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년전 5.18광주민주화운동 당시 전남도청엔 광주중심가를 불바다로 만들 수 있는 지하실의 다아너마이트를 해체해 더 많은 시민을 죽음으로 몰아넣을 수 있는 대폭발을 막고, 마지막까지 도청을 지키며 죽음을 택한 젊은이가 있었다. 개신교 호남신학교에 재학 중이던 문용동 전도사였다.
대형교회 목사가 5.18광주항쟁에서 자신의 부끄러움을 고백하며, 문 전도사의 의로움을 추모했다. 신흥 대형교회로 손꼽히는 경기도 용인 죽전 새에덴교회의 담임 소강석 목사다. 소 목사는 5.18을 하루 앞둔 17일 5월의 ‘문용동은 웃고 있지만, 소강석은 울고 있어요’란 글을 띄웠다. 주일 때마다 지인과 신자들에게 온라인으로 보내는 ‘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리즘’에서였다.
소 목사는 “(목사가 되겠다고 해서) 집에서 쫓겨나 난생 처음 광주로 가서 광주신학교에 입학한 19세 그해에 5월 5.18민주항쟁을 맞았다”면서 “당시 저는 뚜렷한 역사의식 같은 것은 없이 그저 성령 충만한 삶 자체가 목적이어서 공수부대가 광주를 점령해 금남로에 개미 새끼 한 마리도 보이지 않을 때 그 길을 걸어서 조선대학교 앞에 있는 광주서광교회를 다니는 것이 전부였다”고 고백했다.
소 목사는 “그러나 저와 동시대에 호남신학교를 다니던 문용동 전도사는 저보다 여덟 살 많은 호남신학교 4학년생이었는데, 길을 지나가다 공수부대 군인들에게 진압봉으로 맞은 시민을 업어서 기독병원 응급실에 데려다주고 그날부로 시민군에 참여한다”며 “그의 일기를 보면 얼마나 그가 의협심에 불타고 정의감으로 가득 찼는지를 알 수 있다”고 문 전도사의 사람을 상세히 소개했다.
“그는 수도경비사에서 헌병으로 근무하면서 화약과 탄약에 익숙했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가 전남도청을 지키고 있을 때 도청 지하실에는 화순탄광에서 가져온 8톤짜리 트럭 네 대 분량의 다이너마이트가 있었습니다. 그때 시민군 강경파에서는 공수단이 도청으로 진격해 오면 다이너마이트를 폭발시키겠다고 으름장을 놓고 있었습니다. 만약에 그렇게 되면 광주시의 3분의 1 가까이 희생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문용동은 광주전투교육사령부의 김기식 부사령관을 찾아가서 탄약을 제거하자고 제안을 합니다. 그래서 김기식 장군은 탄약 분해 전문가인 배승일 군무관을 비밀리에 급파하여 문용동과 함께 다이너마이트를 분해했습니다. 그 이후, 문용동은 도망가면 살 수 있었는데 끝까지 그곳을 지키다가 계엄군의 총격으로 죽습니다. 광주시민들의 안전을 끝까지 지키려다가 죽은 것입니다.”
문 전도사는 5.18 이후 군 정보사의 공작에 의해 프락치로 오해를 받았지만, 함께 있던 사람들의 증언과 그의 일기장에 의해서 그는 프락치가 아닌 것으로 판명돼 호남신학대 교정엔 문 전도사의 추모비가 세워졌다고 한다.
광주신학교에 재학 당시 소강석 목사(사진 윗줄 맨 오른쪽). 사진 새에덴교회 제공
5.18의 현장인 광주 금남로와 전남도청을 순례중인 소 목사와 새에덴교회 신자들. 사진 새에덴교회 제공.
소 목사는 “그의 미소를 바라볼 때마다 마냥 부끄럽기만 하다”며 “나는 과연 산 자의 값을 치르고 있는 것일까”라고 자문했다. 소 목사는 이어 “그는 새벽길을 간 사람이고 저는 지금 살아서 캄캄한 암흑길을 걸어가고 있다”며 “그때는 역사의식이 없었지만, 지금은 문용동의 역사혼을 가지고 산 자의 값을 치르려고 울며 고뇌하고 있다”고 밝혔다.
소 목사는 개신교 내에서도 가장 보수적인 교파인 예장합동을 사실상 대표하는 부총회장이자 지난 국가조찬기도회에서 설교를 하고, 한국교회동성애대책협의회 대표회장을 지내고, 6·25참전해외용사들을 13년째 교회에 초청해 행사를 여는 등 보수적인 행보를 해온 중진 개신교 목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