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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특별페이지 ‘낙태죄 폐지’ https://www.hani.co.kr/arti/delete
10월7일 정부는 임신 주수와 사유에 따라 임신중지를 범죄로 규정한 낙태죄 개정안을 내놓았다. 바로 다음날인 10월8일 오후 에스엔에스(SNS)에 하나의 해시태그가 올라왔다. ‘#낙태죄_전면폐지_2000자_엽편_릴레이’. 전혜진 작가가 제안하고, 문녹주 작가가 해시태그를 만든 뒤 지금까지 20명 가까이 되는 작가가 임신중지와 그 권리를 다룬 초단편 소설을 써 온라인 소설 플랫폼 브릿G와 에스엔에스 개인 계정 등에 올렸다. 같은 주제를 다채롭게 엮어낸 소설들을 작가들의 동의를 얻어 <한겨레> 낙태죄 폐지 특별 페이지에 싣는다.
※ 작품을 원문 그대로 싣습니다.
죄수들의 대화
서계수
두 여자가 벽을 사이에 두고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 남자, 뭐라고 했게요? 자긴 그냥 법을 지키는 거래요. 신고하는 데엔 사적 감정 따윈 없다나요. 그렇게 말하면서 웃더라고요.”
그 말을 하곤 나디아가 한숨을 쉬었다.
“웃었다니까요.”
전형적인 법 남용이다. 안나는 그렇게 생각했지만, 입 밖에 내지는 않았다. 대신 물었다.
“그다음은요?”
벽 너머의 상대에겐 보이지도 않을 것을 알면서도, 나디아가 어깨를 으쓱였다.
“여기 갇혔죠.”
나디아는 죄인이었다. 벌로 열 달간 매일 세 번의 식사를 제공받았고, 그릇을 깨끗이 비울 것을 강요당했다. 바깥에서 살 때의 생활에 비교하면 엄청난 호사였고, 이를 증명하듯 배는 나날이 불러갔다.
안나가 물었다.
“바깥에선 어땠어요?”
“배운 게 없어서 돈 벌기 힘들었어요. 남자를 사귀어 요리며 설거지, 빨래와 청소를 해주고 밥과 잠잘 곳을 얻었는데, 마지막으로 사귄 남자가 그 사람이었던 거예요.”
나디아가 말을 멈추었다가 이었다.
“운이 나빴다고 해야 할까요.”
잠시 침묵이 흘렀고, 안나가 입을 열었다.
“그 남자, 웃으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나디아가 대답했다.
“‘이 걸레 같은 년. 함부로 몸을 굴리더니 꼴좋다.’”
그리곤 덧붙였다.
“들은 얘기예요, 예전 남자한테.”
이번엔 안나가 한숨을 쉬었다.
“그 방에 뭔가 있어요? 시간 보낼만한 거요. 책이라든가.”
“책? 책은 많아요.”
나디아가 방을 둘러보았다. 방은 나디아의 연령대와 맞지 않는, 알록달록하고 글씨 큰 책으로 그득했다.
조용한 클래식 음악이 벽을 타고 물 흐르듯 넘어오고 있었다.
안나가 부탁했다.
“제목 좀 불러봐요. 무슨 책 있어요?”
나디아가 책장에서 두어 권을 꺼냈다.
“‘태어나서 행복해요.’”
“…다른 거 없어요?”
“‘엄마, 나 왜 죽였어?’”
안나는 신경질적으로 웃다 제풀에 입을 다물었다. 나디아는 웃지 않았다. 대신 책 한 권을 쓰다듬었다.
“아픈데요, 이 제목. ‘태어나서 행복해요.’”
“아파요?”
“나는 태어나서 행복한 적이 없었어요. 그냥 사는 게 다 이런 거겠지, 하고 살았어요. 자라면서 더 심해졌어요. 한 달에 며칠씩 피를 흘리는 거, 아프잖아요. 근데 피가 안 나오면 엿 된 거니까 불안해했거든요. 그렇게 사는 건 별로 좋진 않잖아요?”
안나가 생각에 잠겼다.
“…그렇…겠죠? 다른 삶을 살아본 적이 없어서 모르겠네요.”
다시 침묵이 흘렀다. 나디아가 제 배를 응시했다.
“개자식에게 반드시 갚아주겠다고 맹세했어요.”
“어떻게 갚아줄 거예요?”
“그건 차차 생각해야죠. 쫓아다니면서 죽고 싶을 만큼 괴롭혀줄까, 고민 중이에요.”
이번엔 나디아가 물었다.
“당신은 왜 갇혔어요?”
안나가 대꾸했다.
“수술을 해줬어요.”
“와, 당신 의사였어요? 많이 배웠겠네요.”
“그랬어요. 이젠 쓸 일이 없겠네요. 원래 의사 면허증이 취소되는 일은 참 드문데…밖에 나가면 먹고 살길이 막막해졌어요, 이젠.”
“누가 신고했는지 알아요? 당신도 나가서 갚아줘요.”
“어떤 남자가 신고했는데, 난 그 사람이 어디 사는지도 몰라요. 내 환자의 남자였어요.”
“당신 환자도 갇혔겠네요.”
분명 그럴 터였지만 안나는 이제 여유가 없었다. 자기 앞날만 생각하기에도 벅찼다.
나디아가 웃었다.
“옆방에 의사가 있다니, 이건 운이 좋은데요. 밖에서 만날 수 있으면 더 좋았을 텐데.”
안나가 어두운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안 돼요. 당신은 내 수술이 쓸모없어질 때가 되어서야 밖에 나갈 수 있을 거예요.”
나디아가 고개를 저었다.
“저는 밖에 나갈 수 있어요.”
안나가 미간을 찡그렸다.
“어떻게요?”
“벽을 통과해서 나가요. 처음 나갈 때만 힘들었어요. 목걸이를 걸고, 허공을 딛었죠. 그다음은 쉽던데요.”
안나가 제 등을 대던 벽을 짚었다.
나디아가 설명했다.
“내가 갇혀 있던 건 다 옛날 일이에요. 바깥 풍경은 보기 싫어서 자꾸 이리로 돌아오게 되더라고요. 여긴 나랑 비슷한 사람들이 많잖아요. 당신 같은 의사도 있고.”
잠시 후 안나는 할 말을 찾아냈다.
“갚아줄 수 있겠네요?”
나디아가 몸을 일으켰다. 다시 밖으로 나갈 생각이었다.
“사실, 벌써 한 번 갚아줬죠.”
그리곤 닫힌 문을 지나 사라졌다.
클래식 음악이 그치고, 안나는 고개를 숙였다.
당신은 못 배웠다고 했지. 그렇지만 1 더하기 1이 0이라는 것을 증명해냈어.
당신은 몸뚱이 외엔 마땅한 판돈조차 없었다. 그런데도 하나를 얻으려던 이들이 둘을 잃게 만들었지.
당신은 난제를 해결했고, 불리한 도박에서 이겼다.
안나는 두 손바닥으로 눈을 덮었다. 나디아와 달리 안나는 수년을 더 갇혀 있어야 했다. 나디아는 틀리지 않았지만…같은 방식으로 나갈 생각은 없었다. 밥을 잘 먹고, 잠을 잘 챙길 생각이었다.
당신이 그렇듯 나도, 할 수 있는 것들이 참 많다.
안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눈을 떴다.
<끝>
#낙태죄_전면폐지_2000자_엽편_릴레이 참여 작가 서계수
※ <한겨레>는 작가의 동의를 얻어 작품을 게재합니다. 해당 작품의 저작권은 작가에게 있으며 저작권자의 동의 없는 무단 발췌 및 전재를 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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