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일 바티칸 성베드로대성당에서 거행된 추기경 서임식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이 유흥식 추기경에게 추기경의 상징인 각모를 씌워주고 있다. 바티칸/EPA 연합뉴스
한국인으로는 네번째 추기경이 된 유흥식 라자로(70) 추기경의 서임식이 27일 오후 4시(현지시각) 바티칸 성베드로 대성전에서 거행됐다.
유 추기경은 지난 5월29일 임명된 20명의 신임 추기경단 중 하나로 프란치스코 교황의 주례 하에 거행된 서임식을 마침으로써 공식적으로 가톨릭 교회 추기경단의 일원이 됐다.
선종한 김수환 스테파노(1922∼2009)·정진석 니콜라오(1931∼2021) 추기경과 염수정 안드레아(78) 추기경에 이어 한국 가톨릭교회의 네번째 추기경이다.
이날 서임식에선 먼저 신임 추기경 대표가 전체의 이름으로 교황에게 존경과 감사의 인사말을 한 뒤, 하느님께 ‘교황이 교황직을 지혜롭게 수행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 기도했다. 이어, 복음 봉독과 교황의 훈화 순으로 진행됐다.
27일 바티칸 성베드로대성당에서 거행된 추기경 서임식에 참석한 유흥식 추기경. 바티칸/AFP 연합뉴스
교황은 추기경에 임명된 이들을 ‘전능하신 하느님과 사도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와 교황의 권위로’ 거룩한 로마 교회의 추기경에 서임할 것을 선포했다.
신임 추기경들은 신앙 선서와 충성 서약 뒤 서임 순서에 따라 한명씩 교황 앞에 나아가 무릎을 꿇고 빨간색 사제 각모(비레타)와 추기경 반지를 받았다.
교황이 추기경 한명 한명에게 각모와 반지를 주며 포옹하는 의식은 교황청 경신성사부 장관인 영국의 아서 로시 대주교를 시작으로 유흥식 교황청 성직자부 장관, 페르난도 베르헤스 알사가 바티칸시국위원회 위원장 겸 바티칸시국 행정부 장관, 장마르크 아블린 프랑스 마르세유 대교구장 순으로 진행됐다.
추기경 서임식에서 두번째로 호명돼 프란치스코 교황에게 절을 올리고 있는 유흥식 추기경. <평화방송> 유튜브 갈무리
두번째로 호명된 유 추기경은 빨간색 비레타와 추기경 반지를 받고서 교황과 잠시 웃으며 대화한 뒤 포옹했다. 추기경 품위의 상징인 비레타는, 아래는 사각형이고 위쪽에는 성부·성자·성령의 삼위(三位)를 상징하는 세개의 각이 있다. 빨간색은 순교자의 피를 상징한다. 추기경 반지는 사도 베드로(프란치스코 교황)의 손에서 반지를 받음으로써 교회에 대한 추기경의 사랑이 사도들의 으뜸인 베드로의 사랑으로 굳건해짐을 뜻한다.
교황은 신임 추기경들에게 로마의 성당 하나씩을 명의 본당으로 지정하는 칙서도 전달했다. 유 추기경은 로마에 있는 ‘제수 부온 파스토레 몬타뇰라’(착한 목자 예수님 성당)를 명의 본당으로 받았다. 추기경으로서의 상징인 추기경 문장도 정해졌다. 유 추기경의 문장에는 한국 순교자의 희생을 나타내기 위해 방패 중심에 십자가가 배치되어 있다. 방패 왼쪽 하단에 올라간 은색 올리브 가지는 인류 공통의 염원인 세계 평화와 분단된 한반도의 평화를 상징한다.
그동안 추기경에 서임된 김수환·정진석·염수정 추기경이 모두 서울대교구장 출신이었던 것과 달리 유 추기경은 대전교구장 출신이다. 1951년 충남 논산에서 태어난 유 추기경은 이탈리아 로마 라테라노대에서 교의신학 박사학위를 취득했으며, 로마 현지에서 사제 서품을 받았다. 이 때문에 교황청에서 주로 사용하는 이탈리아어에 능통하고, 교황청 내 인적 네트워크가 풍부한 것으로 알려졌다.
유 추기경은 1983년 귀국 후 대전 대흥동성당 주임 서리, 솔뫼 피정의 집 관장, 대전가톨릭교육회관 관장, 대전교구 사목국장, 대전가톨릭대 교수·총장 등을 거쳐 2003년 대전교구 부교구장 주교로 서품됐다. 2005년부터 대전교구장으로 직무를 수행해오다 지난해 6월 대주교 승품과 동시에 교황청 성직자부 장관이 됐다. 성직자부는 전세계 사제·부제의 직무와 생활, 신학교 사제 양성 관련 업무를 관장하는 교황청의 중요 행정기구 중 하나다. 교황청 역사상 한국인 성직자가 교황청 장관에 임명된 첫 사례였다.
유흥식 추기경이 27일(현지시각) 서임식을 마친 뒤 바티칸 사도궁에서 성직자부 직원들과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유 추기경은 지난해 6월 한국인 최초로 교황청 성직자부 장관에 임명돼 추기경 서임 때까지 장관으로서 직무를 수행해왔다. 바티칸/연합뉴스
유 추기경은 2014년 프란치스코 교황의 방한 당시에도 특별한 교분을 보여줬다. 당시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의 탄생지인 충남 당진 솔뫼성지에서 열린 제6회 아시아청년대회 참석을 청하는 그의 서한을 계기로 교황의 방한이 성사됐다. 그는 이후에도 바티칸에서 수시로 교황을 개별 알현해 한국 가톨릭교회의 주요 현안을 논의했고, 교황청 성직자부 장관에 임명됐다.
유 추기경은 그동안 외국인 노동자, 결혼 이주여성과 북한을 포함한 저개발국 지원 사목에 열중했다. 대전교구장으로 봉직하던 2020년 말엔 세계 교구 중 처음으로 저개발국을 위한 ‘코로나19 백신 나눔 운동’을 시작했다. 백신 나눔 운동에 깊은 인상을 받은 프란치스코 교황은 여러 차례 통화와 서신을 통해 감사의 뜻을 표했다.
추기경은 가톨릭교회 품계에서 교황 다음의 권위와 명예를 가진 성직자로, 전세계 모든 추기경이 소속된 추기경단은 교회법상 교황의 최고 자문기관이다.
80살 미만의 추기경은 콘클라베(Conclave·교황 선출 투표)에서 투표권을 행사한다. 우리나라의 경우 염수정 추기경은 만 80살이 되는 내년 12월까지만, 유 추기경은 향후 10년간 투표권을 행사할 수 있다.
유 추기경은 오는 29∼30일 교황이 주재하는 추기경 회의에 참석해 추기경으로서 본격적인 활동에 들어간다.
27일 바티칸 성베드로대성당에서 거행된 추기경 서임식. <평화방송> 유튜브 갈무리
유 추기경은 서임식 뒤 취재진과 만나 “교황님께서 ‘앞으로 함께 나아가자’고 말씀하셨다”며 “그래서 교황님과 교회를 위해서 죽을 준비가 돼있다고 말씀드렸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웃으셨다”고 전했다. 그는 “교황님과 교회를 위해서 죽을 준비가 돼있다는 말은 교황님께 편지 쓸 때 내가 첫머리에 항상 쓰는 표현”이라며 “죽을 각오로 추기경직에 임하겠다”고 덧붙였다.
이번에 서임된 추기경들은 한국을 비롯해 영국, 스페인, 프랑스, 나이지리아, 브라질, 인도, 미국, 동티모르, 이탈리아, 가나, 싱가포르, 파라과이, 콜롬비아 출신이다.
이번에 새 추기경 20명이 탄생하면서 전세계 추기경은 226명으로 늘었다. 이중 132명이 교황 선출권을 지닌 80살 미만의 추기경이다. 이들 132명 중 83명을 프란치스코 교황이 임명했다. 비율로는 63%다.
이날 서임식에는 염수정 추기경이 추기경단의 일원으로 참석했다. 또 이용훈 한국천주교주교회의 의장, 정순택 서울대교구장, 김종수 대전교구장 등과 함께 국내 가톨릭 신도 경축 순례단도 참석했다. 정부 대표인 전병극 문화체육관광부 1차관, 이명수 국민의힘 의원, 김종민 더불어민주당 의원 등도 참석해 유 추기경의 서임을 축하했다.
조현 종교전문기자
cho@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