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재호는 조용한 분위기 속에서 마음에 두었던 당구 문제를 혼자 풀어낼 때 가장 행복하다고 한다. 최근 서울 동작구 상도동에 있는 개인 연습실에서 조재호가 경쾌한 자세로 스트로크를 준비하고 있다. 윤운식 선임기자 yws@hani.co.kr
두 개의 당구대가 다소곳하다. 물 끓이는 포트와 커피 캡슐들, 벽걸이 텔레비전 한 대가 소박하게 놓여 있다. 절대 고요의 세계랄까. 서울 동작구 상도동의 작은 건물에 세 들어 있는 조재호(NH농협카드)의 개인 연습실 풍경이 그렇다. 여기서 지난 시즌 3승, 상금·포인트 랭킹 1위, 최우수선수상 수상을 일군 그의 고속 질주가 시작됐다. 공간은 고독한 싸움과 순수 집중의 험로를 택한 그의 삶의 자세를 보여준다.
최근 연습실에서 <한겨레>와 만난 3쿠션의 세계적 강호 조재호는 “나는 분석을 좋아한다. 공, 상대 스타일, 심지어 인간관계까지 분석한다. 시끄럽지 않은 이 공간에서 편한 마음으로 공부하고 연습할 때 행복하다. 내 플레이도 더 정확해진다”고 말했다.
아마추어 시절부터 경쾌하고 빠른 당구로 인기를 모았던 그는 프로당구 피비에이(PBA) 첫해 적응기를 거친 뒤, 2년 차에 남들은 평생 하기도 힘든 일을 성취했다. 막판 2억원의 상금이 걸린 월드챔피언십에서 9세트 명승부를 펼치며 우승한 것은 정점이었다.
하지만 전혀 들뜨지 않는다. 주말 이틀을 제외하고는 매일 웨이트 트레이닝으로 몸을, 연습훈련으로 감각을 다지는 것이 대표적이다. 지겹지 않으냐는 물음에, 그는 “당구는 멋있고 재밌다. 지금까지 당구를 싫어한 적이 없다. 당구를 위해서라면 못할 일이 없다”고 했다.
기술적으로 국내 선수 톱인 그는 물어보고 베끼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다. 그는 “프레데리크 쿠드롱이나 필리포스 카시도코스타스, 다비드 사파타 등의 경기를 보면서 배운다. 모르면 팀 동료인 마민캄이나 김현우, 응우엔에게도 물어본다. 여자 선수들의 초구 배치 처리가 새로우면 그 이미지를 머리에 담아가 연습한다”고 설명했다.
조재호가 서울 동작구 상도동의 개인 연습실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윤운식 선임기자 yws@hani.co.kr
처음엔 따라서 반복하고, 당점을 잡고, 나중엔 브릿지까지 맞춘다. 이 작업이 3개월 걸린다면, 다음엔 그 타격 자세와 감을 몸에다 심어 넣는다. 이렇게 새로운 기법을 체화하는 데 6개월이 걸리지만, 문제는 또 남는다.
조재호는 “새 스윙폼을 익히면 기존의 것이 영향을 받는다. 2% 보강하려다 60~70% 망가지면 슬럼프가 오기 때문에 선수들이 부담을 느낀다”고 짚었다. 조재호도 예외는 아니다. 하지만 그는 실패의 위험을 마치 “파도를 타는” 서퍼처럼 천성적으로 즐긴다. 그는 “우승하면 나는 또 바꾼다”고 했다. 과거 월드컵 등 세계대회에 나갔을 때 멋진 장면을 보면, “내가 이 장면을 배우려고 왔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소개했다.
이런 담대함은 판을 바꾸는 그의 이단아적 행동에서도 엿볼 수 있다. 젊어서부터 그는 오후 늦게 연습하러 나오는 당구 선수의 이미지를 매우 싫어했다. 당구장에서 만난 고객들이 당연하다는 듯이 함께 칠 것을 요구하는 문화도 용납할 수 없었다. 그래서 “건방지다” “싸가지”라는 말도 많이 들었다. 하지만 나중엔 욕했던 사람들도 이해했다고 한다. 조재호는 “선수의 가치는 선수가 만든다. 우리가 몸값을 높여야 한다”고 강조했다.
전략적인 행동은 젊은 시절의 일화에서도 드러난다. 당시에도 특급선수들은 용품업체의 로고를 다는 대가로 계약금을 받는 경우가 있었다. 그는 거꾸로 자신의 경쟁력 등을 지표화해 입찰을 걸고, 가장 높은 금액을 지불할 업체를 찾았다. 이런 발상의 전환으로 얻게 된 추가 수입은 부인에게 돌아가지 않았다. 조재호는 “나는 이기고 싶어한다. 비행기를 타더라도 비즈니스를 타고 가면 도움이 된다. 그런 비용은 아깝지 않다”고 했다. 물론 개인적인 당구 교습 요청은 피하지만, 후원사가 될 수 있는 기업의 행사에는 적극적으로 나간다. 당구 시장의 확대가 후배 선수들의 살길이기 때문이다.
“쪽팔림이 싫어” 자기만의 방식으로 살아온 조재호의 심리는 그의 승부욕의 다른 측면이기도 하다. 실제 그는 당구 외의 다른 스포츠를 할 엄두를 내지 못한다. “하나를 하면 제대로 해야 한다. 다른 운동을 하면 빠질 수밖에 없다. 그럼 당구를 못 친다.”
쿠드롱으로부터 과거 “내 나이 때보다 낫다”는 칭찬을 들었고, 미디어는 늘 조재호가 쿠드롱을 넘어섰는지에 대해 관심을 쏟는다. 이에 대해 조재호는 “쿠드롱이 내게 정말 좋은 말을 해주었다. 하지만 쿠드롱은 쿠드롱이고, 나는 나다. 같은 나잇대에 쿠드롱이 보여주었던 경기력을 넘어서기 위해 나는 항상 노력하고 있다”라고 답했다.
조재호의 밝은 미소에는 자신감과 전략적 사고가 숨어 있다. 윤운식 선임기자 yws@hani.co.kr
이런 강한 멘털을 갖춘 조재호는 하루아침에 이뤄지지 않았다. 그는 “무한의 좌절을 통해 나는 계단형으로 진화한다. 조금씩 나아지면서 결국 이긴다”라고 묘사했다. 다음 시즌 경쟁자들의 표적이 될 것을 잘 아는 조재호는 “내가 우승한다는 보장은 없다. 지금 가장 혹독하게 준비해야 한다”고 말했다. 밝은 표정에는 자신감과 긍정의 에너지가 넘친다.
당구 초보자인 기자가 “당구 어떡하면 잘 칠 수 있나요?”라는 우문을 던졌다. 조재호는 “친구한테 배우지 말고, 당구장이나 아카데미에서 전문가한테 배워라. 골프를 친구한테 배우지는 않는다. 기본기를 닦아야 새로운 것을 흡수하고 응용할 수 있다”고 조언했다. 스트로크 자세를 취하며 ‘한 수’ 지도를 부탁하니, 그는 다시 한번 “당구장에 가서 티칭 프로를 찾으라”며 껄껄 웃었다.
김창금 선임기자
kimck@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