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트’가 날아왔다. “ㅈㅇ(저요).” “제가 할게요.” “직접 받으러 갈게요.” 메시지도 쏟아졌다. 집 한쪽에 자리를 차지하고 있던 캠핑 의자 두 개를 중고 거래 플랫폼에 내놓았더니 벌어진 일이다. 최근 캠핑이 대세로 떠오른 덕분인지, 새것과 다를 바 없는 의자를 비교적 저렴하게 내놓아서인지 거래는 1분도 안 돼 성사됐다.
나에게는 필요 없어진 물건이지만 누군가에겐 쓸모가 된다. 중고거래 플랫폼이 확장세다. 코로나19의 영향이 크다. 최근 가장 주목받고 있는 중고 거래 앱 당근마켓과 번개장터 관계자들의 말을 종합하면 비대면 거래가 활성화하고, ‘집콕’ 시간이 늘면서 처분하고 싶은 물건이 쏟아져 나온 영향이라고 한다. 중고 거래 앱 중 사용률이 가장 높은 당근마켓의 이용자 수는 지난 1월 484만명에서 6월 890만명으로 5개월 만에 86.87% 증가했다. 사용자 연령대의 폭도 넓어졌다. 번개장터의 경우 가입자의 84%가 ‘엠제트(MZ) 세대’(밀레니얼 세대+제트 세대·1980년대 초반부터 2004년 출생한 세대)로 나타났다. 이들은 전체 거래액의 51%를 차지할 정도로 번개장터의 큰 손이다.
이들 중고거래 플랫폼은 단순히 거래를 중계하는 역할을 넘어 부가적인 서비스를 제공해 사용자를 빨아들인다. 당근마켓은 동네 사람들의 중고 거래를 연결하면서 일종의 커뮤니티 서비스를 제공하며 폭발적인 인기를 얻었다. 패션 브랜드 한정판부터 오프라인에서 구하기 힘든 빈티지 아이템까지 다양한 물품이 거래되는 번개장터는 개인의 취향을 중시하는 엠제트 세대의 놀이터로 기능한다.
중고 엘피(LP)는 취향을 거래하는 품목이기도 하다. 게티이미지뱅크
이 외에도 중고 거래 플랫폼은 거래자들의 요구에 따라 진화를 거듭한다. 지난 3월 정식 서비스를 시작한 비대면 중고 거래 플랫폼 파라바라는 직접 물건을 보고 살 수 없어 답답했던 구매자들의 갈증을 해소하는 데 목표를 뒀다. 파라바라가 운영하는 ‘파라박스’는 일종의 중고 거래 자판기다. 판매자가 물건을 파라바라 앱에 올리고, 다른 사용자의 하트를 2개 이상 받으면 이를 파라박스에 넣어 팔 수 있는 권한을 얻는다. 투명 유리 기기인 파라박스는 현재 서울 지하철 홍대입구역, 용산 아이파크몰 등 유동 인구가 많은 지역에 설치돼 있다. 지나가다 전시된 중고 물품이 마음에 들면 누구나 구매가 가능하다. 지난 27일 서울 명동에서 만난 김길준 파라바라 대표는 “내년 중반기까지 전국에 200대의 파라박스를 설치하는 것이 목표”라고 밝혔다. 파라바라가 창업 1년 만에 소비자의 관심을 끈 데는 1995년생인 창업자 김길준 대표의 감성에 이유가 있다. 중고 거래 플랫폼을 놀이터 삼는 엠제트 세대의 감성을 누구보다 잘 이해하는 이가 그다.
파라바라는 동네마다 중고 물품 가게가 서너 개씩 있을 정도로 중고 거래가 일상인 핀란드의 ‘잇세빨베루’와 비슷한 시스템이다. 잇세빨베루는 중고 가게 내부에 진열장을 여러 개 설치하고, 판매를 원하는 사람에게 이를 대여하는 곳이다. <핀란드 사람들은 왜 중고가게에 갈까?>를 보면 핀란드에는 잇세빨베루 외에도 다양한 형태의 중고거래 가게가 있다고 한다. 힙스터들이 모여드는 중고 의류 전문 가게부터 중고 육아용품만 모아놓은 가게까지 말이다.
김 대표는 한국의 중고거래 시장도 핀란드처럼 더 흔하고, 더 일상적인 형태로 발전할 것으로 내다봤다. “2018년 한국리서치 조사에 따르면 당시만 해도 최근 1년 사이에 중고거래를 경험한 사람이 6.9%밖에 되지 않았어요. 그런데 중고 거래라는 게 처음에는 약간의 장벽이 느껴지지만, 한번 시작하면 계속 거래를 하게 되거든요. 그런 점에서 한국의 중고 거래 시장은 확장될 여지가 무궁무진한 셈이죠.”
그의 예측대로 앞으로 더 많은 사람이, 더 소소한 물건을 내놓고, 오래된 것이 새것이 되는 선순환의 원이 거듭 그려질까. 이번 주 ESC는 중고 거래의 세계를 들여다봤다.
신소윤 기자 yoo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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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C] 뭔가 필요하면 ‘당근∙번개’ 하나요? 그렇다면 당신도 중고 덕후~
새것보다 중요한 건 ‘나’를 드러내는 것
합리적 소비 수단이자 취향 거래의 공간
오랜 시간이 지나도 튼튼한 구제 데님은 중고 거래 플랫폼에서 자주 거래되는 제품 가운데 하나. 게티이미지뱅크
늪(?)에 빠진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사다 보니 팔게 되고, 팔다 보니 사게 되더라.” “취향 좋은 번개장터 상점들을 돌아다니다 보면 다른 이의 에스엔에스(SNS)를 들여다보는 것보다 재밌다.” “당근에 빠지면, 이동할 때 당근마켓 앱 위치 변경을 해 그 동네에는 어떤 물건들이 팔리는지 들여다보게 되더라.” 3040 중심의 중고 거래 플랫폼 당근마켓부터, ‘엠제트(MZ) 세대’(밀레니얼 세대+제트 세대·1980년대 초반부터 2004년 출생한 세대)의 놀이터가 된 번개장터까지, 어떤 매력이 사람들을 중고 거래의 세계로 끌어들이는 걸까. 잘 팔고, 잘 사는, 그러나 결코 필요 없는 물건은 사지 않는 거래 철학이 있는 ‘중고 덕후'들의 거래 뒷얘기를 들어봤다.
일러스트레이터 권남희(45)씨는 “산업 쓰레기를 더 만들고 싶지 않아서” 중고 거래를 한다. “개인적으로 아름다운 물건을 정말 좋아하지만, 소용없이 아름답기만 하거나, 너무 예쁘지만 제가 이미 가지고 있는 물건은 또 안 사려 해요.”
‘당근러’(당근마켓 이용자를 이르는 말)인 그는 여행 중에도 ‘당근을 한다.’ “지금 제주에 있는데, 두 달 정도 머물 계획이에요. 와인 잔이 필요해서 와인 숍에 갔더니 하나에 1만8000원인 거예요. 제 기준에는 합리적인 가격이 아니어서 이 지역 당근 판매자를 검색해서 2개 5000원 주고 사 왔죠.”
뉴트로 열풍을 타고 빈티지 소품도 인기가 많다. 빈티지추억다락방 제공
권씨가 기억하는 그의 첫 중고 거래는 20살 때 서울에서 자취를 시작하며 어머니와 함께 종로구 동묘시장에서 냉장고를 4만원에 산 것이다. 이후 옛 물건이 주는 정취에 빠져들었다. ‘한물간’ 제품은 대량으로 쏟아지는 물건처럼 천편일률적이지 않다는 것도 매력적이었다. 물건의 역사를 탐색하다 보면 오래된 물건이 새것보다 더 좋은 경우도 많았다. “최근엔 당근마켓에서 구제 리바이스 청바지를 사 입었어요. 지금은 문을 닫은 미국의 데님 제조업체인 콘밀사 원단을 사용한 리바이스 청바지였는데, 진짜 튼튼하고 질이 좋더군요.” 온라인 중고의 세계에 ‘중고나라’만 있던 시절부터 중고 거래를 시작한 그는 중고 물품을 사는 데 몇 가지 원칙이 있다. “기왕이면 플라스틱이 아주 조금 붙어 있으면 좋겠고, 옷을 고를 때는 웬만하면 면이나 리넨을 사려고 해요. 취향이라는 게 굳어져서 유행 타는 물건도 잘 사지 않게 되고요. 대신 물건을 하나 사면 중복으로 투자하지 않도록 가치 있고 좋은 걸 사려고 해요.” 그는 필요한 물건이 있으면 새 상품을 찾기보다 중고 거래 플랫폼을 먼저 검색한다. 당장 급하진 않지만 원하는 물건이 있을 땐 중고 거래 사이트든, 오프라인 중고 숍이든, 심지어는 길거리에 버려진 물건이든 나올 때까지 기다리는 편이기도 하다.
중고 거래는 단순히 누군가 쓰던 물건을 저렴하게 구매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권씨처럼 지구를 위해 물건의 쓸모를 재확인하는 행위이기도 하고, 자신과 취향이 같은 사람을 발견하고 그것을 거래하는 것이기도 하다. 취향의 연결이라는 즐거움을, 그것도 동네라는 작은 커뮤니티에서 실현할 수 있게 한 것은 당근마켓의 가장 큰 성과다.
권씨는 최근 카세트테이프, 시디, 클래식 카메라 등 자신에게 필요 없는 물건을 판 돈으로 중고 엘피(LP)를 샀다. “재즈, 올드 록 등 옛 음반을 모으는 게 오래된 취미 생활인데, 어쩌다 같은 사람을 세 번이나 만났어요. 그러니까 계속 같은 사람한테서 중고 물건을 산 것이지요. 그러다 보니 서로 엘피 다루는 법, 턴테이블 관리하는 법 등 정보를 나누게 되고, 필요한 음반을 공유하며 혹시 구하면 팔라고 얘기하기도 했죠.” 새 물건을 살 때 하기 힘든 경험이다. 중고 장터에선 의외로 자신의 취향과 같은 이를 만날 가능성이 크다. 엠제트 세대가 중고 장터에 빠지는 이유 중 하나다.
유명 브랜드의 스니커즈 ‘리셀’(재판매) 시장이 커지며 엠지트 세대 사이에 중고 거래 문화가 더 일상화했다. 프랑스 패션 브랜드 메종 마르지엘라의 ‘하이탑 플레어 러너스’. 메종 마르지엘라 누리집 갈무리
권씨가 필요한 물건이 있을 때 당근마켓 앱을 켠다면, 대학생 이광현(26)씨는 찾는 물건이 있을 때마다 번개장터 앱을 연다. 그는 에스앤에스를 하듯 번개장터에서 자신이 좋아하는 스타일의 판매자를 팔로잉하며 종종 들여다본다. 글로벌 패션 브랜드 메종 마르지엘라, 업사이클링 브랜드 프라이탁 등을 좋아하는 그는 “학생이라 넘보기 힘든 가격대의 브랜드인데, 중고 거래를 통해 하나둘 모을 수 있다”고 말했다.
중고 거래 7년 차인 그는 애타게 찾아 헤매던 물건을 중고로 구한 적이 있다. “밑창은 검은색이고 위는 아이보리색인 마르지엘라의 시큐리티라는 스니커즈였는데, 제 사이즈가 없어서 한 달을 넘게 찾다가 겨우 번개장터에서 찾았어요.” 이때의 짜릿한 경험 덕분에 중고 덕후가 되었다. “이제는 사고 싶은 물건이 있을 때는 중고 거래 앱을 먼저 찾아요.”
업사이클링 브랜드 프라이탁의 가방. 프라이탁 누리집 갈무리
이씨에겐 새것인지, 남이 쓰던 물건인지는 중요한 기준이 아니다. “새것을 사도 결국 중고가 되는데, 어차피 그런 거라면 굳이 비싸게 값을 치르고 새것을 사고 싶지 않아요.” 다양한 브랜드를 경험하고 취향의 폭을 넓히는 것도 그가 중고 거래 앱을 사용하는 목적이기도 하다. 향수 마니아이기도 한 그는 “이런저런 향수를 뿌려보고 싶은데, 한 통을 다 사면 비싸기도 하고 다 쓰지도 못하기 때문에 주로 중고로 거래해요. 남은 용량에 따라 가격도 합리적으로 매길 수 있고, 뿌려보고 제 스타일이 아니어도 팔기 쉬운 편”이라고 말했다. 중고의 세계에서 자신의 취향을 탐색하고, 구체화하는 여정을 하는 셈이다.
한편 구매자로서 공고한 취향을 쌓아 올리다 판매자가 된 이들도 있다. 박하나(가명·35)씨는 ‘도리아잡화점’이라는 이름의 번개장터 상점을 운영한다. 박씨는 요리 블로그를 운영하면서 빈티지 그릇을 모으기 시작했다. 한식을 주로 만드는 그는 “요즘 유행하는 수입 그릇보다는 1980년대 어머니들이 쓰던 국내 빈티지 제품이 잘 어울려서 하나둘 사 모았다”고 한다. 수집한 것이 쌓이면, 덜 쓰는 제품들은 팔고 또 다른 빈티지 그릇을 들이곤 한다. 한결같은 취향으로 정돈된 그의 상점을 들여다보면 어쩐지 단정한 부엌 한쪽을 엿보는 듯한 느낌이다.
3040의 추억을 자극하는 국산 빈티지 그릇. 도리아잡화점 제공
번개장터에서 ‘빈티지추억다락방’을 운영하는 최지영(가명·44)씨 또한 중고 거래가 취미다. 프리랜서 스냅 사진 작가이기도 한 그는 필름 카메라를 모으다 골동품 수집으로 취미를 확장했다. 그의 상점엔 수십년 전 초등학교 교과서, 1980년대 전화기 등 빈티지 제품이 가득하다. 최근 뉴트로 열풍으로 20~30대 초반의 고객이 많이 늘었다고 한다. 그는 중고 거래의 즐거움에 대해 “누가 보기에는 쓰레기일 수 있는데 이게 얼마나 예쁜 것인지 알게 되고, 의외의 가치를 함께 알아가는 재미가 있다”고 설명했다.
사람들의 향수와 호기심을 자극하는 옛 전화기. 빈티지추억다락방 제공
이들이 말하듯, 이 시대의 중고 거래는 더는 허름하고 남루한 것이 아닌 합리적 소비의 수단이자 취향을 나누는 장으로 기능한다. 이런 중고 거래 시장의 변신과 확장에 대해 트렌드 컨설팅회사 트렌드랩 이정민 대표는 “요즘 세대에겐 물건의 가치가 새것에 있지 않다. 물질이 풍요롭지 못한 시대를 거친 기성세대의 경우, 새것에 큰 가치를 두고 중고나 남의 물건에 부정적인 인식을 가지고 있었지만, 최근엔 특히 엠제트 세대를 중심으로 중고에 대한 고정관념이 옅어졌다”고 설명했다.
이들에게 새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취향과 관심사를 어떻게 표현하느냐다. 이 대표는 “취향이란 건 소비의 경험에서 나온다. 단순히 비싼 걸 사본 게 아니라 자신을 잘 드러내는 것을 얼마나 잘 사는지가 관건”이라고 덧붙이기도 했다.
신소윤 기자 yoon@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