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희수 전 하사의 복직과 명예회복을 위한 공동대책위원회’가 지난 27일 서울시청 광장에서 ‘변희수 하사를 기억하는 트랜스젠더 가시화의 날 공동행동’ 기자회견을 열었다. 기자회견에 참석한 시민들이 트랜스젠더 인권과 평등을 상징하는 분홍색·하늘색·흰색 우산을 들고 있다. 김혜윤 기자 unique@hani.co.kr
이 서체는 ‘트랜스젠더 길벗체'로 성소수자 활동가 길버트 베이커를 기리며 만들어진 영문 서체 ‘길버트체’의 한글판 서체 가운데 하나다.
트랜스젠더 가시화의 날 3월31일은 트랜스젠더의 삶을 세상에 알리는 날이다. 이날 전세계에서 트랜스젠더 존재를 사회에 드러내고, 이들이 직면한 차별과 혐오를 없애기 위한 다양한 활동이 펼쳐진다. 미국 트랜스젠더 활동가 레이철 크랜들이 제안해 2009년부터 시작됐다.
3월31일 ‘트랜스젠더 가시화’의 날을 앞두고, <한겨레>는 20대 트랜스젠더 청년 3명을 모아 성별 정체성 때문에 겪은 차별과 배제의 경험에 관해 물었다. 이들은 평범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동등하게 누려야 할 일상의 매 순간이 ‘시험대’가 됐다고 말했다. 신원을 보호하기 위해 인터뷰에 응한 트랜스젠더 청년들의 이름은 가명을 쓰거나 익명 처리했다.
지하철 화장실서 봉변당한 세실리아…“바깥 화장실 사용은 웬만하면 피해”
트랜스 여성인 세실리아(29·가명)는 지난 1월 지하철 공중화장실을 이용하다가 황당한 일을 겪었다.
성중립 화장실이 없는 까닭에 세실리아는 지정 성별(남성)을 따라서 남자 화장실을 이용하곤 했다. 그런데 여느 날처럼 남자 화장실에 들어가려던 순간 5명의 남성이 그를 붙잡더니, 여자 화장실에 밀어 넣었다. 그리고는 “여자 화장실에 ‘트젠’이 있다”며 지하철 역무원에게 신고를 했다. 역무원은 ‘저 남성들이 강제로 밀어 넣은 것’이라는 세실리아의 말을 믿지 않았다. 세실리아는 그 뒤 바깥에서 화장실 사용은 웬만하면 피한다고 했다.
트랜스젠더가 자신의 성별 정체성에 따라 화장실을 이용하면 ‘범죄자 취급’을 당하기에 십상이다. 자신의 성별 정체성에 따라 화장실을 이용한 트렌스젠더가 현행범으로 체포되거나 신고된 사례가 종종 있다. 지난 2018년 여성 공중화장실을 이용하던 트랜스 여성은 현행범으로 체포됐고, 2014년에는 성별 정정 절차를 밟던 트랜스 여성이 여탕 탈의실에 들어갔다가 경찰 조사를 받기도 했다.
그래서 세실리아처럼 많은 트랜스젠더는 바깥에서 화장실 자체를 잘 가지 않는다.
국가인권위원회의 ‘트랜스젠더 혐오차별 실태조사’를 보면, ‘화장실에 가는 것을 피하기 위해 음료를 마시거나 음식을 먹지 않았다’는 응답자가 39.2%였다. ‘부당한 대우나 불쾌한 시선을 받을까 봐 자신의 성별 정체성과 다른 성별의 시설을 이용했다’는 응답자는 40.9%였고고, ‘모욕적 발언이나 불필요한 질문을 들은’ 적 있는 이들도 16.5%에 달했다.
8년간 9번 신검받은 ㅇ씨…“성별 정체성을 ‘장애’라며 입증하라고 요구”
20대 후반의 논바이너리(성별 이분법에 속하지 않는 사람) 트랜스젠더인 ㅇ씨는 8년 전 처음 징병 검사를 받은 뒤 최근까지 9차례에 걸쳐 재신체검사와 이의신청절차를 반복해야 했다. ㅇ씨는 ‘논바이너리 트랜스젠더’라는 자신의 정체성을 증명하기 위해 주변 사람들의 진술서와 정신과 진단서를 제출했지만, 군은 ㅇ씨가 진짜 ‘성소수자’인지 끊임없이 의심했기 때문이다. ㅇ씨는 “군이 궁극적으로 원하는 것은 진술과 진단이 아니라 의료적 트랜지션인 것 같았다. 주변에는 군대 문제 때문에 예정에도 없던 의료적 트랜지션을 앞당기는 사례도 있었다”고 말했다.
지정 성별이 남성인 트랜스젠더에게는 ‘군대’가 가장 큰 장벽이다. 한국의 현행 ‘병역판정 신체검사 등 검사규칙’은 ‘성주체성 장애 및 성선호장애’를 보충역이나 전시근로역 판정사유로 제시한다. 국제적으로 ‘성주체성 장애’라는 용어가 ‘성별불쾌감(Gender Dysphoria)’ 또는 ‘성별불일치(Gender Icongruence)’로 바뀌는 상황인데, 여전히 군에서는 ‘장애’라고 부른다.
병역판정검사를 받는 트랜스젠더는 역설적으로 자신의 성별 정체성이 ‘장애’라고 입증해야 할 상황에 놓인다. 이를 위해서는 정신과에서 진단을 받거나, 외과적 트랜지션(지정된 성별의 외모, 신체특징, 성 역할 등을 자신의 성별 정체성에 맞추어 변화시켜나가는 과정)으로 ‘고환의 결손’ 등을 확인받아 비뇨기과에서 장애라고 판정을 받아야 한다. ㅇ씨는 의료적 트랜지션을 거치지 않아 신체검사를 수년에 걸쳐 반복했다. ㅇ씨는 “군은 성소수자를 아예 군 복무가 불가능한 존재로 여기면서 동시에 성소수자임을 끊임없이 의심하며 인정하지 않으려 했다. 군 조직이 성소수자에 대한 모순적인 태도를 취하는 것 같다”고 했다.
지정 성별 맞춰 연기해야 했던 빨간맛드링크…“내 존재 부정하는 스트레스”
논바이너리 트랜스젠더인 빨간맛드링크(26·가명)는 취직을 준비할 때마다 성별 정체성을 숨겨야 하는 상황이 힘들다고 했다. 대부분의 기업이 지정 성별대로 행동하고 사고하길 요구하기 때문에, 자신의 성별 정체성에 관해 끊임없이 거짓말을 해야 하는 상황에 놓인다는 것이다. “제 깊은 곳에서는 제가 남성도 여성도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제가 생각하는 모든 것을 부정해야 하는 거죠. 설령 면접을 잘 넘겨서 입사해도 회사 내부에서 제 존재를 부정해야 하고, 내가 아닌 존재로 연기해야 한다는 스트레스는 사라지지 않아요.”
대부분의 직장인 트랜스젠더는 자신의 성별 정체성을 직장에서 숨긴다. 빨간맛드링크는 “자신의 성별 정체성이 직업상의 불이익으로 이어질 것에 대한 두려움 탓이 크다”고 했다. 실제로 인권위 조사를 보면, ‘직장의 상사 및 동료들이 트랜스젠더라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고 대답한 응답자가 81%를 차지했다. 이 때문에 자신의 정체성과 관련해 화장실·탈의실·휴게소 이용 등에 어려움을 겪더라도 묵인하고 참는다. ‘대응을 하면 내가 트랜스젠더인 것이 밝혀지기 때문(72.1%)’이다.
‘변희수 전 하사의 복직과 명예회복을 위한 공동대책위원회’가 지난 27일 서울시청 광장에서 ‘변희수 하사를 기억하는 트랜스젠더 가시화의 날 공동행동’ 기자회견을 열었다. 기자회견에 참석한 시민들이 트랜스젠더 인권과 평등을 상징하는 분홍색·하늘색·흰색 우산을 들고 있다. 김혜윤 기자 unique@hani.co.kr
그렇게 숨겨도 많은 수의 트랜스젠더가 성별 정체성 때문에 괴롭힘에 시달린다. 특히 ‘용모·말투·행동 등이 남성 또는 여성답지 못하다고 반복적으로 지적’(26.6%)당하는 경우가 가장 많다. 머리를 기르는 등 ‘성별 표현’을 하는 세실리아는 직장 동료들에게 끊임없이 거짓말을 했다. 동료들은 세실리아에게 “머리를 왜 기르냐”고 끊임없이 물었고, 세실리아는 그때마다 ‘나중에 어디 기부하려고요’라고 웃어넘겨야 했다.
인터뷰에 응한 청년 트랜스젠더들은
포괄적 차별금지법의 통과가 시급하다고 입을 모았다. ‘성별·장애·나이·성적지향·성별정체성으로 인해 차별을 받지 않아야 한다’는 너무나 당연한 명제가 작동하지 않는 현실에 트랜스젠더를 비롯한 성소수자들이 무방비로 노출되어 있기 때문이다.
세실리아는 차별금지법이 ‘산소호흡기’와 같다고 했다. “차별금지법은 저희에게 산소호흡기와 마찬가지예요. 차별금지법 없이 살고 있는 저희는 산소호흡기 없이 버티는 중증 환자와 같습니다. 차별금지법은 누군가의 생명이 걸린 일이라는 마음으로 이른 시일 내에 입법이 이뤄졌으면 좋겠습니다.”
임재우 기자 abbado@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