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계종이 불교 통합종단으로 발족한 1962년 통합종단 첫 종정으로 추대된 효봉 스님(1888~1966)의 생생한 법어가 70여년 만에 되살아났다. 제자들이 스승 몰래 녹취해놓은 글이 <효봉 노트>(어의운하 펴냄)로 발간됐다.
효봉은 일본 와세대 대학을 졸업한 뒤 귀국해 평양 등에서 판사로 일했다. 사형 판결에 대한 깊은 회의로 판사복을 벗어던진 뒤 엿장수로 전국을 떠돌다가 금강산 신계사로 출가한 것으로 전해진다. 당시 늦은 나이인 38살에 출가했으나 좌복에 엉덩이살이 눌러붙을 정도로 정진해 ‘절구통수좌’로 불렸다.
송광사 삼일선원에 주석할 때 성철, 일타, 탄허 같은 선승들이 그를 따라 모여 수행했고, 송광사 방장 자리를 이은 구산 스님, 무소유의 법정 스님, 고은 시인 등이 효봉을 은사로 모시고 출가했다. 시인 고은은 이 책에서 스승에 대해 “나는 스님을 모시고 목욕을 할 때 그 궁둥이와 발가락, 발바닥에 그 고행의 자취가 역력히 남아 있는 것을 보았다”고 회고했다.
효봉은 1956년 시자 한명만 데리고 지리산 쌍계사 탑전에 가서 한철 정진을 했다. 그때 효봉을 모신 시자가 법정 스님이었다. 법정은 훗날 “스님의 성격은 천진한 어린애와 같아서 시자들과 장난도 곧잘 치고 자비롭기 그지 없었다”고 회고하면서도, 시줏물을 낭비하는 것엔 엄중했던 스승의 면모를 이렇게 전했다.
“초 심지가 다 타서 내려 앉기 전엔 새 초를 갈아 끼지 못하게 했다. 수도인은 가난하게 사는 것이 곧 부자살림이라고 금강산 시절부터 쓰던 다 닮아진 세숫비누를 쌍계사 탑전에 와서도 쓸 만큼 철저했다. 무더운 여름날 단 둘이 앉아서 공양을 하면서도 가사와 장삼을 입고, 죽비를 쳐서 심경(식사 전 외우는 글)을 외우면서 엄숙히 음식을 먹었다.”
<효봉 노트>엔 선원 수좌들이 ‘3개월 집중수행’(안거)을 시작하거나 마칠 때 한 서릿발 같은 법어가 담겨 있다.
“금부처는 화로를 견디지 못하고, 나무로 만든 부처는 불을 견디지 못하며, 흙으로 빚은 부처는 물을 견디지 못한다. 그 세 부처는 참부처가 아니기 때문이다. 오늘 대중은 화로와 불에도 녹지 않고, 물에도 풀리지 않을 참부처를 제각기 조성하라.”
“모든 법은 다 마음으로 된 것이니, 지옥과 천당도 마찬가지다. 만일 지금 무심으로 분별망상을 내지 않으면 천당도 지옥도 없으며, 너도 나도 없고, 탐욕도 성냄도 미움도 사랑도 없어 본래 청정한 자성이 바로 나타날 것이다.”
이 책 말미의 일대기엔 효봉이 이승만 대통령 생일 때 조계종단 대표로 다른 종교 대표들과 함께 경무대로 초대받았을 당시 일화도 나와 있다. 고관대작들의 인사를 받던 이 대통령은 효봉이 들어오자 일어나 손을 잡고 앉을 자리를 권하며 “스님의 생일은 언제입니까” 하고 물었다. 효봉은 “생불생(生不生) 사불사(死不死), 살아도 산 것이 아니요, 죽어도 죽은 것이 아닌데 생일이 어디 있겠소?”라고 답하자 이 대통령은 한참이나 ‘생불생 사불사’를 되뇌었다는 것이다.
<효봉 노트>에 실린 효봉(왼쪽) 스님과 함석헌(오른쪽)의 사진. 효봉의 제자인 법정 스님은 함석헌과 막역한 사이였다. 어의운하 제공
이 책엔 효봉과 사상가 함석헌이 함께 찍은 사진이 실려 있다. 법정은 1970년 함석헌이 창간한 <씨알의 소리>에 송건호(<한겨레> 초대 사장) 등과 함께 편집위원으로 참여했다. 사진은 그동안 왜 법정이 기독교인 함석헌과 그처럼 막역하게 지내며 민주화운동을 함께 했는지에 대한 의문을 풀어준다. 효봉은 평양고등보통학교 1기, 함석헌은 같은 학교 8기로 선후배 사이였다고 한다. 사진에선 함석헌이 무릎을 꿇고 손을 단정하게 모으고 효봉을 바라보고 있다. 함석헌과의 인연은 법정의 스승대부터 이어져온 셈이다.
1975년무렵 전남 순천 송광사 불일암에서 은거하던 법정(왼쪽) 스님을 찾은 함석헌(오른쪽).
법정은 <씨알의 소리> 편집위원을 그만두고 전남 순천 송광사 불일암에서 은거할 때 함석헌이 찾아와서 하룻밤 자고 간 것을 두고 “하루 한끼밖에 안 드시는 어른에게 밥을 해드리지 못하고 감자를 삶아드린 일이 두고두고 후회된다”는 글을 남기기도 했다.
조현 종교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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