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23일 경남 남해군 임진성 돌담 위를 걷고 있는 신소윤 기자(사진 왼쪽)와 서재심 문화관광해설사. 정용일 기자 yongil@hani.co.kr
수많은 걷기 예찬론자들이 있었다. 장 자크 루소는 <고백록>에서 “걸음을 멈추면 생각도 멈춘다”고 썼다. <걷기의 인문학>을 쓴 리베카 솔닛은 “세상을 두루 살피려면 걸어 다녀야 하듯, 마음을 두루 살피려고 해도 걸어 다녀야 한다”고 말했다. 걷는다는 것은 단순히 이곳에서 저곳으로 이동하는 게 아니라 누군가에겐 철학이고, 문학이고, 투쟁의 행위였다. 독재자를 무너뜨리기 위해 도보 투쟁을 선택한 민중의 역사를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자, 그러니 이제 힘들었던 2020년이 지나고 마침내 새해가 밝은 만큼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보편적이고 혁명적인 행위인 ‘걷기’에 빠져들어 보자…라고 쓰자니 사실 너무 거창하다. 진짜 하고 싶은 얘기는 해가 바뀌어도 여전히 갑갑한 지금, 해방감을 성취할 수 있는 가장 소박하고 유일한 방법이 어쩌면 걷기가 아닐까 싶어서 도전해보자는 것이다. 그렇다. ESC 2021년 제안은 ‘걷기’다.
지난 주말 집 앞 개천가를 걸었다. 아이, 어른 할 것 없이, 심지어 강아지들까지 모두 걷고 있었다. 걸을 수만 있다면, 누가 더 잘하고 못한다는 것 없이 이토록 공평하게 즐길 수 있는 일이 얼마나 될까. 여행은커녕 집 앞 카페나 식당도 가기 힘든 요즘 운신의 폭이 지나치게 협소해졌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그날 나는 어느 때보다 가장 멀리, 가장 오래 나아갔다. 오로지 두 다리로만 말이다. 그날 개천가 도보는 지난해 1박2일 걷기 여행의 연장선상이었다.
지난해 12월23일과 24일 걷기 위해 경남 남해로 떠났다. 모처럼 멀리 떠나왔는데, 날씨가 도와주지 않았다. 구름과 미세먼지가 잔뜩 꼈다. 수평선의 경계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희뿌연 하늘과 바다는 꼭 지난 한해를 은유하는 것만 같았다. 그리고 울적하게도 다음날 일기예보 또한 ‘흐림’이었다. 우리 인생이 이와 같은 게 아닐까 싶어 우울한 감정에 빠졌다.
반쯤 포기한 마음으로 길을 따라 걸었다. 마음을 비우니 사소한 것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누군가 소담하게 길러 놓은 마당 한쪽 작은 배추밭, 담장 밖으로 새어 나오는 할아버지의 기침 소리, 처음 보는 이에게 말을 걸어오는 길고양이들, 보드라운 모래밭에 남은 발자국들. 오직 걸어야만 만날 수 있는 것들.
그렇게 아침나절을 보내다 보니 거짓말처럼 해가 비쳤다. 정박한 고깃배 앞에 잠시 앉아 있는데, 반짝이는 해수면 아래로 은빛 멸치 떼가 인사하듯 와르르 나타났다 사라졌다. 전전긍긍했던 마음도 구름과 함께 걷혔다. 그 햇살은 제법 반갑고 벅찼던 터라 의미 부여를 하자면, 어제가 팍팍했던 2020년이라면 화창해진 오늘은 다가올 2021년 같았다. 마음속 응어리졌던 온갖 걱정거리가 자박자박 걷는 동안 구름 걷히듯 사라졌다. 고민 해결사로 걷기만한 게 없는 듯했다. 이유는 자명하다. 한걸음 옮길 때마다 신체에 더 집중하게 되면서 내면의 소리에 귀 기울이게 되는 것이다. 결국 해결책은 내 안에 있다. 2021년도 쉽지만은 않을 터. 내 마음에 닿는 법, 걷기를 추천한다.
이번에 전국의 좋은 길을 샅샅이 뒤져 소개했지만 사실 가장 좋은 길은 언제든, 걷고자 하는 마음만 먹는다면 당장 나가 걸을 수 있는 길일 것이다. 팬데믹에서 좀 홀가분해지면 더 열심히 걸으러 떠나보자. 그 길에서 우리가 만나면 좋겠다.
신소윤 기자 yoo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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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C] 걸었다 푸른 바닷길! 모든 게 해결되더라
걷기 코스 남해바래길 총231㎞
그중 섬노래길 등 걸어 보니
초록빛 시금치밭부터 설경 같은 해변까지
다채로운 길 잔뜩 품고 걷는 섬, 남해
설리해변. 정용일 기자 yongil@hani.co.kr
어떤 사람들은 남해가 섬이라는 사실에 놀라곤 한다. 남해라는 이름 때문에 남쪽 끝, 바다와 접한 육지 끝자락을 상상하게 되기 때문이다. 틀린 건 아니지만 경남 남해군은 그 육지 끝에서 다리로 이어진 섬이다. 본섬인 남해도와 창선도 외에 조도, 호도, 노도 등 3개의 작은 유인도, 79개의 무인도로 이뤄져 있다.
사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인구 4만의 적요한 섬은 어느 곳보다 걷기에 즐겁다. 섬이지만 임야 면적이 전체 69%에 이를 정도로 산의 비율이 높다. 평온하게 쫙 펼쳐진 바다부터 고깃배 정박한 고즈넉한 어촌, 산을 깎아 만든 계단식 논밭까지 위로 아래로 눈이 쉴 틈이 없다.
남해에는 2010년 첫 문을 연 남해바래길이라는 걷기 코스가 있다. 최근 리모델링을 거쳐 다가오는 11월 시즌2 격으로 ‘바래길2.0’으로 정식 개통된다.(현재 시범 개통 중) 남해군 10개 면을 모두 경유하는 바래길2.0은 본선 16개 코스, 지선 3개 코스 총 231㎞인데, 이 본선 가운데 11개 코스는 지난해 10월 개통한 남파랑길 36~46코스와 겹친다. 해안부터 숲속 작은 오솔길까지 코스가 다채롭다 보니 ‘한달살기’를 하며 코스를 완주하고 돌아가는 여행객도 많다고 한다.
지난해 12월23일과 24일 남해 남서쪽 평산항부터 임진성까지, 남쪽 송정솔바람해변부터 설리해변까지 걸었다. 두 길은 남파랑길 44코스(남해바래길 12코스)와 남해바래길 8코스 일부 구간이기도 하다.
남해바래길 8코스 출발점인 평산항 인근. 정용일 기자 yongil@hani.co.kr
사실 이번 여행은 불안한 마음과 함께 시작했다. 구름이 잔뜩 낀 하늘에 미세먼지까지 심했다. 탁 트인 바다를 상상했건만 누렇고 희뿌연, 오래된 흑백사진 같은 날씨였다. ‘신년호 취재인데 어떡하지?’ 한 치 앞도 보기 어려운 시야에 ‘취재 일정을 잘못 잡은 건가’, ‘내일도 날이 흐리면 어쩌나’ 조바심이 들었다. 하지만 어찌할 방도가 있나. ‘걸으면 해결된다’는 라틴어 경구를 생각하며 일단 걸어가 보기로 했다.
불안한 마음을 시금치가 위로했다. 이 계절엔 남해 곳곳은 시금치밭이다. 평산항 인근 남해바래길작은미술관 앞에 자리 잡고 앉은 주민들은 시금치 분류 작업을 하느라 분주했다. 부지런히 시금치를 다듬어 ‘보물초’라고 쓰인 커다란 봉투 안에 담았다. 시금치밭 옆길을 걷다 보면 밭에서 작업장으로 운반하다 떨어진 시금치가 길 한가운데 낙엽처럼 뒹굴고 있었다. 어디에도 없는, 시금치 지르밟는 걷기 코스란 생각에 어쩐지 웃음이 터졌다. 남해군에 따르면 남해 시금치밭이 전국 노지 시금치 재배 면적의 약 40.7%를 차지한다고 한다. 섬의 겨울 풍경을 좌우할 만하다. 모처럼 초록을 보며 걸으니 삭막한 계절이 뒤로 달아나는 느낌이다.
남해바래길작은미술관 앞에서 시금치 분류 작업 중인 주민들. 정용일 기자 yongil@hani.co.kr
섬마을 집들은 제주의 그것처럼 야트막한 돌담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돌담 밖으로 삐죽 솟아오른 나뭇가지에 유자가 주렁주렁 열렸다. 동행한 서재심 문화관광해설사가 “예전에는 유자나무를 대학나무라고 불렀다”고 설명했다. 유자나무 한 그루를 심어 유자를 수확하면 국립대 등록금 훌쩍 넘게 수익이 날 정도로 비싼 과일이었다는 것이다. 요즘처럼 개량하지 않은 예전의 유자는 기르기가 까다로워 고부가가치가 매우 높았다고 한다. 골목에는 유자를 밑천 삼아 육지로 떠난 이들이 돌아오지 않은 빈집들이 드문드문 있었다. 돌담 아래 웅크린 집에 어떤 사연들이 깃들었을까. 차로 휑하니 지나버렸다면 보지 못할 풍경, 생각지 못했을 이야기들이 이어진다.
임진성 인근 숲속 오솔길. 정용일 기자 yongil@hani.co.kr
마을을 지나 야트막한 구릉으로 연결된 길이 펼쳐졌다. 낙엽이 푹푹 밟히는 숲속 오솔길을 걸어 올랐다. 남파랑길과 바래길 코스임을 알려주는 파란색과 빨간색 화살표와 리본이 코스 곳곳에 표시되어 있긴 했지만, 미리 깔아둔 바래길2.0 앱이 꽤 도움이 됐다. 앱을 켜고 ‘길 따라가기’ 기능을 활성화하고 걸으면, 현재 코스를 잘 걷고 있는지 확인할 수 있었다. 노선에서 30m 이상 벗어나면 ‘노선이탈’ 알람이 울리고, 사용자가 오래 걷지 않을 때는 알림이 울려 걷기를 독려했다.
멀리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임진성에 올랐다. 평산포 북쪽 낮은 구릉 위에 있는 임진성은 임진왜란 때 왜적을 물리치기 위해 돌을 쌓아 지은 성이다. 산을 따라 바깥은 흙으로 안쪽은 돌로 쌓았는데, 지금은 바깥쪽 흙으로 지은 성은 흔적만 조금 남아 있고, 둘레 300m 정도의 성만 남아 있다.
성의 돌담을 따라 찬찬히 걷다가 고실치 고개를 지나 남해 스포츠파크 방향으로 향하는 길, 그 길에 서니 서쪽으로 넘어가는 해가 곧 수평선 아래로 떨어질 듯 보였다. 하지만 여전히 날씨는 흐렸다. 임진성에 오르면 내려다보인다는 끝내주는 풍광도, 잔잔한 바다 위로 일렁이는 노을도 감탄을 자아낼 틈 없이 빡빡하게 낀 구름 뒤로 사라져 버렸다.
장항해변. 정용일 기자 yongil@hani.co.kr
다음날, 역시나 흐린 아침. 이왕 이렇게 된 것 계획을 수정해 남은 일정은 걷고 싶은 대로 실컷 걷다 가보기로 했다. 원래 계획은 남파랑길 44코스를 꼼꼼히 완주하는 것이었다. 산과 바닷길이 적절히 섞인 44코스는 고즈넉한 길을 따라 걸으며 남해의 전경을 바라보기 좋은 코스다. 하지만 날이 흐리다 보니 좀 더 바다 가까운 길을 걷고 싶었다. 남해바래길 탐방안내센터에서 얻은 지도를 펼치고 바다와 가장 가까이 걷는 길을 찾았다. 남해에서 가장 큰 항구인 미조항을 중심으로 연결되는 남해바래길 8코스는 해변을 따라 크고 작은 섬들을 보며 걷는 길이다. 이 코스 가운데 송정솔바람해변부터 설리해변까지 걸었다.
남해바래길 8코스를 걷다 만날 수 있는 전망대 설리스카이워크. 정용일 기자 yongil@hani.co.kr
송정솔바람해변은 이름에서부터 소나무(松)라는 말이 두 번이나 들어갈 정도로 해변의 소나무 숲이 아름답다. 여러 얼굴의 바다 마을이다. 어제 돌담길을 걸을 때는 제주 같았는데, 소나무 숲으로 병풍 친 해변은 강릉 바닷가 같기도 했다. 해변 끝까지 걸어 오르막길을 따라 설리마을로 향한다. 차도 옆으로 난 폭 좁은 인도지만, 울타리를 쳐놓아 안전하다. 뒤에 걷는 사람이라도 있을라치면 금세 막힐 법한 좁은 길이지만 자꾸만 발길이 멈췄다. 길옆으로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 탁 트인 바다 때문이다. 때마침 기다리던 해가 드디어 구름 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회색빛이었던 바다에 푸른빛이 돌기 시작했다.
송정솔바람해변. 정용일 기자 yongil@hani.co.kr
설리해변에 닿기 전 길은 작은 골목길로 연결됐다. 차도 지나지 못하는 폭 좁은 길은 오로지 두 발로 걸어서만 지날 수 있다. 얕은 담 너머 걸린 해녀 잠수복, 정리하다 만 그물과 낚시 따위가 널려 있는 마당 살림을 살짝 들여다보며 걷는 길은 조용하고 평온했다. 겨울 평균 기온이 좀체 영하로 내려가지 않는 남해라 눈이 올 리 없지만 설리해변 이름에 ‘눈 설’(雪)자가 붙은 이유는 모래가 눈처럼 희고 곱기 때문이다. 잔잔한 파도가 보드라운 모래를 치며 일렁인다. 바위가 솟은 해변 끄트머리로 내려가니 맑은 바닷물 아래로 말미잘, 게 따위가 보인다.
상주은모래비치. 정용일 기자 yongil@hani.co.kr
“이제 올라와!” 함께 취재를 간 정용일 기자가 저 멀리서 불렀을 때야 겨우 고개를 들었다. 걷고, 멈추고 또 걷고, 멈추길 반복하며 물 아래 더 깊은 곳에는 무엇이 얼마나 아름답게 자리 잡고 있을까 상상하며 들여다보는 재미에 시간이 하염없이 흘렀다. 그리고 문득 맑은 바닷물만큼이나 마음도 깨끗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송정솔바람해변. 정용일 기자 yongil@hani.co.kr
이 개운함의 정체는 무엇일까. 철학자 우석영은 <걸으면 해결된다>에서 이렇게 썼다. “심상의 실타래는 걷기가 무르익은 시간에는 어디론가 꼬리를 감추고 만다. (중략) 지극한 단순함의 상태인 솔직함과 분방함, 마음의 평정 자체가 실로 귀중한 성취임을, 그리고 이 성취가 모든 참된 성취들을 가능하게 하는 탄탄한 기반임을 인식해야 한다.” 하루 반, 미약한 걸음에 어쩐지 좀 거창한 생각인지 모르겠지만 그랬다. 날씨가 맑아진 덕분도 있지만, 불안했던 마음이 차분히 가라앉자 많은 것이 더 넓게 눈에 들어왔다. 앞으로 나아가다 보면 해결되는 것들이 있다. 이런 마음으로, 올 한해는 좀 더 걸어보기로 했다.
신소윤 기자 yoon@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