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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여성

“비혼여성 정체성 공유하며 19년 동고동락”

등록 2021-05-13 04:59수정 2021-05-13 14:55

[한겨레 33살 프로젝트] ‘비정상 가족’은 없다
③ 여성 1인가구 생활공동체 ‘비비’
2012년 전라북도 진안 고원길을 함께 걷고 있는 비비 회원들. 비비 제공
2012년 전라북도 진안 고원길을 함께 걷고 있는 비비 회원들. 비비 제공

다양한 가족은 이미 우리 곁에 있어 왔다. 혈연·혼인으로 이뤄진 ‘건강가정’, 부모·자녀로 구성된 ‘정상가족’의 잣대에서 벗어나 있었을 뿐이다. 자발적 비혼부로 어렵게 입양한 아이와 행복하게 살아가는 아빠, 동성결혼 법제화를 기다리는 성소수자 커플, 1인가구 공동체를 꾸려가는 비혼여성들이 한 가족을 꾸렸다. 아직 법과 제도 안으로 들어가지 않았지만 평범한 삶을 꾸려가는 세 가족을 <한겨레>가 만났다.

19년.

2003년 여성단체 ‘전주여성의전화’ 소모임에서 만난 6명의 여성이 함께 공부하고, 여행을 가고, 생활공동체를 꾸려 마음을 나누며 살아온 세월이다. 비혼이라는 단어조차 낯설던 때, 20대 후반~30대 초반 직장인이었던 이들은 저마다 이력은 달랐지만 결혼하지 않은 여성이라는 정체성을 공유했다. 비혼·독립·여성을 주제로 한 달에 한 번씩 모여 공부했고, 2006년부터는 각자의 집에서 독립해 전주 반영구 임대아파트에 하나둘씩 모여 살기 시작했다. 그 무렵 소모임을 넘어 삶을 함께하는 비혼 여성 1인 가구 생활공동체를 꾸리게 됐다. 이름은 비혼들의 비행을 줄여서 ‘비비’.

비비와 같은 삶에 호기심을 느낀 이들의 문의가 이어지자 ‘우리뿐만 아니라 비혼 여성들이 함께 소통할 공간을 열어보자’고 의견을 모았다. 2016년 협동조합을 만들었다. 11명의 조합원을 모았고, 회비를 내는 회원은 50~60명가량이다. 처음 터 잡은 전주 아파트에는 이제 20~30명 비혼 여성 1인 가구들이 함께, 그러면서 동시에 독립해 산다.

누군가는 물을 수도 있겠다. 정기적으로 모이고, 공부하고, 여행하고, 고민을 나누지만, 친한 이웃으로 살아가는 것과 ‘생활공동체 일원’으로 사는 게 무엇이 다르냐고. 비비 구성원인 봄봄(활동명·50)과 주얼(활동명·48), 김란이(51)씨는 ‘함께했기 때문에 개인으로 살 수 있었다’고 했다.

“요즘에는 덜하지만 예전에는 결혼하지 않은 여성들을 사회적 루저로 보는 시선이 있었거든요. 차별의 시선을 토로할 수 있는 정서적 울타리를 비비라는 생활공동체가 제공해줬기 때문에, 제가 1인 가구로서도 독립적으로 살아갈 수 있었던 거죠.”(주얼)

“언제든지 서로를 위해 움직일 준비가 된 생활공동체가 있다는 사실 자체가 저에게 안전망이 되는 거죠. 저는 비비 덕분에 두려움과 불안을 극복하고 혼자 살 수 있게 되었어요.”(김란이)

2019년 11월 여성노인 공동체주택 연구를 위해 프랑스 바뇨를 방문한 비비 회원들. 비비 제공
2019년 11월 여성노인 공동체주택 연구를 위해 프랑스 바뇨를 방문한 비비 회원들. 비비 제공

4인 가족 모델을 중심으로 설계된 사회 속에서 1인 가구 공동체로 살아가다 보니 불편한 점도 적지 않다. 특히 구성원들 나이가 40대가 넘어가면서 몸이 약해지고 아플 때 그렇다.

“수술할 때 저희가 보호자로 입회하려고 하는데, 가족이 아니어서 보호자 자격으로 사인할 수 없는 거예요. 결국 원래 가족이었던 분이 연차를 내고 와서 사인하고 갔는데, 급박한 상황에서 보호자로서 권리를 행사할 수가 없는 거죠.”(김란이)

김란이씨는 정부가 4차 건강가정기본계획에 따라 추진할 법·제도 개선에 의료나 주거 문제 등에 있어 생활공동체를 꾸린 구성원들이 권리를 보장받을 수 있는 장치들이 담겼으면 좋겠다고 했다.

비비의 최근 관심사는 여성 노인 공동체주택이다. “비혼이라는 정체성보다 노인이라는 정체성이 우리의 삶을 가득 채울” 때가 다가오고 있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2019년 11월 영국 런던 ‘뉴 그라운드’, 프랑스 파리 ‘바바야가의 집’ 등 여성 노인들이 꾸린 사회적 주택을 방문해 어떻게 함께 살아가고 있는지 이야기를 들었다. 노인 한명 한명이 시혜의 대상이 아닌 독립된 주체로서 살 수 있는 공동체주택이 이제 비비의 다음 목표다.

비비도 가족일까. 인터뷰에 응한 3명 답이 모두 달랐다.

“가족 하면 어머니, 아내, 딸로 대변되는 여성의 감정노동과 육체노동의 숭고한 희생정신을 떠올리곤 하잖아요. 그냥 비비라고 부르는 게 나을 것 같아요.”(김란이) “가족이라는 단어는 다양성을 존중하지 않는 느낌이에요.”(봄봄) “한집에 살고 소득을 분배하는 전통적인 가족은 아니지만, 서로를 돌보고 지지하는 차원에서 보자면 가족의 한 형태가 아닐까요. 가족 개념이 확장되고 있는 거죠.”(주얼)

이들이 각자인 동시에 함께 살아가는 방식을 담아낼 새로운 단어가 아직 만들어지지 않은 것일지도 모르겠다.

임재우 기자 abbad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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