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여자들에게 필요한 건 부모 돈, 남편 돈이 아닌 바로 내 돈입니다. 남성 중심적, 가부장적인 사회에서 여성들의 ‘내 돈’은 단순한 ‘자산’이 아닌 주체적이며 독립적인 ‘나의 삶’을 위한 도구입니다. 1929년 ‘영국 여자' 버지니아 울프는 책 <자기만의 방>에서 자신이 하고픈 일을 하기 위해선 자기만의 방과 연간 500파운드가 필요하다고 했습니다. 요샛말로 하면 바로 나만의 공간과 생활비죠. ‘내돈내삶’은 여성들의 재테크에 머무르지 않고, 경제적 자립과 독립적 삶을 꾸려가는데 길잡이가 되는 여성 또는 모임의 이야기를 전합니다.
“내가 운전을 해야 할 때가 있어요. 차에 대해 물어보려고 하면 아빠나 오빠, 남자들밖에 없어요. 그런데 질문을 하면 ‘역시 여자라서 모르나’ 이렇게 생각하는 느낌이 은연 중에 드러날 때가 있어요. 그럴 때 편안하게 물어볼 수 있는 언니가 있으면 좋겠다 생각했죠.”
지난 19일 여성 이동권 프로젝트 ‘언니차’를 만든 기획자 이연지(36)씨를 만났다. 핸들, 타이어, 모형차 등 다양한 자동차 관련 소품들이 진열되어 있는 서울 성수동의 복합문화공간 마크69에서 자동차와 여성의 이동권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늦게 다니지 마라, 늦게 다니려면 옆에 보호자가 있어야 한다, 이런 말을 많이 듣잖아요. 여성을 보호 받는 사람으로 보고 운전도 권장하지 않아왔던 것 같습니다.” 이씨는 여성에게 운전을 권장하지 않는 사회적 관행이 있다고 봤다. 이 관행을 바꾸고 싶었다. 운전 경력 6년인 그는 지난해 동료 여성 2명과 함께 여성가족부 청년참여플랫폼 사업에 공모해 ‘언니차’를 시작했다. ‘아빠차, 오빠차가 아닌 언니차’가 슬로건이다. 30년차 여성 정비사에게 배우는 경정비 클래스, 세차 모임 등을 기획해 많은 여성들의 참여와 지지를 이끌어냈다. 현재 36명의 여성들이 ‘언니차’라는 이름 아래 모여있다.
언니차 프로젝트가 지난해 11월7일 연 자동차 경정비 원데이 클래스에서 참가자들이 경정비를 배우고 있다. 언니차 인스타그램 갈무리
남자는 1종 면허, 여자는 2종 면허?
운전을 해 가고 싶은 곳으로 마음껏 갈 수 있다는 건 삶의 자유도를 높여준다. 이연지씨는 운전을 시작하면서 대중교통망 안에서만 움직이던 자신의 동선을 더 확장할 수 있었다. 원하는 때 원하는 장소로 자유롭게 떠난다. 이씨는 “들고 다니던 가방도 작아졌다. 웬만한 건 차에 싣고 다닐 수 있으니까”라면서 활짝 웃었다.
대중교통에서 겪는 성추행 등 불쾌한 경험도 피할 수 있었다. “안전을 위해서라며 여성에게는 일찍 집에 들어가라고 합니다. 하지만 사실 택시 타고 일찍 들어가는 게 때론 더 위험합니다. 버스에서 옆자리 성추행이 간혹 일어나기도 하고요. 사실 차가 있으면 이런 것들을 피할 수 있죠.”
운전 문화, 자동차 문화와 성차별은 떼려야 뗄 수 없다. 운전면허를 따려고 운전학원의 1종 면허 과정을 등록했는데 ‘여자니까 2종 등록하라’는 이야기를 들어야했던 경험, 경차를 모는 여성 운전자에게 물리적 위협을 가했던 남성 운전자를 만난 일…. 모두 이연지씨나 기자를 비롯한 주변의 여성들이 실제로 겪은 일이다. “차 자체가 아무래도 남성의 것으로 인식되는 분위기가 있어요. 뭔가 기계에 관한 것은 남자가 잘 알 거라고 생각합니다. 자동차 커뮤니티에 가면 남자밖에 없죠. 대부분 수능이 끝난 뒤나 대학에 가서 운전면허를 따는데, 남자에겐 1종 여자에겐 2종을 권장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널리 쓰이는 말 속에선 여성 운전자가 겪는 차별이 얼마나 심각한지를 감지할 수 있다. 서툰 운전자를 통칭하는 말, ‘김여사'가 대표적이다.
지난해 11월 언니차 프로젝트가 실시한 원데이 클래스. 언니차 인스타그램 갈무리
그 동안 여성들은 어릴 적엔 아버지의 차를 타고, 결혼하면 남편의 차를 타는 시대를 지나왔다. 여성 자신의 활동 반경을 넓힐 기회는 적었고, 여성의 사회참여나 경제 활동에도 영향을 끼쳤다. 사우디아라비아의 예는 정확하게 이런 현실을 보여준다. 불과 3년 전까지 사우디아라비아는 여성에게 운전면허를 발급하지 않았다. 외국인도 여성이면 사우디에선 운전을 할 수 없었다. 여성들은 운전사를 따로 고용해 이동해야 했다. 인권 운동가들의 오랜 노력으로 2018년 6월 사우디아라비아는 여성의 운전을 처음으로 합법화했다. 당시 <뉴욕타임즈>는 “이번 조처로 여성의 사회 참여가 늘면서 경제도 활성화할 것”이라고 분석하기도 했다.
도로 위 무기는 바로 ‘지식’
언니차는 올해 운전자가 숙지하면 좋을 법률 지식이나 사고 처리 방법을 알려주는 세미나를 열 계획이다. 운전자 사이에 문제가 생겼을 때 고함을 지르거나 상대 운전자를 위협하는 운전자들이 많다. 이연지씨는 도로교통법 같은 생활 법률을 알면 사고가 나거나 다른 운전자와 다툼이 생겼을 때 보다 수월하게 해결할 수 있을거라 기대한다. 그는 “도로 위에서 논쟁이 붙었을 때 여성들에겐 쉽게 ‘당신이 운전을 못해서 그렇지’라고 하는데 사실 그렇지 않다. 법률 지식만 잘 알아도 사고가 났을 때 지혜롭게 대처할 수 있다”라고 했다. 예를 들어, 신호등 앞에 멈춰있는데 갑자기 뒷차가 범퍼를 들이받았다면 놀랄 필요가 없다. 도로교통법상 뒷차는 안전거리 확보 의무가 있기 때문에 추돌 사고가 난 경우 차 간 거리를 유지하지 못한 뒷차에게 과실이 있다. 법률 상식과 사고 처리 방법을 알고 있다면, 무턱대고 화를 내는 뒷차의 반응에 떨지 않고 대응할 수 있다.
당황한 탓에 불필요하게 “죄송합니다”를 연발할 필요도 없다. 이연지씨는 막말하는 상대 운전자에게 기 죽을 필요가 없다고 전했다. “목소리 큰 사람에게 무턱대고 ‘죄송합니다’라고 해선 안 된다. 잘못을 시인하는 꼴이 되기 때문”이라며 그는 도로 위에서 여성들이 더 당당해져도 된다고 했다.
김미향 기자 arom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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