운 표정으로 그녀의 손을 주물렀다.

힘들지. 울어. 그 말에 숨소리가 꺽 하고 높아졌다가 다시 가라앉았다. 울 힘도 없었다. 슬펐다. 슬프지만, 너무나 슬프지만 그렇다고 해서 임신을 계속할 수는 없었다. 어떻게 해도 임신을 중단하는 방법밖에 없었다. 그래도 중단을 할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하혈을 며칠동안 더 하고, 몸은 한 주 내내 아프겠고, 임신사실을 아는 학생들 모두가 손가락질하겠만, 성공적으로 임신을 중단할 수 있었어서 다행이었다. 그녀는 운이 좋았다. 정말 좋았다. 믿을 수 없겠지만, 정말로 그녀는 운이 좋았다.

<끝>

#낙태죄_전면폐지_2000자_엽편_릴레이 참여 작가 김휘빈

※ <한겨레>는 작가의 동의를 얻어 작품을 게재합니다. 해당 작품의 저작권은 작가에게 있으며 저작권자의 동의 없는 무단 발췌 및 전재를 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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