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 화천군 비수구미 생태길. 한국관광공사 제공
길을 눈앞에 두고도 길을 헤맸다. 도대체 어디를 걸어야 하지? 국내 걷기 여행 코스를 망라한 ‘두루누비’ 앱과 여러 사이트를 들여다보면 한국엔 걷는 길 코스가 약 1900개 있다. 수많은 길 가운데 어디를 걸을까. 새해, 좀 걸어 볼까 생각하고 있었다면 다음 리스트를 참고해보자. 길 전문가, 여행작가 등이 달마다 선정하는 두루누비 추천 길 가운데 각자의 목표와 상황에 따라 선택할 수 있도록 1만보, 2만보, 3만보 코스를 정리했다.
워밍업, 1만보 코스
일반 성인의 보폭은 70~80㎝다. 성인 걸음으로 1만보를 걸으면 보통 7~8㎞ 정도 된다. 약 1시간30분~2시간 거리다. 2019년 미국 하버드 공중보건대학이 발표한 연구 결과에 따르면 ‘1만보=건강’이라는 공식은 고정관념에 불과하다지만, 걷기가 우리에게 가져다주는 기쁨은 건강만은 아니다. 1만보는 운동 삼아, 그리고 크게 힘들이지 않고 걷기의 즐거움을 누리기에 적절한 걸음 수다. 전국 걷기 길 가운데 2시간 안팎으로 걸을 수 있는 길들을 추천한다.
강원 화천 비수구미 생태길: 강원 화천군, 6㎞, 2시간
해발고도 약 700m 해산터널에서 비수구미 선착장까지 이어지는 걷기 코스. ‘육지 속 섬마을’이라고 불릴 정도로 깊은 산골인 비수구미마을은 시작점에 닿으려면 대중교통이 없어 택시 등을 이용해야 한다. 하지만 그만큼 야생의 자연을 온전히 느낄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비수구미마을에 하룻밤 머문다면 새까만 밤하늘에서 쏟아지는 별도 구경할 수 있다.
충남 보령시 삽시도 둘레길. 한국관광공사 제공
삽시도 둘레길: 충남 보령시, 6.2㎞, 2시간30분
충남 보령 대천항에서 배를 타고 들어가는 섬 삽시도는 기암괴석과 울창한 소나무 숲으로 풍경이 멋진 섬이다. 걷기 코스는 삽시도리 밤섬선착장에서 금송사, 진너머 해수욕장 등을 거쳐 오천면 삽시도리 술뚱선착장까지 이어진다. 경사가 심하지 않고, 길 곳곳에 휴식용 벤치가 마련되어 있어 어렵지 않게 걸을 수 있다.
청산도 슬로길 04코스, 05코스: 전남 완도군, 총 7.3㎞, 3시간
약 5.5㎞인 청산도 슬로길 05코스에 슬로길 04코스 1.8㎞를 붙여 걸어보자. 파노라마처럼 펼쳐진 해안 절경을 감상하며 걸을 수 있는 두 길 가운데 오래전 돌을 쌓아 만든 길이 포함된 04코스는 돌 사이 뚫린 구멍으로 여름에 시원한 바람이 나온다고 한다. 길 아래로 낭떠러지와 바다가 이어져 있어 하늘에 떠서 걷는 듯한 기분이 든다.
온전히 걷기에 집중하기, 2만보 코스
전국 걷기 길 가운데 많은 구간이 13~15㎞ 내외, 4~6시간 정도 걷는 코스다. 하루 반나절 온전히 걷기에 집중하기 좋은 시간과 거리이기 때문이다. 온전히 내 몸의 움직임에 집중하고, 복잡한 생각으로부터 해방되고, 앞으로 나아가는 행위의 즐거움을 느끼고 싶다면 다음 코스들을 눈여겨보자.
해파랑길 49코스: 강원 고성군, 12.3㎞, 5시간
고성 거진항에서 통일전망대 출입신고소에 이르는 길로 바다, 호수, 산을 두루 볼 수 있는 코스다. 공식 해수욕장 가운데 동해안에서 가장 북쪽에 자리 잡은 화진포해수욕장부터 둘레 16㎞에 달하는 화진호, 그리고 솔숲과 갈대밭까지 코스가 다채롭다. 특히 화진호는 겨울철이면 큰고니와 희귀종인 흑고니까지 날아들어 ‘백조의 호수’라는 별명으로도 불린다.
태안해변길 6코스 샛별길: 충남 태안군, 13㎞, 4시간
낙조로 유명한 안면도 꽃지해변부터 황포항까지 이어진 코스로 해변의 기암괴석, 몽돌로 이뤄진 샛별해변 등 다양한 매력을 느낄 수 있는 해안 코스다.
강화나들길 13코스 볼음도길: 인천 강화군, 13.6㎞, 3시간30분
강화 외포리선착장에서 배를 타고 들어가는 작은 섬 볼음도는 해안가를 병풍처럼 둘러싼 소나무 숲이 아름다운 코스다. 수령 800년이 넘은 천연기념물 볼음도 은행나무도 감상할 수 있는 이 코스는 산길과 시골 마을의 논길, 해안가까지 변화무쌍한 풍광을 선사한다.
소백산자락길 6코스 온달평강로맨스길: 충북 단양군, 13.8km, 4시간
소백산 자연휴양림의 울창한 숲과 맑은 계곡, 약 4억5000만년 전에 생긴 석회암 천연동굴인 온달동굴 등을 만날 수 있는 코스. 중반부에는 산에 불을 놓아 들풀을 태워 개간해 농사를 짓던 화전민의 생활을 엿볼 수 있는 화전민촌도 지난다.
종일 걷기에 매료되는 3만보 코스
하루를 헐어 온종일 걷고 싶다면, 7~8시간 정도 걸리는 코스에 도전해보자. 노르웨이의 탐험가 엘링 카게는 느리게 걷는 행위만이 생각을 자유롭게 한다고 말했다. 한발씩 앞으로 내미는 데에만 집중하며 나만의 속도로 세상과 소통하는 이 과정의 순수한 기쁨을 만끽해보자.
해남 달마고도: 전남 해남군, 17.8㎞, 7시간
남해의 금강산이라고 불리는 아름다운 달마산 둘레를 한 바퀴 걷는 길. 중장비로 자연을 훼손하지 않고 오로지 삽, 호미, 곡괭이 등 사람의 힘으로 조성된 자연 친화적 길로 유명하다. 고목이 울창한 숲길을 지나 산을 오르면 고즈넉한 다도해 풍경과 수만 년 전 바위 덩어리가 쌓인 너덜지대 등 절경이 곳곳에 포진해 있다. 난이도가 다소 높은 코스다.
제주 갑마장길 및 가름질갑마장길: 제주 서귀포시, 20㎞, 7시간
제주에서 주로 해안 길을 따라 걸었다면 이번엔 제주 내륙의 갑마장길을 걸어보자. 크고 작은 여러 개의 봉우리가 연결된 따라비오름과 굼벵이 모양의 갑선이오름을 걸으며 산지에 형성된 제주 목축문화를 엿볼 수 있다.
경북 포항시 호미반도 해안둘레길 1~4코스: 경북 포항시, 총 25.4㎞, 6시간30분
호미반도 해안둘레길은 각 5~7㎞ 구간 4개로 나뉘어 있다. 그리 어렵지 않은 길이라 하루 동안 완주도 가능하다. 해안절벽 숲길과 바다 위 덱(데크) 등을 따라 걸으며 호미곶의 화산 지형부터 조용하고 아늑한 해변까지 두루 경험할 수 있다.
걷기 좋은 길의 조건
좋은 길이란 무엇일까. ‘길이 길이지 뭐’가 아니다. 오래도록 걷고 싶은 길, 찾아가고 싶은 길, 다음에 또 걷고 싶은 길의 기준은 무엇일까. 윤문기 남해군청 바래길 팀장에게 물었다. 그는 국내 걷는 길 활성화를 위해 전문화된 비영리 민간단체 ‘한국의 길과 문화’ 전 사무처장이기도 하다. “좋은 길은 보행 안전성, 쾌적성, 편의성을 갖고 있어야죠.” 우선 차량으로부터 안전이 확보되어야 한다. 의외로 국내 걷는 길 가운데 인도 없는 차량 갓길로 이어진 길이 꽤 있다고 한다. 국립공원이라서 손을 못 대는 경우도 있고, 우회도로를 미처 마련하지 못한 경우다. 낙석 구간도 조심해야 한다. 노면이 평탄하고 제초 작업이 잘 되어 있는 길도 중요하다. 잡초가 무성하게 우거진 길은 방향을 가늠하기도 어려울 뿐더러 뱀 등 야생동물이 튀어나올 수도 있다. 안내 사인이 잘 만들어져 있어야 하고, 응급 상황이나 길을 잃었을 때 전화할 수 있는 전용 콜센터가 있는 길이라면 여행 편의성이 훨씬 높아진다.
여기에 덧붙여 한국관광공사 코리아둘레길 담당 강영애 전문위원은 “치안 문제를 놓칠 수도 있는데, 국내 걷는 길 가운데 숲이나 인적이 드문 곳을 지날 경우가 많기에 꼭 2명 이상 함께 다니길 권한다”고 말했다. 편안한 마음으로 걸을 수 있는 길이 가장 좋은 길이라는 뜻이기도 하다.
신소윤 기자 yoon@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