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도 횡성군 갑천면 산골 현장아카데미 내 이신아키브 겸 예배처소에서 한국신연구소 이은선 소장과 현장아카데미 원장 이정배 목사 부부가 마주보고 있다.
13일 서울 종로5가 기독교회관 조에홀에서 ‘한국신연구소’가 발족했다.
믿음이 넘치는 시대, ‘믿습니다’는 소리는 높지만 실천과 언행일치가 부족한 시대에 다시 ‘신’(信)이라니. ‘또 믿음이냐’고 지나칠 법한 이름이다. 그러나 초대 소장은 맡은 이가 이은선(62) 세종대 명예교수기에 그 이름을 다시금 곱씹어보지 않을 수 없다. 여성신학자이면서도 유학을 공부해 기독교와 유학, 동서사상을 회통하며 한국의 토착신학을 발굴해온 그이기에 그 ‘신(信)’의 의미가 궁금해진다.
한국신연구소는 이은선 교수가 소장을 맡았는데, 신앙과 학문의 동지인 남편 이정배(65) 전감신대 교수 및 목사가 함께 할 것이 분명하다. 이들 부부는 서울 부암동 자택에서 공부모임을 하며 한국신연구소의 씨앗을 키워왔다. 또한 강원도 횡선군 갑천면 산골짜기에 20여년전부터 수도원과 같은 현장아카데미를 가꾸어왔다. 사회 현장과 출세간적 초월성이 이 서울과 횡성 산골의 양자에서도 드러난다.
이들이 말한 신(信)은 진정한 신뢰를 잃어버린 시대의 고갱이를 살려내기 위한 남다른 염원이 내포되어있다. 특히 너무도 일찍 져버린, 이은선의 선친 이신(1927~81)의 이름을 담아 그의 토착적 영성을 이어가기 위한 바람이기도 하다. 이신은 1960년대 마흔살 늦깎이로 미국 남부의 명문 밴더빌트대학에 유학해 석·박사를 마치고, 영어·일어·히브리어·헬라어까지 능통한데다 뛰어난 화가이기도 했지만, 미국식 그리스도교가 아닌 한국식 토착적 그리스도교를 펼치려다가 주류 기독교로부터 철저히 소외된 삶을 자처하다가 54세에 세상을 떠났다. 스위스 바젤대에 함께 유학해 각각 주자학과 양명학을 공부하고 돌아온 이들 부부가 이신의 뜻을 이어 어떻게 한국의 토착적 신학을 개척해나갈지 주목된다. 이 연구소의 지향을 이신 박사의 말에서 힌트를 얻을 수 있다.
“요즘 사람들에게 ‘돈’이 있고 ‘지식’이 있고 ‘과학’이 있고 ‘자동차’가 있고 ‘비행기’가 있고 천체를 왕래하는 ‘우주선’이 있고 ‘원자무기’가 있고 ‘미사일’이 있고 해도 결정적으로 결핍된 것은 ‘성실성(誠實性)’이란 것이 없어져 가고 있는 것인데 … 그런 온갖 것을 갖추고도 오히려 허물어져 가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와 ‘사람과 자연과의 관계’가 어떻게 하면 정상적인 것으로 회복받을 수 있는가 하는 참으로 크나큰 문제로서 … 오늘날의 허물어진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와 ‘사람과 자연과의 관계’의 정상적인 회복의 기대는 다른 데서 얻어질 아무 곳도 없는 것이고 다만 신뢰할 수 있는 한 인격에게서 그 ‘그루터기’를 발견하고 그런 영에 감동되는 일인데 오늘날 소위 성령을 받았다는 사람들에게서 그런 ‘신뢰의 그루터기’를 찾아볼 수 없다면 그것은 그분의 영이라기보다 오히려 다른 영이나 다름없는 것이고 ‘불신의 영’에 틀림없는 것이다.“
이신이 말하듯 그야말로 동서양인 모든 인간 속에 내재해있는 ’그 분의 영’, ‘믿음의 영’을 통해 하늘과 사람, 사람과 사람, 사람과 자연의 관계를 환원하고 회복하려는 꿈이 서려있는 연구소 이름이 아닐 수 없다.
13일 서울 종로5가 한국기독교회관 조에홀에서 열린 한국신연구소 개소식 및 <사유하는 집사람의 논어읽기> 출판기념회에서 소감을 발하는 이은선 한국신연구소 소장
이날 연구소 개소식에는 김경재 한신대 명예교수 및 목사와 소백산 산위의마을 촌장 박기호 신부, 이동준 성균관대 명예교수, 이광호 국제퇴계학회 회장, 김흥수 한국 와이엠시에이전국연맹 이사장, 정숙자 목사 및 원로신학자, 곽분이 씨알여성회 대표를 비롯한 많은 이들이 와서 ‘새 길’을 여는 꿈을 응원해주었다.
최만자 전 한국여성신학회 회장은 “기존의 신학이 고통과 아픔에 답을 주지 못한 하는 상황에서 무엇보다 두 분(이은선·이정배)의 신학이 ‘전환 신학적’ 맥락에 서 서 이를 비판적으로 성찰하고 오늘 현실에 새롭게 응답할 수 있는 신학을 열정적으로 추구하기 때문에 한국 기독교에 큰 의미를 주고 있고, 한국신학의 미래를 이끌어 나가는 선봉에 있음을 인정하게 된다”고 평했다. 여성신학자로서 페미니즘을 선도하면서도, 그 페미니즘으로부터 비판까지 감수하면서도 동양 유교에서 인간 심성의 근원을 찾아내 기독교 정신과 연결시켜 신학의 새로운 지평을 열어가는 이은선의 신학 세계를 높게 평가한 것이다.
이날 행사는 이은선 교수의 <사유하는 집사람의 논어읽기>(모시는 사람들 펴냄), <동북아 평화와 聖·性·誠의 여성신학>, 이정배 교수의 <유영모의 歸一신학>(밀알북스 펴냄)의 출판기념회도 동시에 진행됐다. 이 책이야말로 동서양을 회통해 한국적 신학을 여는 이 교수의 사상이 농축돼 있다. 이 책 제목이 말하는 ‘집사람’은 가부장적 유교사회에서 집안에만 머문, 수동적 여성을 가리키는 용어로 오독될 여지가 있다. 그러나 진실은 그 너머에 있다. 해방이 서구가 낳은 페미니스트까지도 넘어서야 할 지점일 수 밖에 없다는 그의 고집스런 사상적 집념이 담긴 단어가 아닐 수 없다. 그가 이날 초대소장으로 밝힌 것에서도 이를 알 수 있다.
“서구 근대 페미니즘 운동 덕분에 우리 몸이 해방되었고, 성이 해방되었으며, 감각의 세계가 한껏 피어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런 모든 사태가 보여주듯이 거기서 생명의 또 다른 차원인 몸의 거룩성이 모두 탈각됨으로써 우리 몸과 섹스와 이 생의 삶은 그저 무생명의 물질과 쾌락의 도구가 되었고, 무차별한 폭력의 대상이 되었다. 이 비참한 불의가 단지 서구 페미니즘적 법적 정의의 회복만으로 치유되거나 해소될 수 없다고 본다. 보다 근본적이고 세계관적인 전이가 요청되는데, 여기서 뜻밖에도 동아시아의 오랜 신유교의 성 이해에서 그 한 가능성을 본다. 조선 신유교에서는 성(性)이 우리 안의 깊은 내재적 초월의 차원과 하늘의 차원을 지시하면서 우리 몸과 감정, 성적 관계 등의 신체적 차원이 끊임없는 중용과 섬김, 삼감의 예(禮)로 보살펴지는 일을 강조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오늘의 우리의 깊은 병폐인 몸과 성의 철저한 물화에 맞서서 다시 그 내재적 거룩성을 확보할 수 있는 길을 말하는데, 그것을 오늘 한국의 보수 교회에서처럼 세상 밖의 외재적 구원자에 기대서 하는 방식이 아니라 우리에게 더 오래된 동아시아 전통에서의 성과 몸 이해로 가능해지도록 하는 일을 말한다. 즉 ‘한국적’이라는 표제어 아래서 먼저 지금까지 서구 기독교가 독점해온 신과 거룩을 동아시아의 더욱더 보편적인 초월의 이름인 성(聖)으로 해방시키고, 또 다른 동아시아의 이름인 성(性)을 가져와서 우리 몸과 성(섹스), 가족적 삶과 모성 등의 사적 삶의 거룩성을 회복하는 일이다. 즉 ‘성(聖·거룩)의 평범성의 확대’의 일이라고 생각한다.”
이날 출판기념회에서는 이선경 한국전통문화대학 외래교수와 김정숙 감신대교수는 이은선교수의 책을, 임종수 한국예술종합학교 외래교수는 이정배 교수의 책을 놓고 각각 서평을 발표했다. 이선경 교수는 서평을 통해 “<사유하는 집사람의 논어읽기>라는 책 제목을 처음 접했을 때, 이 ‘집사람’이 기혼여성을 의미하는 줄 알았다”며 “그런데 책을 읽다보니, ‘집사람’이란 ‘저 세상’이 아니라, ‘이 세상이라는 집에 사는 사람들’이란 의미이고, <논어> 읽기를 통해서 이 세상에서 이른바 ‘내재적 초월’을 살아내자는 이야기라는 걸 알게 되었다”고 말했다. 이 교수는 “이 책의 정신을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말씀을 통해 내재적 초월을 살아냄으로써 나의 존재를 실현하기를 기도합니다’가 될 것”이라며 ‘남성도 여성도 모두 ‘집사람’으로서의 삶을 잘 살아내야하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이정배 교수가 쓴 <유영모의 歸一신학>은 함석헌의 스승이자 영성가인 다석 유영모를 깊게 연구한 필자가 다석학회에서 펴낸 <다석강의>를 재정리해 조직신학적으로 재구성한 것이다. 이정배 교수는 <다석강의>가 말하려는 것이 결국 <귀일신학>이라고 보았다.
한국신연구소 소장 이은선 교수는 ‘좋은 사람’, ‘좋은 세상’을 만들어보려는 의지를 이렇게 표현했다.
“우리를 종이라고 부르지 않으시겠다는 예수의 선언을 21세기 오늘 한국 땅에서 다시 한번 정직하고 진실되게 사실화해보자는 의지, 그 예수보다 거의 4백여년전에 동아시아의 맹자는 먼저 초월에 대한 믿음이야말로 사람들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고, 그것이 선이며, 그 믿음은 바로 나에게서 나오고 내 몸에 두는 것이라는 사실을 밝혔다. 초감각적인 것이 먼저이고, 모든 형상적이고 감각적인 것은 거기서 나오는 것이지만 그것을 믿기 위해서는 감각의 몸으로 느끼고, 경험하고, 통과해야 하므로 이 감각의 기반이 참으로 긴요한 것을 강조한다. 그래서 누구에게나 따뜻하고 친밀한 가족이 필요하고, 거기서 누구나 자신의 몸과 감정이 소중하게 대접받는 경험을 요청하고, 누구든지 이 지구라는 집에 태어났으면 모두가 평등한 주인이므로, 이곳의 선한 것을 공평하게 누릴 수 있어야 한다는 것. 그래서 우리 사회의 ‘기본 소득’을 말하고, 또한 누구든지 살던 집을 떠나갈 때 함께 했던 가까운 사람들의 배웅을 따뜻하게 받을 수 있도록 죽어가는 자의 고독을 다시 깊이 껴안는 사회적 효의 일 등 이런 모든 것이 한국신연구소와 현장아카데미가 깊게 관심을 갖는 일이다.”
조현 종교전문기자