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1일 전남 완도군 보길면 부황리 보죽산 절벽에서 바라본 보옥 공룡알해변. 김선식 기자
‘자연미의 시인’ 고산 윤선도가 ‘물외가경’(세상 밖 멋진 풍경)이라며 반한 경치는 과연 어딜까. 인조가 1637년 청나라에 항복한 뒤, 윤선도는 육지에서 사는 것조차 부끄럽다며 고향 전남 해남에서 제주를 향해 떠났다. 항해 도중 우연히 발견한 전남 완도군 보길도. 그는 그 섬에 푹 빠졌다. 섬 한복판에 낙서재를 짓고 총 13년 머물렀고 거기서 생을 마쳤다. 그가 세연정, 동천석실, 곡수당 등을 지어 왕국처럼 꾸민 ‘부용동 윤선도 원림’은 현재까지도 보길도 대표 관광지로 불린다. 우리말을 멋들어지게 구사하며 자연을 노래한 윤선도의 마음을 훔친 ‘진짜 보길도’를 찾아 떠났다. 지난 11일 해남 땅끝 선착장에서 아침 8시30분 배에 몸을 싣고 두둥실 30분, 노화도 산양진항에 내렸다. 다시 차를 타고 20분, 보길대교를 건너 보길도에 닿았다.
“여기 주민들도 산책하러 그 길을 갔다 오면 다음 날 온몸이 쑤셔서 일을 못 해. 차라리 내가 추천하고 싶은 건 격자봉이야. 거기 정말 좋아. 거기나 다녀와.” 보길도 남쪽 예송리 해변 근처에서 그물을 손질하던 노인이 걱정스레 말했다. ‘어부사시사 명상길’ 들머리 가는 길을 물은 참이었다. 지난해 6월 개통한 ‘어부사시사 명상길’은 격자봉 산등을 따라 걷는 해안 절벽 숲길이다. 예송 갯돌해변부터 보옥 공룡알해변까지 약 5.2㎞ 거리다. 전날 해남 달마고도 숲길 약 18㎞를 걷고 온 터, 그 주민의 걱정을 가볍게 웃어넘겼다.
‘어부사시사 명상길’ 들머리 데크 계단. 김선식 기자
절정을 앞둔 붉은 동백꽃이 흐드러지게 떨어진 데크(목제) 계단을 올랐다. ‘어부사시사 명상길’ 전반부(‘큰구미’까지 3.1㎞)는 툭 하면 떨어져 있는 동백꽃 보는 재미를 줬다. 길바닥과 길가 모두 동백꽃이었고, 절벽에도 동백나무가 자랐다. 늦겨울에도 숲은 푸르렀다. 걸으면 걸을수록 난대림 숲을 탐험하는 기분이었다. 거친 바위로 바닥을 다듬은 구불구불한 산길과 해(와 바다)를 향해 휘어져 뻗어 있는 나뭇가지가 묘한 착시마저 유발했다. 길은 울창한 터널이었다가, 앙상한 입구였다가 빽빽한 나무 ‘철창’이었다. 초록 물기 머금은 기암과 절벽 수풀 사이를 가까스로 지나다 뱀 몸뚱어리처럼 길게 뻗어 나온 나무뿌리에 놀랐다. 길 위에선 마지막까지 사람 머리털 하나 볼 수 없었다. 산새는 갑자기 날카롭게 지저귀다가 푸드덕 날아갔다. 또다시 후드득 떨어졌을 동백꽃 길을 걸었다. 온몸은 이미 땀에 흠뻑 젖었다. 산짐승만 만나지 않았을 뿐 ‘정글 같다’고 생각했다.
‘어부사시사 명상길’에서 본 바다. 김선식 기자
천만다행으로 틈만 나면 광활한 남쪽 바다가 펼쳐졌다. 그건 숲속의 오아시스였다. 전반부 길에선 열 차례 정도 탁 트인 드넓은 바다를 만났다. 멀리 예작도와 당사도는 희미했지만 전망대에선 바람도 시야도 시원했다. 파도는 무시로 절벽 아래 기암을 간지럽혔다. 양식장을 지나는 배들은 바다에 솜사탕처럼 흰 선을 그었다. 숲에서 헤매다 바다 전망대에서 숨 돌리기를 반복했다. 이상하게도 쉬다 보면 숲이 그립고, 헤매다 보면 바다를 갈망하고 있었다.길 후반부(‘큰구미’부터 ‘보옥해변’까지 2.1㎞)는 빽빽하고 울창한 난대림을 지난다. 푸르고 어두우며 고요하다. 놀랍게도 파도 소리조차 들리지 않는다. 윤선도가 보길도 격자봉(433m)에 올라가 남겼다는 감상이 마음 깊이 와 닿는다. ‘산이 사방으로 둘러 있어 바닷소리가 들리지 않으며 물과 돌이 참으로 아름다워 물외가경이요, 선경이라.’ 바다가 지척인데 숲과 나만 존재하는 시간, 그 많던 산새는 어디로 간 걸까. 시간이 멈춘 듯한 ‘푸른 어둠’ 속에선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어부사시사 명상길’ 후반부 절벽 데크 길. 김선식 기자
무념무상을 지나 점입가경이다. 그 ‘어둠의 터널’을 통과하면 절벽 아래 바다를 향해 수백미터 데크 계단이 지그재그 이어진다. 멀리 보죽산과 치도를 바라보며 계단과 돌길을 오르내렸다. 점점 가까워지는 파도 소리가 반갑다. 길이 끝나고 있단 신호다. 약 3시간을 걸어 다시 해변으로 내려왔다. ‘차라리 다른 길을 가라’며 말리던 예송리 주민의 말을 인제야 이해할 수 있었다. 가볍게 볼 길이 아니었다. ‘혼자서는 다시 오지 않으리’라고 생각했다가도 마음은 금세 너그러워졌다. 돌아가면 또 생각날 것 같은 신비로운 길이었다. 짧은 시간 동안 시시각각 변하는 자연 속에서 꿈꾸는 기분이었다. 다른 여행객들도 그랬을까. 지난 30년 동안 보길도에서 택시 운전을 해온 박맹대(64)씨는 “그 길 걷고 택시 탄 사람들은 다들 경치는 매우 좋은데 조금 힘들다고 말한다”고 전했다.
보옥 공룡알해변. 돌탑 너머 보이는 섬이 치도다.
풀린 다리를 끌고 보옥 공룡알해변을 거닐었다. 돌멩이가 공룡 알처럼 크다. 해변 동백림 앞에 줄지어 쌓은 돌탑이 정겹다. 해변 주변에서 만난 한 주민(51)은 “우리 동네가 보길도에서 가장 경치 좋은 곳이야. 보죽산이 정말 좋아. 절벽 소나무까지는 20분이면 다녀올 수 있어. 후회 안 해. 얼른 다녀와”라고 말했다. 해발 195m 보죽산은 모양이 뾰족해 뾰족산이라 불린다. ‘그렇게 낮은 산이 좋아봐야 얼마나 좋겠나’라며 의구심이 일었지만, 그의 말엔 묘한 설득력이 있었다. 후들거리는 다리를 끌고 밭뙈기를 지나 등산길에 접어들었다. 결과적으로 20분이 아니라, 왕복 50분 걸렸다. 절벽 소나무까지 올라가서 봉우리까지 마저 올랐다.
보죽산은 ‘어부사시사 명상길’ 축소판이라 할만 했다. 들머리부터 동백나무 군락지다. 사람 한명 걸을 공간만 남기고 발 디딜 틈 없이 동백나무가 촘촘하게 뻗어 있다. 바닥은 붉은 꽃 무더기가 눈부시다. 그을린 구릿빛 피부마냥 매끈한 나무줄기는 서로를 껴안듯 휘감았다. 오솔길은 얼마 지나지 않아 절벽 길로 이어진다. 돌계단, 데크, 밧줄 난간을 따라 걸었다. 절벽 끝까지 올랐다. 너른 바다와 쥐 모양 섬 ‘치도’를 바라봤다. 세상 밖에 선 기분을 느꼈다. 뾰족한 산에서 바라본 풍경은 해안선도 오르막길도 모두 둥글었다. ‘어부사시사 명상길’처럼 난대림과 절벽, 바다가 이어졌지만 더 이상 조바심 내지 않았다. 어서 이 길이 끝나길 바라는 것처럼 부질없는 일도 없을 것이다.
고산 윤선도가 은거하며 유희를 즐긴 윤선도 원림 ‘세연정’. 김선식 기자
보길도로 오기 전까지 윤선도는 정치 소용돌이 한가운데서 ‘꽃길’과 ‘절벽’을 오갔다. 가문과 관직은 화려했으나 자주 유배 가거나 모함 당했다. 보죽산을 내려와 망끝 전망대 절벽에서 풀 뜯는 염소를 바라보다가, 윤선도가 노닐고 머문 세연정과 낙서재 정원을 여유롭게 거닐었다. 그제야 은거한 자의 풍류가 새록새록 와 닿았다. ‘어부사시사 명상길’과 ‘보죽산’의 감회가 깊었기 때문이리라.
보길도(완도)/글·사진 김선식 기자 kss@hani.co.kr
망끝 전망대 절벽에서 풀 뜯는 염소. 김선식 기자
보길도 여행 수첩
교통 전남 해남 갈두항에서 노화도 산양진항, 또는 완도 화흥포항에서 노화도 동천항으로 배를 타고 들어갈 수 있다. 모두 노화도에 내려 차를 타고 보길대교를 건너 보길도로 들어간다. 갈두항과 노화도 산양진항을 오가는 배는 양쪽에서 모두 아침 7시~저녁 6시 약 30분 간격으로 운항한다. 편도 뱃삯은 성인 기준 6500원, 차량 대략 1만8000원. 차를 예송해변에 두고 보옥해변까지 걸어 왔다면 길을 되돌아 걸어가거나 택시를 이용해야 한다. 두 해변 사이 직선 도로가 없어 반대 방향으로 돌아 나가야 한다. 택시비는 약 2만4000원가량 나온다.(문의 보길 개인택시 061-553-6262)
들머리 위치 ‘어부사시사 명상길’ 예송해변 쪽 들머리는 주변 이정표가 변변치 않다. 주소 ‘보길면 예송3길 40’ 근처에서 해변 따라 3분가량 걸으면 이정표와 들머리 데크(나무) 계단이 보인다. 보죽산 등산길 들머리는 주소 ‘보길면 보길로 1206-7’ 근처에 있다.
숙소 및 식당 보길면사무소 근처 바위섬횟집(061-555-5613)과 새연정횟집(061-554-5005)이 모텔을 겸한다. 노화도엔 갈꽃섬모텔(061-553-8888)이 있다.
김선식 기자
보길도(완도)/글·사진 김선식 기자 kss@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