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흥 대한체육회장이 8일 중국 항저우 그랜드 뉴 센추리 호텔에 마련된 대한체육회 스포츠외교라운지에서 열린 2022 항저우아시안게임 결산 기자회견에서 취재진 질문을 듣고 있다. 항저우/연합뉴스
“내년에는 국가대표 선수들이 입촌하기 전에 모두 해병대 극기훈련을 받게 하겠다.”
이기흥 대한체육회장은 8일 2022 항저우아시안게임 결산 기자회견에서 이렇게 말했다. 기자회견을 마치려는 찰나, 발언을 자청해 파리올림픽 중요성을 강조하며 한 말이었다. “저도 같이 받겠다”라며 웃었지만, 현장의 기자들은 웅성댔다. 직전까지 “옛날 방식으론 더는 안 된다”고 강조했던 이 회장이었기 때문이다.
이날 이기흥 회장은 비장한 표정이었다. 한국은 이번 대회에서 금메달 42개(은메달 59개, 동메달 89)를 땄다. 중국(금 201·은 111·동 71)과 일본(금 52·은67·동 65)에 이은 종합 3위다. 애초 기대했던 금메달 45∼50개에 다소 모자랐다. 하지만 일본과 격차를 좁히는 데는 성공했다. 하지만 이 회장은 “지금이 위기”라고 강조했다.
이 회장은 “한국에 돌아가면 전반적인 흐름을 분석해보려고 한다”라며 “우리가 너무 우물 안 개구리였다”고 했다. 그는 “특히 국제 부문을 강화해 다른 나라에서 어떻게 훈련을 하는지 알아보겠다”고 했다. 이 회장은 “요즘 선수들은 새벽 운동을 안 하려고 한다. 강제적으로 하게 할 수도 없다. 이게 심화하면 인권 이야기가 나온다”라며 “선수 수급도 문제다. 풀뿌리에 팀이 없고 선수가 없다”고 했다.
위기를 느낄 만했다. 한국은 이번 대회에서 준수한 성적을 냈다. 하지만 내실은 부실했다. 신유빈(19·대한항공), 안세영(21·삼성생명), 황선우(20·강원도청) 같은 샛별이 떠올랐지만 동시에 비인기종목을 중심으로는 젊은 선수가 없어 허덕였다. ‘베테랑’의 투혼은 그 자체로 감동이 있지만 역설적으로 그들을 대체할 신인이 없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종합 4위를 기록한 인도(금 28·은 38·동 41) 등의 추격도 매섭다.
한국 수영 대표팀이 2022 항저우아시안게임 혼성 계영 400m 동메달을 획득한 뒤 시상식에서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왼쪽부터 황선우, 김서영, 최동열, 이은지. 항저우/윤운식 선임기자 yws@hani.co.kr
문제는 이런 지적이 이미 언론 등을 통해 수없이 제기돼왔다는 점이다. 생활체육 활성화를 통한 저변 확대 등 대안이 제시돼있다. 하지만 이 회장을 비롯한 기성 체육계는 이런 주장이 ‘엘리트 체육 죽이기’라고 반발해왔다. 이분법적 사고다. 도쿄올림픽에서 성공한 일본의 배경에는 수많은 스포츠 클럽이란 토대가 있다는 사실에는 눈을 감고 “올림픽을 앞두고 엘리트 체육에 집중했기 때문”이라는 주장을 반복했다. 그 사이 한국은 10대가 60대보다 운동량이 부족한 나라가 됐다.
선수 고갈과 스포츠 토대 붕괴라는 현실은 무섭게 다가오고 있다. 이제라도 문제의식을 느낀다면 다행이지만, 그간 많은 지적을 받아온 대한체육회가 이번 대회를 치르고서야 관련 대책을 마련할 생각을 시작했다는 게 의아하기도 했다. 항저우 대회를 앞두고 선수들의 정신력을 강화하겠다며 산악구보, 새벽 운동 부활에 심야 시간 선수촌 인터넷 차단 등을 진행했던 것이 ‘진심 어린’ 노력이었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기자회견 뒤 해단식에서 만난 몇몇 선수에게 해병대 훈련 이야기를 했다. 헛웃음을 보였다. 놀라기보다는 체념한 듯했다. 정신력을 키워야 한다며 ‘극기’를 강조하는 일이 과거에는 강압적인 분위기 속에서 이뤄진 불합리였다면, 지금의 선수들에게는 일종의 우스개일지도 모른다. 헤겔을 패러디했던 마르크스의 말을 빌리자면 이렇게 표현할 수 있지 않을까. “극기훈련은 두 번 반복된다. 한 번은 비극으로, 두 번째는 소극으로.”
항저우/이준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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