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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여성

[초단편소설,들 12] 종희

등록 2020-12-28 19:30수정 2020-12-28 19:48

#낙태죄_전면폐지_2000자_엽편_릴레이
클립아트코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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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가기 : <한겨레> 특별페이지 ‘낙태죄 폐지’ https://www.hani.co.kr/arti/delete

10월7일 정부는 임신 주수와 사유에 따라 임신중지를 범죄로 규정한 낙태죄 개정안을 내놓았다. 바로 다음날인 10월8일 오후 에스엔에스(SNS)에 하나의 해시태그가 올라왔다. ‘#낙태죄_전면폐지_2000자_엽편_릴레이’. 전혜진 작가가 제안하고, 문녹주 작가가 해시태그를 만든 뒤 지금까지 20명 가까이 되는 작가가 임신중지와 그 권리를 다룬 초단편 소설을 써 온라인 소설 플랫폼 브릿G와 에스엔에스 개인 계정 등에 올렸다. 같은 주제를 다채롭게 엮어낸 소설들을 작가들의 동의를 얻어 <한겨레> 낙태죄 폐지 특별 페이지에 싣는다.

※ 작품을 원문 그대로 싣습니다.
종희(終姬)

가양

▷00:05:34

“여보세요?”

“어. 종희야. 너, 오빠가 연락할 줄 알았어. 이렇게 연락할거면서 그동안은 왜 답장을 안 했어…너 그런 애 아니잖아. 그렇게 착하고 순진하던 애가. 이제 그 친구들인지 뭔지는 안 만나? 오빠가 그런 애들 이상한 애들이라고 했지. 무슨 여자들이 법을 바꾼다고 그렇게…….”

“됐고. 오빠 낙태죄 폐지 어떻게 생각해? 찬성하지?”

“뭐?”

“오빠가 그전에 그랬잖아. 지하철 임산부석 기분 나쁘다며. 그거 남녀역차별이라며. 임산부를 애고 뭐고 상관없이 그냥 여자 한 명으로 보니까 그런 생각도 한 거 아냐?”

“종희, 너 애 가졌니?”

“얘기가 왜 그렇게 튀어?”

“하… 너 애 가졌네. 딱 보니까. 딱이네. 어쩐지 갑자기 연락한 게 이상하더라. 몇 주래?”

“오빠 너 무슨 얘기 하는데. 아니 됐고, 낙태죄 폐지로 서명 받는데 링크 보낼 테니까 서명이나 해줘. 그 정도는 해줄 수 있지? 너무 미안하다며 나한테.”

“너 미쳤냐? 어디서 낙태를 입에 담아. 너한테는 생명이 그렇게 우스워? 누가 낙태 허락한데? 낙태할 생각은 꿈도 꾸지마.”

“……뭐?”

“하. 딱 맞아떨어지네. 여태껏 내 연락 다 씹다가, 왜 임신하니까 그래도 생각나는 게 나 밖에 없냐? 그 사이에 바람은 안 폈나보네?”

“무슨 소리 하는 거야. 오빠 개소리하는 건 여전하네. 내가 짚고 넘어갈 말 많은데 딱 한 단어만 짚고 넘어가자. 바람은 무슨 바람이야 우리 헤어진지가 언젠데.”

“야, 애 가진 애가 어디서 입에 그런 말을 담아. 말 예쁘게 못해?”

“미쳤어?”

“어허. 말 예쁘게 하랬지. 뱃속에 애 들어. 됐고, 만나자. 지금 집 앞으로 가면 돼? 병원부터 가야지. 병원에선 뭐래? 야. 와, 애를 가졌네. 드디어 아빠 되네, 나도.”

“됐다. 말이 통할 거라고 기대한 내가 등신이지. 끊어.”

“나쁜 말 쓰지 말랬…야, 끊기만 해봐. 야! 황종희! 야! 너 낙태 시도만 해봐 바로 신고…야! 인간적으로 우리 애는 건들지 말… 야!”

* * *

녹음파일의 재생이 끝났다. 등산복을 입은 종희의 얼굴이 퀭했다. 모자에 달려있는 랜턴 불빛이 비춘 뺨 한쪽에는 아직 채 가라앉지 않은 멍이 선명했다. 제각기 나름의 사연을 가지고 모인 여자들은 그대로 입을 다물었다. 종희의 차례가 아직 끝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진짜로 찾아왔더라고요. 이사도 했는데… 서울바닥 참 좁죠? 사실은 좁은 게 문제가 아니었어요. 같이 아는 언니 부부가 있는데 저 이사 간 곳을 물었던 모양이에요. 그 언니 부부를 탓하고 싶지는 않아요. 가서 종희 얘가 임신한 것 같은데 어딘지를 안 알려 준다… 혹시 낙태라도 생각하면 어떻게 하냐고 빌었나 봐요. 그러니까 어떻게 해요. 아무리 파혼했어도 애가 생겼다는데, 다시 만나야지 싶었나 봐요.”

“종희님한테 물어보기라도 했으면…….”

“뭐 그렇죠. 그랬으면 좋겠는데요. 여자들 의견은 쉽게 무시되잖아요. 안 물어봐도 되는 거죠. 게다가 임신을 했다니까. 왜 다들 그러잖아요. 니가 아무리 싫어도 애 아빠 인데 뭘 어쩌겠냐…….”

전 남자친구는 반나절 만에 이사한 종희의 원룸에 찾아왔다. 남자친구는 처음에는 나름 종희를 말로 가르치려 들었다. 종희가 낙태죄에 대한 얘기를 꺼낸 것이 종희가 임신했기 때문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기 때문일까. 모든 생명은 소중하다로 시작되는 연설에 종희는 임신한 적 없다고 대답했다. 애초에 오빠 피임은 꼬박꼬박했잖아. 종희가 말하면 전 남자친구는 당황한 표정을 짓다가 그랬다. 어, 근데… 결혼 얘기하면서부터는 어, 콘돔…구멍 뚫었어. 종희야. 그건 내가 미안하다. 그런데 너는 계속 애 안 가지겠다고 하고…근데 일단 가지면 내가 책임질 수 있으니까. 미안하다며 자신을 끌어안으려고 드는 남자친구에게서 종희는 도망쳤고 좁은 방안에서 이내 붙잡혔다. 경찰에 무단침입으로 전 남자친구를 신고했지만, 사귀는 사이에 싸운 일은 둘이 좋은 말로 해결하라는 답변을 얻었을 뿐이었다.

차라리 임신이 아닌걸 보여줘서 전 남자친구를 떨쳐내자고 생각했고, 그 결과로 임신 사실을 알았다. 구멍 뚫린, 아니 구멍 뚫은 콘돔 때문이었겠지.

“그래서, 죽기로 했어요.”

간장을 사발로 마시고, 일부러 앞으로 넘어지기를 수차례였지만 아직도 남아있는 남자의 흔적에 소름이 돋았다. 도저히 사랑으로 키울 수 없을 것이었다.

종희의 맞은편에 있던 여자가 주머니에서 지퍼 팩을 꺼냈다. 둘러 선 여자들의 손에서 손으로 알약이 전해졌다. 모두가 눈짓으로 인사했다. 랜턴을 끄고, 알약을 삼키면 모두 끝이었다. 낙태가 죄가 된다면… 차라리.

그 순간 여자들의 자의적인 멸종이 아주 천천하지만 분명히 시작됐다.

<끝>

#낙태죄_전면폐지_2000자_엽편_릴레이 참여 작가 가양

※ <한겨레>는 작가의 동의를 얻어 작품을 게재합니다. 해당 작품의 저작권은 작가에게 있으며 저작권자의 동의 없는 무단 발췌 및 전재를 금합니다.

바로가기: <한겨레> 특별페이지 ‘낙태죄 폐지’ https://www.hani.co.kr/arti/delete

바로가기 : 온라인 소설 플랫폼 브릿G #낙태죄_전면폐지_2000자_엽편_릴레이 셀렉션 https://britg.kr/novel-selection/1259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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