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프스 산자락 1300m에 숨듯이 자리한 그랑드 샤르트뢰즈 수도원.
가느다란 인연의 실에 끌려온 곳에서 나와는 전혀 다른 삶을 살아가는 이들을 만났다. 알프스 산자락 아래, 프랑스 혁명이 태동한 도시까지 나를 데려온 이들은 안느마리와 욜란다. 그들을 만난 곳은 2019년 여름 타지키스탄의 파미르 하이웨이를 넘을 때였다. 운전사가 딸린 사륜구동 차를 빌려서 전기와 수도 시설이 없는 마을의 열악한 민박집에 머무는 여정이 닷새간 이어졌다.
잠자리부터 씻는 일, 음식까지 불편한 점이 많은 여행이었다. 민박집 저녁 식사 자리에서 마주친 그녀들은 유쾌했다. 자기가 떠나온 곳과 여행지를 비교하며 불평하지 않는 점은 귀한 미덕이라 나는 그녀들이 좋았다. 타지키스탄을 지나 우즈베키스탄으로 넘어갔을 때도 그녀들과 종종 만나 밥을 함께 먹곤 했다. 그들은 타슈켄트에서 파리로 돌아가는 여정이었고, 그 사흘 후 나와 친구도 타슈켄트에서 인천행 비행기를 탈 예정이었다.
우리가 우즈베키스탄의 다른 지역을 여행하고 있을 때 그들에게서 연락이 왔다. “오늘 타슈켄트의 국립극장에서 오페라 라트라비아타를 봤는데 정말 좋았어. 이 즐거움을 너희와도 나누고 싶어. 1등석 티켓을 사서 매표소에 맡겨뒀어. 놀랄 만큼 싼 가격이니까 부담 갖지 말고 즐기길 바라.” 마음을 전하는 이토록 세련된 방식이라니! 나도 누군가에게 이런 선물을 하고 싶어! 그런 생각이 절로 들 만큼 멋진 선물이었다. 사흘 후 우리는 타슈켄트의 국립극장에서 라트라비아타를 즐겁게 관람했다.
그녀들은 다음해 4월부터 두 달간 일본을 여행할 예정이었다. 그중 한 달을 한국에서 보내기로 변경했다. 기다리던 그 만남은 역병이 창궐하는 바람에 취소되고 말았다. 그 후 안느마리는 어떻게 지내냐고, 어디를 여행하냐고 가끔 메일을 보내왔다. 게으른 나는 한참 후에야 답을 하곤 했는데 올해 투르뒤몽블랑(TMB) 트레킹을 마치고 귀국 비행기를 타는 곳이 스위스 제네바. 지도를 보니 제네바에서 안느마리가 사는 프랑스 그르노블이 차로 두시간 반 거리였다. 그르노블이나 제네바에서 만나 밥 한끼 먹으면 좋겠다 생각하면서 메일을 보냈다. 다음날 바로 답이 왔다. “제네바에 온다고? 내가 차로 데리러 갈게. 우리 집에 머물러. 일주일 정도 가능해? 욜란다도 내려오기로 했어. 우린 벌써 네가 오면 뭐 할지 계획을 세우고 있어.” 이렇게 해서 지난 7월 나는 그르노블의 안느마리 집에 머물게 되었다.
원래 누군가의 집을 방문할 때 내 원칙은 ‘피시즘’(Fishism)을 따른다. 피시즘이란? 생선을 갓 잡은 날은 신선하다. 다음날도 그런대로 먹을 만하다. 셋째 날은? 생선이 상해가며 냄새를 피우기 시작하니 버려야 한다. 그러니 타인의 집에 머무는 건 사흘 이내가 딱 좋다는 신념인데, 이번에는 일주일이나 있게 되었으니 고민이었다. ‘냄새가 나기 전에’ 자발적으로 탈출해야겠다 생각하며 첫날을 보냈다. 혼자 사는 안느마리의 집은 화려하진 않지만 그녀가 직접 그린 그림들 덕분에 예술적 감성이 배어났다. 남의 집에 머물면서도 부담이 크지 않았던 이유는 우선 저녁과 아침 식사가 안느마리의 일상 그대로이기 때문. 나라면 외국에서 손님이 왔으니 있는 솜씨 없는 솜씨 잔뜩 부려서 상다리가 부러지기 직전까지 차렸을 텐데. 그러느라 스트레스도 좀 받고.
안느마리는 평소 그대로에 그야말로 포크 하나 더 냈다. 첫날 저녁은 라타투이(가지·호박·피망·토마토 등에 허브와 올리브 오일을 넣고 끓인 채소 스튜)를 만들어 빵과 샐러드, 와인과 함께 먹었다. 다음날 아침은 남은 라타투이에 바게트와 치즈, 과일과 커피. 빵만큼은 꼭 아침에 동네 빵집에 가서 갓 구운 빵을 사왔다. 차리거나 치우는 데 별 시간이 들지 않는 간단한 식사라 내 마음도 편해질 수밖에. 아침 먹는 자리에서 안느마리가 일주일간의 일정을 쭉 브리핑했다. 산간마을의 영화제, 야외에서의 저녁 식사, 혁명 기념일 콘서트, 트레킹, 미술관과 박물관 방문 등 프로그램은 다양했다. 나의 ‘피시즘 원칙’이 적용될 바늘 같은 틈도 보이지 않는 계획이었다.
우리는 그르노블 시내 투어부터 시작해 전시를 보러 가거나 주변 산과 호수를 걸으며 며칠을 보냈다. 그 일주일의 하이라이트는 그르노블에서 30㎞ 떨어진 봉쇄수도원 방문이었다. 한번 들어가면 죽어서도 나올 수 없다는 봉쇄수도원. 알프스 산자락 1300m에 숨듯이 자리한 봉쇄수도원 그랑드 샤르트뢰즈 수도원은 주변 산의 이름을 땄다. 라틴어인 카르투시오 수도회로도 불린다. 1084년 성 브루노가 설립한 이후 1천년 동안 그 모습을 드러내지 않다가 2005년 독일인 감독 필리프 그뢰닝의 다큐 영화 ‘위대한 침묵’으로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수도원의 시간은 세속의 시간과 다르게 흐르는지 감독이 영화를 만들고 싶다는 청을 넣은 후 16년 뒤에야 수도원에서 답이 왔다. 이제 때가 왔으니 촬영을 원한다면 당신 혼자 들어오라고. 감독은 카메라 한대 들고 들어가 장비나 스태프도 없이 6개월간 머물며 촬영을 했다.
차를 세우고 2㎞ 남짓 걸어가야 하는 숲길에는 침묵 표시가 그려져 있었다. 높은 담장에 둘러싸인 수도원에서 일반에 공개한 유일한 장소는 작은 예배당 하나. 그 예배당은 십자가도, 스테인드글라스도, 봉헌대의 조각도 미니멀한 현대적 디자인이어서 신기했다. 예배당 문을 열고 나오니 놀랍게도 수도원 정문이 열려 있었다. 멀리 잔디를 깎는 수도사가 보이고, 얼마 후 트랙터를 몰고 젊은 수도사가 그 문을 통해 나왔다. 찰나로 문이 열렸다 닫힌 순간이었다.
수도원 앞에는 수사나 신부의 가족을 위한 작은 건물이 있었다. 그곳에서 책을 읽고 있던 독일인 여성은 수도사인 오빠를 만나러 왔다고 했다. 그녀의 오빠는 40년째 카르투시안 수도사로 재직 중인데, 가족이 면회 가능한 날짜는 1년에 딱 나흘. 이곳에는 현재 30명의 수도사와 신부가 머무는데 평균연령은 50대다. 그녀는 “카르투시오 수도회는 이제 세계 11개 나라에 370명만 남아 있는데 아시아에서는 유일하게 한국에 두 곳이 있다”고 했다.
다시 숲길을 걸어 내려와 박물관으로 향했다. 원래 수도원의 일부였던 건물이 수도회를 소개하는 박물관이 되었다. 카르투시오 수도원 건물은 어디를 가나 같은 구조를 지니는데, 수도사의 방이 원형 그대로 남아 있었다. 수도사의 방은 좁은 나무 침대와 창가의 작은 테이블, 기도대, 책상과 책꽂이, 난로가 전부였다. 이 수도회는 로마 가톨릭 중에서 규율이 가장 엄격하고 생활이 청빈하기로 유명하다. 그래서인지 하루 일정이 정말 가혹할 정도. 저녁 7시 반에 취침해 밤 11시 반에 일어나 새벽 3시 반까지 기도와 성경 암송, 다시 취침 후 새벽 6시 반에 기상해서 기도. 하루 세번의 공동 예배를 드리고, 나머지 시간에는 각자의 작업장에서 여러가지 일을 한다. 채소 재배, 목공, 성경 필사 등.
침묵과 고독을 통해 신에게 닿고자 하는 이들답게 이들의 일상은 침묵과 기도로 이루어져 있다. 다만, 일요일과 월요일 일부에 한해 침묵이 해제된다. 일요일에 수도사들끼리 함께 모여 점심을 먹으며, 월요일 오후엔 주변 산자락을 4시간 동안 산책하며 서로 대화를 나눈다. 식사는 하루 한번, 각 방에 딸린 작은 창을 통해 배식이 되는데 육류는 전혀 없다. 빵과 치즈, 과일과 물 정도. 내 삶에서 필수품인 휴대폰조차 이들은 소유할 수 없다. 사람이 이것만 갖고도, 이것만 먹고도 살 수 있는 걸까. 인간의 기본 본성을 거스르는 삶이 아닐까.
이들의 삶은 나와는 극단의 지점에 서 있다. 나에게 사랑은 보이는 존재가 있어야 가능하다. 나를 살게 하는 것은 얼굴과 이름을 지닌 구체적인 존재들이다. 나는 끝없이 돌아다니며 타인과 연결되고 접속되어야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다. 이곳의 사람들은 보이지 않는 존재를 사랑한다. 그들을 살게 하는 것은 얼굴도 이름도 알지 못하는 어떤 초월적 존재다. 이들은 한곳에 머물며 스스로를 고립시킨 후 기도로 다른 존재와 연결된다. 혈연도, 지연도 없는 전 세계의 사람들을 점처럼 만나 그 점이 이어진 긴 선을 따라 이동하며 살아가는 내 삶. 오직 신과 교감하기 위해 지상과 천상을 잇는 보이지 않는 줄에 기대어 한자리에 멈춘 채 살아가는 이곳 수도사들의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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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으로는 삐딱한 마음도 들었다. 세상은 엉망진창인데 이 삶은 자신만 구원하는 삶이 아닌가, 그런 삶은 종교인으로서 무슨 의미인 걸까. 물론 이들의 기도는 세상과 타인을 향하고 있으리라 믿지만. 자발적 가난에 따르는 청빈한 삶, 위대한 포기와 헌신적인 기도, 노동을 통한 겸손. 이토록 고독한 수행을 통해 인간은 어디까지 나아갈 수 있을까. 신이 있다면 이들의 기도에는 응답해야 하는 게 아닐까. 이들은 어떻게 신과 소통한다고 여길까. 어떤 심정으로 죽음을 맞을까. 답을 들을 수 없는 수많은 질문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이 시대에 이런 곳이 살아남아 그 정신을 이어온다는 것 자체가 내게는 하나의 기적 같았다.
먹먹한 마음으로 박물관을 나오는데 기념품 가게가 눈에 들어왔다. 신성의 공간에서 바로 세속의 공간으로 곤두박질 당한 기분도 들지만, 수도사들의 이 간소한 삶도 수도원에 돈이 없으면 불가능하다. 이 수도원의 주 수입원은 술 판매다. 18세기부터 판매해 온 샤르트뢰즈 리큐어. 무려 131가지의 약초를 넣어 ‘리큐어의 여왕’이라 불리는 고급 술이라는데, 유래가 재밌다. 앙리 4세 시대인 1605년에 어딘가에서 연금술사의 필사본이 발견됐다. 그 안에는 생명 연장의 비약이라는 엘릭시르를 만드는 레시피가 적혀 있었고. 그 레시피를 20년인가 연구해 마침내 만들어낸 술이 바로 샤르트뢰즈. 이 정도 이야기라면 아무리 술 못 마시는 나라 해도 안 살 수는 없다. 오리지널 55도짜리 두병을 바구니에 담았다.
샤르트뢰즈 수도원을 나서니 어느새 오후 6시가 넘었다. 다시 차를 몰아 피크닉 하기 좋은 산 중턱으로 올라갔다. 샐러드와 바게트, 치즈 몇가지와 로제 와인을 펼쳐놓고 앉아 맛있게 저녁을 먹었다. 안느마리와 욜란다가 근처 카페에서 기다리는 동안 나는 왕복 한시간 거리의 산 정상에 올랐다. 1867m의 봉우리 샤르망송. 정상에서 샤르트뢰즈 수도원을 보기 위해 일부러 올라온다는데, 나는 까맣게 잊고 있었다. 몽블랑을 찾아보느라! 산을 내려오니 안느마리가 수도원을 봤느냐고 물었다. 그제야 생각이 나 원통했지만, 정상에서 찍은 사진에 수도원이 희미하게 잡혀 있었다.
그 저녁에도 서른명의 수도사들은 작은 방에서 무릎을 꿇고 기도를 올리고 있었을 것이다. 자신의 안위가 아닌, 만난 적도 없는 타인의 안녕을 위해. 누군가 나를 위해 기도하리라는 믿음은 희미하기만 하지만, 때로 삶은 그토록 미약한 것에 의지해 이어지기도 한다. 지구가 이만큼밖에 망가지지 않은 건 어쩌면 저이들의 기도 덕분이 아닐까. 무신론자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생각을 하며 해 저무는 산을 내려왔다. 집으로 돌아가는 소들의 워낭소리가 알프스산맥 너머로 길게 번져가는 여름밤이었다.
글·사진 김남희 여행가
여행가 김남희는 2003년 이후 유목민의 삶을 살아오고 있다. 언젠가는 앉아서 유목하는 경지에 오르기를 바라면서, 지은 책으로는 ‘길 위에서 읽는 시’, ‘여행할 땐, 책’, ‘호의는 거절하지 않습니다’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